'88서울 올림픽 개막 오페라 - "시집가는 날"
후기성도(말일성도) 김신환 형제 총감독

조선일보 1988.9.16
(
일간 스포츠 197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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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올림픽이 개막되기 전날인 1988년 9월 16일 저녁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는 한국적인 줄거리를 소재로 한 오페라 "시집가는 날"이 초연되었다.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서울 올림픽을 기해 한국을 소재로 한 세계적인 오페라를 만들기 위하여 오페라 작곡의 거장 잔 카를로 메노티에게 작곡을 의뢰한 "시집가는 날"은 서울 시립 오페라단에 의해 공연되었으며 총감독에는 김신환 형제(서울 시립 오페라 단장)가 맡았다. 고 김호직 박사의 아들인 김신환 형제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테너 가수이기도 하며, 서울 시립 오페라단을 이끌고 이번 공연의 성공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이번 공연에는 또 한 사람의 말일성도(후기성도)가 활약하였는데, 그는 이번 공연을 위하여 이태리에서 귀국한 바리톤 최현수 형제이다. 그는 이 공연에서 관찰사 역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

   최형제는 이태리에 체류하면서 그동안 스칼라 가극장 아카데미학교를 비릇하여 밀라노 베르디 음악학교, 오지모 음악학교, 베르곤찌 아카데미를 졸업하였으며, 세계 최고 수준의 베르디 국제 콩쿠르 1등을 위시하여 8개의 국제 콩쿠르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외 베르디의 리골렛또, 가면 무도회, 춘희 등에서 주역으로 출여하였고, 이태리 여러 곳에서 순회 공연도 가졌다.

   이번 올림픽을 기해 초연된 세계적인 오페라에 재능을 유감옶이 발휘한 김신환 형제와 최현수 형제는 자신의 성과 뿐만 아니라 모든 말일성도의 끼쁨인 것이다.

                                                 (조선일보 1988.9.16, 리아호나(성도의 벗) 1988.11)



이태리 성당앞에서 김신환 형제(좌에서 두 번째) (*본 사진은 기사밖 사진)



이태리 오페라의 혹성, 태너 김신환씨
-일간 스포츠, 1974.10.10-
-성도의 벗, 1974.11-


 

중앙일보에 소개된 김신환 형제

고 김호직 박사의 장남이자 세계적인 성악가인 김신환 형제가 자신의 이름을 딴 ‘김신환 국제 성악 콩쿠르’의 설립을 계획 중이다. 설립을 위한 기념 음악회도 열렸다. 6월 30일 서울 압구정동 장천 아트홀에서 열린 음악회에는 국내 최고의 성악가 12명이 참가했다.

오페라 진흥회 회장이기도 한 김신환 형제는 성악계에서는 이탈리아 벨칸도 창법을 계승한 독보적인 존재로, 유럽의 내로라하는 성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김신환 형제의 이름을 딴 국제 성악 콩쿠르에 관한 소식은 국내의 많은 언론사에 보도되었다.

한편, 김신환 형제는 2009년 8월 1일 서울 스테이크 신당 와드에서 열리는 ‘구도자를 위한 노변의 모임’에 참석해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 줄 예정이다.

다음은 김신환 형제를 소개한 중앙일보 기사다.


“노래는 삶 자체, 그 속에 고통도 있고 희열도 있어”

자신의 이름 딴 국제콩쿠르 여는 성악가 김신환씨

지난달 30일 오후 10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장천아트홀. 1, 2부에 걸쳐 두 시간여 진행된 음악회의 레퍼토리가 모두 끝난 직후 한 노신사가 성큼성큼 무대로 걸어나왔다. 관객의 시선이 그의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작은 키임에도 그의 말투와 동작에선 ‘마에스트로’의 위엄이 배어 나왔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정에 없었던 것이지만 제가 노래 한 곡 안 부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곡목은 김재호 시, 이수인 작곡의 ‘고향의 노래’입니다.”

‘국화꽃 져 버린 겨울 뜨락에 창 열면 하얗게 뭇서리 내리고 나래 푸른 기러기는 북녘을 날아간다. 아~ 이제는 한적한 빈 들에 서 보라. 고향 길 눈 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고향 길 눈 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후략)’

노신사는 고음을 처리할 때 지휘자를 둘러싼 철제 난간을 잠깐 붙잡기도 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이탈리아 전통의 ‘벨 칸토(아름다운 노래라는 뜻)’ 창법으로 한국인의 정서가 담긴 명곡을 노래했고, 관객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이 노신사가 늙지 않는 목소리, 어린아이 같이 해맑은 얼굴의 김신환(사진) 전 영남대 음대 학장이다. 이날 음악회는 그의 이름을 딴 ‘국제성악콩쿠르’ 설립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다.

생물학도에서 성악가로

성악가 출신 음악평론가 탁계석씨는 이 노신사를 ‘예술을 노래하는 영원한 현역’이라고 부른다. 올해 78세지만 얼굴엔 미소가, 몸엔 생기가 넘친다. 비결을 묻자 “평생 불러온 노래 덕분”이란다. 지금까지 1000여 차례 무대에 섰고 20여 차례 독창회를 했다.

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 노래가 뭡니까.

“삶 자체지 뭐. 그 속에 고통도 있고 희열도 있어.” 이날 무대에 선 고성현 한양대 교수, 김요한 명지대 교수 등 12명의 성악가들은 대부분 그의 제자들이었다. 이 중에는 춘천지법 정강찬(43) 부장판사도 있었다. 아마추어로서는 드물게 예술의전당에서 독창회를 열었던 ‘테너 판사’다. 그는 주말마다 처 외삼촌인 김 전 학장에게서 성악을 배운다.

김 전 학장은 성악계의 ‘국보급 존재’다. 20대 초반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30여 년을 해외에서 살았다. 원래 그의 전공은 ‘생물학’이었다. 서울대 문리대 생물학과에서 파리 솔본대학 생물학과로 공부하러 떠난 지 2년 만에 성악가로 변신했다. 유학 가기 전부터 성악에 빠져 있긴 했다. 군 복무 시절 전시 육군교향악단 , 해군 정훈음악대 합창단원으로서 헨델의 메시아, 하이든의 천지창조 등 오페라 에 출연했다.

파리에선 전공보다 성악 개인 레슨에 더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다 파리예술콩쿠르에 나갔는데 성악 전공자들을 제치고 1등을 했단다. 한국인 최초의 유럽 국제콩쿠르 입상 기록이다. 이후 프랑스예술가곡해석콩쿠르 등 5~6개 국제 콩쿠르를 석권했다. 그러자 스승인 샤르 판제라 파리국립고등음악대학원 교수가 “생물학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노래는 타고난 소질이 있어야 한다. 당신은 음악가의 운명을 타고났으니 그 길을 가라 ”고 권유했다. 결국 그는 인생의 항로를 바꿨고 4년 뒤인 61년 파리에서 성악가로 공식 데뷔했다. 데뷔작으로는 독일 작곡가인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1681~1767)의 ‘요한수난곡’을 세계 초연했다. 그 즈음 한인 프랑스 유학생회 회장직을 맡아 군사 독재 시절 조국을 떠나 있던 젊은 예술가들의 소통 창구 역할을 했다. 작곡가 윤이상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직원이 유학생의 동태를 알려주면 경제적인 도움을 주겠다고 유혹해 호통을 쳐서 쫓아낸 적도 있었지.”

김 전 학장은 60년대 중반 이탈리아 로마를 거쳐 밀라노에 정착했다. 전 세계 성악가들의 꿈의 무대인 ‘라 스칼라’ 극장의 솔리스트가 되기 위해서였다.

유학생활은 쉽지 않았다. “배가 고팠지. 일주일에 이틀은 오페라 공부를 하고 사흘은 돈벌이를 해야 했어. 한때 마사지사로도 일했지. 내가 손힘이 셌거든.” 결국 김 전 학장은 고생 끝에 76년 오페라 주연 오디션에 합격했고 이듬해 라 스칼라 극장의 테너 솔리스트로 발탁됐다. 1776년 개관한 라 스칼라 극장 사상 최초의 동양인 솔리스트였다.“

당시 이탈리아 전통의 벨 칸토 창법 복원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어. 지금은 세계 최고 바리톤으로 꼽히는 ‘레오 누치’와 함께 선발돼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 주연을 맡았지. 이탈리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했고 이탈리아 기사 작위도 받았어.”

18세기에 유행했던 벨 칸토 창법은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발성, 명확한 가사 전달 등을 중시한다. 세계 최고의 오페라 가수인 마리아 칼라스도 벨 칸토 창법으로 불렀다. 이정애 한서대 교수는 “김신환 학장님은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벨 칸토 창법의 대가 중 한 분”이라며 “여성 소프라노들도 그분에게서 발성법을 배울 정도”라고 말했다.

라 스칼라 첫 동양인 솔리스트

지난해 숨진 이탈리아 태생의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는 김 전 학장의 라 스칼라 극장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디 스테파노는 마리아 칼라스의 이중창 파트너로, 세기의 명콤비를 이뤘다.

“74년 중앙일보 주최 음악회에 마리아 칼라스를 초청했지만 칼라스가 응하지 않았어. ‘나는 여자 사자로 태어났는데 지금 한국에 가서 노래하면 개처럼 죽을 것’이라는 이유를 댔거든. 당시 칼라스는 연인이던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실연으로 상심한 상태였지. 노래를 제대로 부를 심리상태가 아니어서 갈 수 없다는 것이었어. 그때 내가 디 스테파노를 통해 칼라스를 설득해 한국에 데리고 같이 들어왔어. 그녀는 사랑의 묘약 1막에 나오는 이중창 등 2곡을 불렀지.”

그는 노래의 힘은 대단하다며 수많은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를 소개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경기고 1년 후배인 이상훈 국방부 장관이 하루는 전화를 해 ‘빨리 와 달라’고 했다. 정부가 용산미군기지에서 미군이 나가게 하겠다고 발표하자 전·현직 장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 장관이 나를 소개하자 ‘지금 한가하게 무슨 노래냐’는 소리가 나왔다. 노래를 시작하자 처음엔 뜨뜻미지근하던 참석자들이 나중엔 앙코르를 네 번이나 했다. 이 장관이 ‘앞으로 강하게 나가겠다’고 하자 박수가 나왔고 사태가 해결됐다. 노래의 힘이 그런 것이다.”

김 전 학장은 80년대 중반 ‘뜻한 바 있어’ 외국 생활을 완전히 접고 귀국해 영남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한국 오페라의 국제화, 한국 가곡의 세계화에 매진했다. 성악가에서 음악행정가로 또 한 차례 변신했다. 귀국 직후인 85년 서울시립오페라단을 창단해 초대 단장이 된 후 13년간 이끌었다.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글 자막을 처음 도입한 것도 그였다. 이명박 대통령과는 그가 서울시장일 때 2년간 세종문화회관 사장을 지낸 인연이 있다. 국내외 각종 국제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도 활약했다. 이탈리아 벨리니 국제성악콩쿠르,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콩쿠르 등이다.

가곡 세계화 위해 내 이름 걸어

김 전 학장은 주변에서 콩쿠르 설립을 제안할 때마다 완곡하게 거절했다. “살아 있는 음악가의 이름을 딴 콩쿠르는 적절치 않다”고 했다. 최근 들어 마음이 움직였다.

“언젠가 파바로티의 스승인 에토레 캄포갈리아니 선생이 ‘이탈리아 민족이 오페라 종주국으로서 누려왔던 지위가 한국 민족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다. 지금 한국은 성악 대국으로 도약하고 있다. 한국 예술가곡의 세계화에 도움이 된다면 내 이름을 걸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전 학장의 뜻에 따라 콩쿠르 참가자들은 1~3차 예선, 본선에 이르기까지 전 단계에서 반드시 한국 가곡을 불러야 한다. 콩쿠르 조직위원회에는 국내외 저명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다. 조직위원장은 주세페 줄리아노(70) 전 이탈리아 카리에리 국립극장장이 맡았고 초대 심사위원장은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를 내정했다. 시인 김남조, 작곡가 김동진, 이상훈 전 국방부 장관, 염보현 전 서울시장 등이 고문이다. 상금도 외국의 유명 성악콩쿠르 수준으로 줄 계획이다. 조직위원회는 내년 6월 이전에 1회 대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그와 서울대 문리대 학보 편집위원을 같이 했던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은 기념 음악회 축사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시간의 흐름도 그의 아름다운 노래를 뺏지 못했다. 공간의 벽도 그의 사랑을 막지 못했다. 그는 분명 시간과 공간을 정복한 승리자이다.”

조강수 기자

[기사: 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한국 공식 사이트 / http://www.lds.or.kr]

 


한국오페라 60주년

한국 오페라의 발전과 함께

한국OPERA진흥회 / 한국성악회 김신환 회장

<위클리피플> 제562호 한국OPERA진흥회 / 한국 성악회 김신환 회장

올해는 국내에 오페라가 들어온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오페라를 보면 그 나라의 공연예술을 알 수 있다는 얘기가 있다. 전반적인 예술이 한데 어우러져야 완성되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그간 국내 오페라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국내 오페라의 발전에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있다. 그는 바로 한국오페라진흥회의 김신환 회장이다. 김 회장을 만나 그동안의 활동과 국내 오페라의 발전,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얘기나눠보았다.

 

한국 오페라 60주년

1948년, 서울 명동 옛 국립극장 무대에서 이인선과 김자경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고 임원식이 지휘한 ‘라 트라비아타’가 한국 오페라史에 기록된 첫 공연이다. 한국의 오페라는 1980년대 말부터 해외 유학파들의 귀국과 더불어 큰 발전을 하게 되었고, 본고장 수준의 작품을 통해 국내 오페라의 발전이 이뤄졌다. 또한, 예술의전당 내에 오페라 전용극장인 오페라하우스가 완공되면서 오페라단의 수가 크게 늘어난 것도 한국 오페라의 발전에 기여한 부분이다. 수많은 오페라들이 공연되며 음악팬들을 만들어왔고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환갑을 맞은 한국오페라의 역사와 함께 걸어온 김신환 회장과의 만남은 지금까지의 국내 오페라의 발전을 되짚어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음악의 길에 이르기까지

김 회장은 처음부터 음악도를 꿈꾸던 학생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 시절 병든 불쌍한 이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며 의사를 희망하던 적도 있다.
이화여전 교수, 숙명여전 교장, 홍익대학교 총장, 연세대학교 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 한국 UNESCO 부위원장, 문교부 차관 등을 역임하기도 한 그의 부친
김호직 박사는 나라를 위해 특별한 일을 많이 했다. “인간은 성실해야 된다. 적당히 성실해서도 안 되고, 철저히 성실해야 된다. 반드시 타인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대변할 수 있는 훌륭한 정신을 갖춰야 되며, 매사에 감사하고 한국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애국 애족을 위해 혼을 바쳐야 한다.”는 부친의 가르침은 그가 평생을 가슴에 담아온 삶의 지표였고, 선친은 어려서부터 그의 인생에 있어 우상이자 정신적 기둥이었다. 김 회장이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1959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그의 부친은 국가에서 그의 깊은 애국심과 사회적 공을 높이 평가받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어릴 적부터 학업에 두각을 나타낸 김 회장은 경기고등학교에 재학하며 학업 외에 다양한 특별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선친은 정서 교육의 일환으로 음악 공부를 하도록 뒷받침을 했는데, 1945년 해방된 때부터 성악 개인교습을 받게 되어 이승학 선생을 첫 스승으로 모셨고, 1946년에는 국내 최초의 오페라 La Traviata의 주역인 이인선 선생께 사사 받았는데, 교육은 이인선 선생이 1950년 미국으로 건너갈 때 까지 계속되었다. 특별활동을 통해, 학업 외에도 두각을 보인 그. 합창부의 부장으로 전국 중등학교 음악 콩쿨에서 지휘를 하여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의용군으로 징용되기도 한 그는 구사일생으로 생존해, 육군 보병으로 복무하여 육군군악학교에서 육군교향악단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빠듯한 시간에도 입시를 준비하며 서울대 문리대에 진학해 생물학을 전공하였는데, 학업 중에도 독창자로 초빙돼 당대 대가들과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그는 문리대학생으로 프랑스 파리 쏠본느 대학에서 유학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문리대 동기들 10명이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이는 그의 부친이 문교부 차관을 지내며 외국 유학의 문호를 터 5000여명의 국비장학생을 선진 각국에 보낸 것이 주효했다. 당시 유학생활을 했던 이들은 유학 후 한국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프랑스에서도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치지 않았다. 파리국립고등음악원의 주앗뜨 교수에게 사사받고, 각종 국제음악경연대회에서 1,2위를 차지하는 등 성악에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에게 교수와 주위에서는 적극적으로 음악에 전향해 세계적 성악가가 되기를 독려하였다. 그는 1957년 파리예술콩쿨에서 입상해, 한국음악역사상 최초로 국제성악콩쿨에 입상한 기록을 갖게 되었고, 1958년 프랑스가 자랑하는 세계적 음악 교육기관인 파리국립고등음악원 고등학부에 정식 입학하게 됨으로 완전한 음악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Telemann의 요한 수난곡 세계 초연 때, 주역을 맡음으로 국제 무대에 데뷔하였고, 1964년에는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계속하게 되었다. 3년간 로마에서의 유학 후 84년까지 밀라노에서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발상지이자, 성악의 왕국이다. 그러한 이탈리아에서 오랜 기간 동안 성악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국내 오페라의 자랑을 뛰어넘는 무엇인 것이다. 1976년에는 Teatro Alla Scala di Milano의 주역 오디션에 합격해 Scala극장의 Recitar Cantando 연중 프로그램의 주역으로 참여해 전속 성악인으로 계약되어 Tenor Solist가 되었다. “이탈리아 오페라 200년 역사상 동양인 남성가수로는 최초의 Solist로 기록되기도 한 일이었습니다. 이루 말 할 수 없는 영광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여러 훌륭한 무대에 서는 기회도 갖게 되어 저에게는 다시없는 큰 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라고 전하는 그는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 Festival에서 개관기념 독창회를 갖기도 하였다.

한국 오페라와 함께 걸어온 길

김 회장은 현재 이태리 벨칸토 최고의 스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탈리아에서의 유학시절을 통해 벨칸토 창법의 생리학, 음성학적 측면의 연구를 하였고, Bel Canto Italiano를 저술한 Tocchio선생께 8년간 사사하였다. 신경과 음성에 관한 집중 연구였으며, 이는 잘못된 발성 또는 개념으로 고민하는 성악도에게 건강한 성악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그의 어릴적 꿈이었던 의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국내에는 1984년 귀국, 영남대학교 교수로서 13년간 봉직하였고, 음악대학원 주임교수와 동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또한, 귀국 즉시 서울시와 함께 서울시립오페라단을 창단하였고, 초대단장으로 13년간 봉직하였다.

세종문화회관 소속의 예술단체장협의회 회장도 함께 맡게 되어 대구에서는 영남대학교 음악대학장을, 서울에서는 서울시립오페라단장으로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의 이러한 나날들이 현재 국내 음악계의 발전에 일조했다고 생각하며, 국내 오페라 수준을 2,30년 앞당긴 것이라고 사람들은 얘기한다. “무대에 올린 모든 오페라의 예술총감독으로 직접 예술제작에 책임을 지며, 단장으로서 행정을 겸하여 행하게 되었으나 고달픔을 느끼지 않고 책임 있게 또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일에 임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예술행위가 높이 평가되어 문화부장관 감사패, 서울시 시장 감사패, 음악인상, 한국최우수예술인상 등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과거 파리예술콩쿨과 파리국제음악콩쿨 성악부 1위, UFAM국제음악콩쿨 성악부 1위, 프랑스 예술가곡 해석 국제 콩쿨 2위 등 한국인 최초로 세계 저명 국제콩쿨의 한국인 입상자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이탈리아 아르깐제로 꼬렐리 금상, 안제로 마리아니 금상, 이탈리아 베르디 금상 수상 등 성악인으로서의 영예를 누렸다. 이후 한국음악 펜클럽상을 비롯, 이태리 마스까니 금상, 이태리 금년의 온정상, 이태리 빤빠니니 문화상, 이태리 대통령 훈장과 까발리에레(기사) 작위를 받음으로써 세계무대에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게 되었다.

그는 국내 예술교육의 발전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유럽의 예술교육을 가까이 접했기에 국내 교육 시스템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했고, 당시 이어령 문화부 장관에 진언해 문화부 산하에 예술종합학교를 창설케 했다. 미래를 준비하는 예술 교육을 통해 나라에 애국하려는 생각에서 비롯되어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2002년에는 세종문화회관 사장으로 취임해 2004년까지 역임하였는데, 그가 바로 세종문화회관 리모델링을 진행한 사람이다. 각 공연에 맞춘 높은 품질의 공연을 제공하기를 꾀했고, 이는 성공적인 변화로 평가받고 있다. 2005년 4월에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권위있는 Verdi 국제음악콩쿨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그는 모스코바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콩쿨을 위시하여 25년간 세계 저명 국제콩쿨의 심사위원을 맡아왔으며, 이는 한국인으로 세계 저명국제콩쿨의 심사를 맡은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었다. 이는 그의 가슴 깊이 담긴 부친의 가르침을 행해온 그 자체이며,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마음가짐도 지금까지의 자세와 다를 바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에대해 음악평론가 이상만은 얘기한다. “김신환 회장의 체구는 한국사람의 보통체구이다. 차라리 작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무대에 서면 그렇게 커보일 수 없다. 당당하면서도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다. 분명히 한국이 낳은 거인 예술가이다.”

앞으로의 길

한국 오페라 60년 기념사업회의 회장이기도 한 김회장은 “좋은 오페라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능력 위주로 가능성 있는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과거 활동을 묻기보다는 현재의 능력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지요.”라 얘기한다. 한국 오페라 60년 역사 속에서 한 때 한국어로만 올려졌던 오페라는 현재 원어로 불리며 국제화가 잘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서도 그의 활동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기념사업회 활동으로 한국 오페라 60년사 책자 발간과 공적자를 선정해 수상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김 회장은 오페라 진흥공사를 주창하는데, 이는 우리나라가 오페라 강국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에서 기반한다. “국내의 오페라 수준은 그 역사에 비해 대단히 괄목할 만 합니다.” 이는 이탈리아의 유명 음악교수이자 故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스승인 깜뽀갈리아니의 말을 빌릴 수 있다. 깜뽀갈리아니는 김 회장의 스승이기도 한데, 그가 한 TV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오페라 종주국은 타민족이 될 것이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어디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국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는 여러 한국인을 제자로 두며 그 스스로 깨우치게 된 것이리라 생각된다. 김 회장은 외국에서도 인정받고 기대되어지는 한국의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체계적인 시스템이 뒷받침되야한다는 생각으로 오페라 진흥공사를 주창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 구축에 김 회장의 국제적인 활동이 기틀을 마련해 국내 오페라의 발전 뿐 만 아니라 세계 오페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그는 후배들에게 “현재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시대입니다. 스스로 한국인임을 넘어 세계인으로 거듭나길 바라며, 자유로움 속에서 살 길 바랍니다. 그리고 열심히 탐구해 자신의 위치에서 새롭게 변화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한국 오페라가 60주년을 넘어, 100주년, 200주년이 되었을 때는 우리의 오페라가 더욱 발전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라 덧붙였다. 끊임없이 연습하고, 연구하며, 교육하는 그. 한국 오페라의 발전을 넘어 세계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김신환 회장의 활발한 행보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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