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임명식장의 55세의 노장 한상익씨


뉴질랜드, 한 상익형제 뉴질랜드 변호사에 임명.

http://koreaherald.co.nz/korea/T_board/news_view.asp?gubun=companynews&idx=20068 

제 목   의지의 한국인 만년의 한상익 변호사의 인생 역정 -
 
글쓴이   한국신문  | 조회수 : 57 |  등록일 : 2010-07-15
 


한국신문 인물 탐구




▲변호사 임명식장의 55세의 노장 한상익씨

  지천명의 나이를 훌쩍 넘겨 과감히 법과 대학에 입학하여 변호사가 된 교민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인물은 현재 해밀톤에서 와이카토 한국 학교 교감으로 봉사하고 있는 한상익 변호사(사진).  한상익 변호사는 금년 6월 11일 해밀톤 고등법원에서 정식으로 법정 변호사(Barrister) 및 사무직 변호사(Solicitor)에 임명되었다. 1955년생이니까 금년에 55세가 된다. 

  본지와 접속한 한상익 변호사는 “늦게 공부한 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느냐?”고 하면서 인터뷰를 고사했지만, 어렵고 희망이 안 보이는 현재 교민 사회에서 늦은 나이지만 뜻을 세우고 노력해서 훌륭한 성취를 이룬 것은 교민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미담이 될 수 있어 본지는 그의 인생 역정을 들은 대로 소개한다.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난 한 변호사는  사학의 명문인 배재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대학 입시시험에 실패하여 재수생의 길을 걸었다. 

  평소에 꿈꾸던 경영학과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를 하던 중 대학입시를 며칠 앞둔 때에, 먼저 대학교에 입학한 친구의 방문으로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으로 봉사했던 그 친구는 대학 졸업 후 취업해 봐야 월급쟁이 밖에 될 수 없지만 예술가들은 자유롭고 명예로운 길임을 설득 당해 교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학 응시 직전에 중앙대학교 연극 영화과를 지원하여 수석으로 합격했다.

연극학 교수가 되려고 이론 공부에도 열심이었지만 연출가의 눈에 띄어 리어왕, 리차드 삼세 등에 주연으로 활약을 했고 현재 문화관광부 장관을 하고 있는 유인촌씨가 2년 선배로 함께 연극을 하기도 했다. 연기의 재능을 인정받아 선배들로부터 극단에 가입 권고를 받기도 했다. 한상익 변호사는 “만약에 그 때 극단에 가입했었다면 아마 지금 계속 한국에 남아서 텔레비전에서나 얼굴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면서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그는 다재다능했던지 대학 시절에 아르바이트로 했던 영어 번역을 통해 또 다른 길에 접어들게 된다. 교회 재단 사무실에서 번역사 자리가 나서 추천을 받는 바람에 좀 더 영어 공부를 할 욕심으로 근무를 하게 된 것이 결국은 젊었을 때의 평생 직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곳에서 자재관리부장, 시설부장 및 인사부장을 두루 역임하며 관리직으로 근무를 하게 된다.  

  1999년 12월 22일은 한상익씨에겐 새로운 삶의 전환점이 된 날이다.
아들만 넷을 둔 한상익씨는 그 당시 한국 생활이 결코 순탄치가 않았다. 지금은 한국에서 저출산으로 출산을 장려하고 여러 혜택을 주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은 인구 억제 정책으로 의료보험도 자녀 두 명까지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등 세 명 이상 자녀가 있으면 여러 불이익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주위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그래서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과 자녀의 장래를 생각하던 중 먼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간 친구와 연결이 되어 부부가 함께 열흘 간 답사를 한 후 바로 뉴질랜드 이민을 결심하게 된다. 그 때 나이가 불혹을 넘긴 45세였다.
오클랜드에 머물면서 한상익 변호사는 영주권이 나오기 전까지 잡오퍼에 이어 워크 퍼밋을 받은 후 우선 아이들을 학교에 입학시킬 수가 있었다. 막내만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나머지는 모두 타카푸나 그래머 스쿨에 입학을 하게 된다. 한국에 있을 때 학교에서 제대로 영어를 공부하지 못하고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학교에 잘 적응해서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한상익씨는 한국인 경영 타일 가게에서 일을 하며 뉴질랜드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고, 그 와중에 번역 경력을 살리기 위해 AUT에서 번역과정(Level 7)을 이수하는 학구열을 식히지 않았다. 

  또한 한상익 변호사는 현지인 컴퓨터 학원에서 컴퓨터를 배우고, 이내 자격을 갖추면서 그 학원에서 강사로 키위들을 가르치는 저력을 발휘하고 교민 2세 교육을 위해 해밀턴으로 거처를 옮긴다. 

해밀톤으로 내려오자마자 한상익 변호사는 와이카토 한국학교의 교감으로 재직하면서 외국인에게 한국어 및 한국 문화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 변호사는 언어 교육을 보다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오클랜드 대학원 응용 언어학과에 입학하고 결국 2006년 5월에 우등으로 졸업을 하게 된다. 

한상익 변호사의 끊임없는 인생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한국 학교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접하면서 변호사의 길이 교민사회에 더 큰 봉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2007년에 해밀톤에 있는 와이카토 대학 법대에 입학을 하게 되는 데 그 때 나이가 만 52세였다.

  한상익 변호사는 “법대 공부를 결심하면서 어느 정도 힘들 것은 예상했지만 막상 각 과목에 해당되는 교재를 받는 순간 그 교재의 두께에 일단 질리게 되었고 그 안에 빽빽이 인쇄된 내용을 보고는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고 후일담을 회고한다.

그는 “한국에서도 대학원을 졸업했고 이곳 뉴질랜드에서도 오클랜드에서 대학원 공부를 해 보았지만 법대 공부에서 접하는 영어는 전혀 다른 언어 같다”고 했다. 그러던 중 어느 하버드 법대생도 똑 같이 판례를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된다고 푸념하는 글을 읽고는 비로서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아들 뻘이나 되는 젊은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같이 공부를 하는 것이 처음에는 쑥스러웠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이곳 젊은이들과 친구처럼 지내면서 젊음을 되찾은 듯 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단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도서관이 문을 열기를 밖에서 기다렸다가 들어가서 문을 닫는다고 좇아낼 때 나오는 색다른(?) 경험도 법대를 다니면서 하게 되었고, 금방 읽은 것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이에서 오는 기억력의 감소 때문에 세 시간씩 치루는 시험을 대비하여 공부하기 위해 볼펜으로 수없이 쓰면서 외우느라고 몇 개의 볼펜이 다 닳도록 써보는 경험도 했단다.

  또한 매주 토요일마다 한국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도 시간이 모자를 때나 시험이 겹쳐 있을 때는 결코 쉽지가 않았지만, 그래도 공부 때문에 한국 학교 봉사를 빠져 본 적은 없다고 했다.

  모든 어려운 과정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내와 가족의 이해와 지지가 제일 컸다고 말한다. 한상익씨의 아내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한상익씨가 하는 일에 불평을 해 본 적이 없이 무슨 결정을 내리든지 이해하고 지지해 주었다고 한다. 또 얼마를 벌어오든지 월급으로 불평을 해 본적이 없단다. 그래서 이곳에서 돈을 안 벌고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불평없이 지지하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자녀들도 늦은 나이에 공부하는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고 응원해 주었기에 힘을 얻고 힘든 과정을 마칠 수가 있었다고 한다.  한상익 변호사는 남들은 퇴직을 생각하는 나이에 새로운 자격을 갖추게 되었기에 돈을 벌려는 생각보다는 낳아주고 키워준 한국과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뉴질랜드를 위해 무엇인가 기여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그 것이 어떤 일이 되든지 늦은 나이에 힘들게 공부를 마치고 변호사가 된 만큼 값지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있으리라 믿으며 이 사회에서 소금의 역할을 하는 한상익씨의 앞날을 그려본다.  ■

 


All Contents Copyright by 1999-2010
For questions and comments, send e-mail to
pcway@paran.com
http://www.ldskorea.net
TEL: 010-4236-9900 / 070-7620-9900 / FAX: 031-726-9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