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의 선교사
이영범 형제

 

 

 

 


 

   1954.12월 김호직 박사로부터 침례. 서울 을지로 6가 침례교회의 건물 뒤 연못에서 침례받음. 이 날 밤 그는 기도를 했다. "주님 이 은혜 무엇으로 보답하오리까. ...당신의 말씀을 온 천하에 알리겠습니다. 뜨거운 사막도 좋고...날 보내주소서."  선교사 부름을 받고 부산에서 봉사(20세).


대학3학년때 선교사 출발. 가족,학교당국,친지등을 놀라게 함. 기독교에 눈을 뜬 것은 연세대학교 입학할 무렵. 인왕산 중턱에 친구와 짝을 지어 올라가서 비가오나, 눈이 오나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2년! (이 때 친구가
홍병식 형제<홍박사 칼럼>). 선교사 귀환 후 군복무 마치고, 미국 남가주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 취득. 애리조나 피닉스에 거주. 법정 지정 심리학자로 근무. 애리조나 한인회 이사장(1996). 당시 동반자는 킴볼장로와 앤더슨 장로. 앤더슨 장로는 선교사업을 마치고 유타대학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근 30년이 넘게 브리감영 대학 하와이에서 교수생활하다가 은퇴후 한국 서울 선교부에서 부부선교사로 봉사. (*공식 한국선교부 조직 첫 한국인 선교사는 한인상 장로)

 

젊음의 회상

이영범 형제

 

    한 학기만 더 공부를 하면 졸업을 하게 될 대학 3학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장로가 되면서 선교사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 일은 가족이나 친구나 학교 당국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집에서는 힘들게 학비 대어 아들 자식 공부를 시켰더니 겨우 한다는 것이 학교 공부는 집어 치우고 예수쟁이가 되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러 길을 떠난다니 부모 형제로서는 가슴아픈 일이었다. 양과 같이 순하시던 주임 교수님은 학교를 마치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학업을 중단해서는 안된다고 타이르셨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그때의 학생처장님은 자기가 가르친 학생 가운데 이렇게 지작이 없는 행동은 있을 수 없다며 이해는 고사하고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노여움마저 느끼시며 이런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학교 게시판에 대문짝 만한 글씨로 내가 퇴학처분되었음을 알려 놓으셨다.

미국 사회에서는 학교를 1,2년 쉰다거나 다른 학교로 전학하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때 우리 나라에서의 사정은 달랐다. 우선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입학 시험을 치러야 했으며, 입학 후에는 전과나 전학이 허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일신상의 이유로 학교를 떠나게 되면 무조건 퇴학을 당하는 것이 그 당시 학교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ㄱ러한 상황에서 공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선교 사업을 위해서 학교를 그만둔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뜨거운 사랑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부처님을 섬기는 사람이 수도승이 되어 입산할 때에는 부모 형제를 비릇한 세상의 모든 인연을 끊기에 출가(出家)라는 표현을 쓴다. 나에게 있어 선교 사업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출가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의 옷을 입고 보통 사람의 밥을 먹고 세상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만 내 마음에는 세상의 모든 것과 결별한 것이다.

베드로가 그물을 던져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듯이 나는 이 때에 부모도 버리고, 형제도 버리고, 학교도 버리고, 친구도 버리고, 세속의 모든 것을 버린 것이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마저도 바치겠다는 뜨거운 마음과 젊음의 끓어오르는 정열만이 나에게 있었다.

그 후, 행족이 묘연해진 나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아프리카에 전도사로 떠났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봄에는 시제, 가을에는 추석에 일가 친척이 함께 모여 조상에 제사를 지냈고, 노란 개나리가 피는 봄에는 어머님의 치마 자락에 매달려 부처님께 시주 드리며 맛있는 이름 모를 산채 나물을 먹던 것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종교적 체험이었다. 내가 기독교에 처음 눈을 뜬 것은 연세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인왕산 중턱에 이른 새벽 친구와 짝을 지어 올라가서 비가오나, 눈이 오나 열심히 성격을 읽고 기도하기를 무려 2년! (그때 나의 친구 홍병식 형제는 지금 대전 선교부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나는 수학과 물리학을 좋아하는 공학도였지만, 신약, 구약, 종교사에 관련된 종교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공부 시간에도 항상 성경을 들고 다녔기 때문에 친구들은 공학 신학도라는 별명도 붙여주었다. 철학과 신학의 도강도 많이 하였다. 나는 기독교에는 움직이는 힘이 있고 세상을 뚫고 나가는  생동력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을 하였다. 추운 겨울 아침 을지로 6가에 있는 침례 교회의 연못을 빌려 꽁꽁 알어붙은 얼음을 깨고 들어가 한국에서 우리 교회의 선구자였던 김호직 박사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니 머리에는 곧장 고드름이 생겼고 옷은 얼어붇기 시작하였으나, 나의 마음은 하늘 문이 열리고, 땅이 나를 영접하는 기분이었다. 이 의식은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며, 죄사함을 받고 평생 동안 주님을 따르겠다는 언약의 표시였다.

구세주를 만난 나의 마음은 한없이 기쁘기만 하였으며, 온 세상이 자비와 사랑으로 넘쳐 흐르는 것만 같았다. 푸른 하늘도 바람에 나부끼는 솔잎도, 이름 모를 들풀, 그리고 길가는 낯 모르는 나그네도 내 눈에는 한없이 사랑스럽고 아름답게만 보였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참다 못해 어느 날 나는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

"주님, 이 은혜 무엇으로 보답하올까? 불러 주소서, 나를 불러 주소서. 이 기쁜 마음, 사랑의 마음, 구원의 히소식, 당신의 말씀을 온 천하에 알리겠습니다. 뜨거운 사막도 좋고, 얼어붙은 북극의 바다도 좋습니다. 날 보내 주소서." 그 때, 내 나이는 20세였다.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로마서 14:8)ㅏ고 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의 신앙 고백이었다.

내 주 예수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으니, 밤과 낮으로 묵상하며 주님을 찾는 것이 나의 생활태도였다.

주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셨다. 나는 교회의 한국인 최초의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서을을 떠나 부산으로 가게되었다. 낡은 전구 공장을 빌려 모임 장소로 쓰고 2층 다다미 방에서 거처를 하니 밤에는 쥐들이 머리위를 넘나들었다.

그때의 생활비는 한달에 2달러였는데 그 돈을 미8군의 군인 회원들이 한 푼, 두 푼 모아서 다달이 도움을 주었다.

시장 바닥에서 동반자와 함께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사과 궤짝을 엎어 놓고 그 위에 올라가 "부산 시민 여러분!" 하면서 목청을 높여 보았다. 광복동 네거리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외쳐도 보았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 하나니 이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로마서 1:16)라는 말씀에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생각할 때마다 열 배도 넘는 힘이 생기곤 하였다. 하루종일 거리를 헤매고, 이 복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한사람도 못만났을지라도 그 때는 피곤한 줄도 몰랐다.

어느 날인가 문을 두드려 찾아간 집이 잘사는 어느 고급 공무원의 집이었다. 깐깐해 보이는 그 집 주인은 "아니 똘똘해 보이는 젋은 양반이 학교는 안다니고 이게 무슨 꼴이냐"고 훈시를 하였다. 그러나 그후 그의 아들은 회원이 되어 훌륭히 주님을 섬겼고, 그 집주인 또한 회원이 되어 이젠 늙어서 아들 집에서 기거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한번은, 어느 날 아담하게 생긴 한옥집의 문을 두드렸는데 젊고 아름다운 부인 한 분이 나왔다. 그 집에는 어린 딸과 두 식구만 살고 있었는데,  그 부인의 모습은 봅시도 쓸쓸해 보였다. 같이 앉아 이야기를 들어 보니, 첫아이를 낳은 후 남편이 바람이 나서 이제는 아주 딴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다. 복음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 부인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기 시작하였고 얼마지나니 않아 내가 직접 침례를 주었다.

내가 선교사업을 마치고 귀환하던 날 그 부인은 우리를 위에 정성어린 식사를 준비해 대접해 주었다.

그 후, 나는 군 복무를 마치고 외국 유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마치고, 직장인이 되고, 다시 공부하기 위해 학교에 들어갔던 그 시절에도 나는 복음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가주 대학의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을 때에는 몇몇 형제와 힘을 합하여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통해 회원의 수가 많이 늘어나서 그 지역에서 교회가 둘로, 셋을 불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지부장이 되어 이민 초기의 교민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아파트 찾는 일, 병원 가는 일, 직장 구하는 일, 차태워 주는 일.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수퍼맨이었다. 직장 다니며, 공부하며, 가르치며, 복음 전하며, 회원들을 돌보며. 그래도 피곤한 줄 몰랐다. 이렇게 젊음의 정열과 사랑을 이웃과 주님을 향해 쏟아 부었다.

그 후, 세월 따라 나도 남과 같이 결혼도 하고, 돈벌고, 집사고, 땅사고, 세상 사람 사는 흉내는 다 내어 보았다. 이렇게 되고보니 차츰 맑았던 내 마음에는 먼지들이 덮이기 시작하고, 순박했던 나의 생각에는 세파의 공해가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의 믿음은 격동의 변환기를 만나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다. 그래도 이웃 사랑하기를 힘쓰며,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노력과,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은 마음 밑 바닥에서 언제나 살아 약동하고 있었다. 이것은 젊은 시절 예수님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배웠던 나의 삶의 철학이었으며, 언제까지라도 간직하고 지켜 갈 나의 삶이 목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직도 젊고 영혼이 맑은 청년을 보게 되면 남몰래 그들을 흠모하면서 젊었을 때 내 자신의 모습을 슬며시 회상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노래를 불러 본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속에는
   햇빛이 충만하리니
   몸은 늙어 가도 영혼 속에는
   밝은 햇빛 가득하고
   인생의 봄이 영원하리라.

편집자주 : 한국의 첫 번째 전임 선교사였던 이영범 형제는 남가주 대학교애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현재는 아리조나 주 피닉스에 거주하며, 그곳에서 법정 지정 심리학자로 일하고 있다. 이 형제는 또한 애리조 한인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성도의 벗(리아호나), 19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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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기 선교사 16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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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대 선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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