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의 기원

시 켄트 던포드


 

    기원후 64년 경의 로마는 웅대한 도시였다. 인류 역사상 막강했던 한 제국의 주축이었으며 그 세력은 영국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미쳤다.

예수가 탄생할 당시 그곳을 통치했던 초대 황제 오거스터스는 자기가 대리석으로 로마를 건설했다고 자랑했었다. 따라서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도 무수한 건축을 세워 앞을 다투어 영원한 도시를 치장했으며 그 유적이 오늘날에도 방문객을 놀하게 하고 있다.

기원후 64년은 빈민가를 휩쓴 대화재가 발생한 해였다. 자신이 위대한 예술가라고 생각한 반미치광이 황제 네로는 자기의 이름이 영원히 남을 웅대한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 국민들이야 어떤 고통을 당하던 개의치 않고 마구 횡포를 부렸다.

방화범이 황제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그는 교묘하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당시 로마에 있던 새로운 종파 중에는 이미 백성들의 인기를 잃은 크리스챤이라고 하는 그룹이 있었으니 이들이 완전한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체포가 시작되었으며 네로는 이들을 박해하기 위해 자기의 전용 경기장까지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로마의 역사가인 타시터스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야생 동물의 가죽으로 덮어씌우고 개를 풀어 물어 뜯게 해서 죽음을 당한 사람, 십자가에 달아 화형에 처하니 밤이 대낮처럼 밝았다. 그들이 가장 혹독한 벌을 받아 마땅할 범죄자들이었지만 이 일이 공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분노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므로 자기들도 죽게 될 것임을 알았으므로 동정심이 일기 시작했다.(1)

이 두려운 날이 있은 지 얼마 안되어 마가는 순교한 교회 지도자들의 이야기를 보존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마가복음으로 알려진 작은 책을 썼다. 그는 베드로와 다른 사람으로부터 수차 들어 온 그리스도의 놀라운 업적을 기록하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일이 있은 지 10년이나 15년쯤 되었을 때 마태와 누가가 각각 복음서를 기록했다. 그들은 마가가 기록한 내용에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설명해 주는 기타 중요한 자료를 더해서 그들의 책을 만들었다.

요한복음은 이보다 늦게 나왔는데 (기원 후 9-100), 이것은 신약성경 중에서는 가장 나중에 씌어진 것이다.

왜 그들은 기록하는 데 그토록 긴 시간을 요했을까?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1. 선교 사업이 너무도 시급해서 기록할 만한 여유가 없었거나
  2. 실제로 예수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구두로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고
  3.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다면 기록을 남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2)

이렇게 복음이 늦게 기록되었으므로 이것을 그대로 믿을 것인가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자들은 그들이 기록한 말이나 사견들을 단순히 기억에만 의존했을까?  그 당시에 이미 예수의 이야기가 의곡되고 변조될 수 있었을까?  복음서의 저자들이 믿을 만한 구두 자료 이외에도 초기의 기록에서 많은 사항을 얻었다고 경전 연구가들이 믿는 점으로 보아서도 아러한 점은 별로 문제시 되지는 않는다.

누가는 그의 기록서문에서 자기보다 앞서서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한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을 언급하여 그러한 사실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증거했다. (누가복음 1:1-4)  

2세기 초 소아시아 헤라포리스의 감독이었던 파피아스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마태는 예수의 가르침을 히브리어로 기록했으며, 각 사람은 이것을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해석하였다." 이 말은 마태가 십이 제자 중에서 역사가였고 후에 복음서의 저자들이 사용한 일기를 썼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쉽다.  파피아스는 학자들이 독일말 Quelle(샘)에서 따서 Q자로 표시하는 복음이 쓰이기 이전의 문서를 말한 것 같다. 성경 학자들은 마태와 누가가 예수의 가르침에 관해 많은 점을 공동으로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은 두 사람이 이 자료를 위해 사용한 것이 Q라고 주장한다. 물론 몰몬인 성경 학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증거"가 되는 몰몬경이 성경의 참됨을 증거하는 데 비한다면 이러한 모든 증거는 이차적인 것밖에 되지 않는다.

복음은 이때 처음으로 체계가 잡혔지만 이것이 최초의 신약성경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사도들은 놀라운 힘으로 지중해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누가는 그러한 놀라운 움직임을 간단한 역사로 기록했다.
그것이
사도행전이다.

복음은 사도들이 부활하신 메시아를 보고 그의 상처를 만져본 후 얼마나 큰 용기를 얻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음 16:15)고 하신 구세주의 말씀대로 열의와 사명감에 찬 이들은 열심히 좋은 소식을 전했다.

전해오는 말로는 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도마는 동쪽으로 인도까지 갔다고 추측된다. 빌립보는 애급에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바울은 소아시아와 그리스에 갔고 베드로는 팔레스타인과 극서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가르쳤다. 그들의 복음 전파에 견줄만 한 일이 없었다. 베드로의 다음과 같은 단호한 대답은 그들의 자세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도행전 4:10-20)

사도행전은 주로 가장 용감했던 기독교인의 한 사람인 사도 바울의 사명을 말해 주고 있다. 선교 사업을 하는 동안 바울은 교회에서 야기되는 지엽적인 문제를 다루는 편지를 많이 썼다. 이러한 서한이 기록으로 남겨진 진약전서의 첫 번째 것이며 기원후 50년과 기원후 94년 사이에 작성되었다. 바울은 기독교 교회로 개종하기 전에 유대교 선생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서한 중 많은 내용이 무게가 있고 동시대인 조차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의 서한은 열정적이고 유창했고 매우 교육적인 가치가 높았다.

히브리서, 일곱가지의 일반서한, 요한계시록 등 신약전서의 나머지부분은 교회 내에서 일어난 어려운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개가 1세기 후반에 씌었다.
히브리서, 베드로전서, 요한계시록은 로마 통치하에서 생긴 갈등과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적인 대답이다.

도미티안(기원후 81-96) 황제 치하에서는 많은 주에서 우상숭배를 강제로 의무화시켰다. 많은 성실한 기독교인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국가의 박해를 받을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사도 요한은 기독교인들을 격려하고 로마 통치와 종교에 항거하기 위해 요한계시록을 썼던 것이다. 그는 오랜 세월을 두고 선악이 싸워온 투쟁사를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썼으며, 결국은 하나님의 왕국의 승리자로서 이야기를 끝맺었다.

로마에 살고 있던 유대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히브리서가 씌였다. 저자는 가독교가 유대교보다 우월함을 나타내 보이려고 했으며 그리스도가 구약 시대의 예언자나 제자들 보다 우월함을 입증하려 했다.

교회가 이단 교리나 종파 분리 그룹들 때문에 직면하게 된 또 하나의 가장 큰 어려움은 당시 가장 위험한 그노스티시즘(초기 기독교 시대 신비주의적 이단설)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의 서한 가운데에도 이러한 이단 교회의 초기 출현을 공격한 내용이 있다. 이 그노시스 운동은 2세기 경에는 교회에 큰 위험이 되었다. 요한의 세 서한인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와, 유다서베드로후서는 주로 위험한 이교도로부터 교회의 교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싀어졌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부분이 씌어진 2세기 초에는 신약성경이란 책이 없었다. 이렇게 부분적인 책들이 어떻게 수집되어 한 권의 책이 이루어졌는가?

기독교인들이 최초로 받아들인 성경은 구약성경이었으며, 그들은 유대교도들과는 분리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일부 의식을 거부하셨으며 자기는 모세의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왔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보다도 훨씬 권위가 있었던 것 같다. 바울 자신도 역시 교리상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계시가 율법에 우선한다고 보았다.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갈라디아서 24)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처음부터 예수나 사도의 가르침이 구약성서에 필적하거나 이보다 큰 권위를 지녔던 것 같다.

사도행전은 사도가 영감받은 하나님의 대변자임을 말해 주고 있으며 그들의 말과 서한도 교회ㅔ서는 그러한 자의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주님의 영감(고린도전서 2)임을 분명히 했다. 갈리디아 성도들에게 그는 자기가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사람의 뜻에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갈라디아서 1:11-12) 그는 자기가 기록한 것은 "주님의 계명"과 같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린도전서 14:37) 데살로니가 성도ㄷㄹ에게 보낸 ㄷ 번째 서한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데살로니가후서 2:15)고 강조했다. 또한 디모데전서베드로후서의 저자는 초기 신약전서를 성경으로 보고 있다.(디모데전서 5:18, 베드로후서 3:15-16)

결론적으로 보아 사도들은 그들의 저서가 권위가 있는 것으로 보았고 성경과도 같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며, 이러한 기록을 받아들이는 교회는 그것을 영감받은 사도의 문학 작품으로 아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바울의 서한은 구약전서에 나오는 성구와 함께 교회의 예배에서 읽혀졌다.(골로세서 4:16, 데살로니가전서 5:27)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초기 기독교 문서는 오늘날 우리가 총관리 역원의 말씀을 기록하는 것과 같이 다시 기록되고, 복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기록을 오늘날과 같은 한 권의 성경으로 수집하는 데는 교회의 어떠한 힘이 역사하였겠는가? 그 중요한 이유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교회가 2세기에 접어들자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이 거의 모두 죽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세주의 값진 추억을 보존하기 위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2.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믿음이 팽배해져서 교회를 교리나 조직면에서 안정시킬 필요가 점증했다.
  3. 예수와 사도들에 관한 거짓된 기록과는 다른 믿을 만한 기록을 지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4. 변절된 교리가 교회를 괴롭혀 많은 사람들의 신앙에 혼란을 가져 왔다. 이러한 변절되고 비판이 많은 때에 진리로 받아들여질 권위있는 교리 책을 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신약전서를 편찬하는 운동에 박차를 가한 사람이 2세기 경 배도를 행한 사람으로 가장 유명하다는 것은 이상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소아시아 폰터스에 살던 부유한 선박 소유자인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었다. 마르시온은 유대교와 그 영향에 따라서만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자 했다. 그는 교회가 구약전서를 배격하고 자신의 캐논으로 대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캐논이 누가복음과 바울이 쓴 열 개의 서함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의했다. 마르시온은 파문되었으며 강력한 배도 단체를 이끌고 도피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의 경전에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되지 않아서 다른 저명한 기독교인들이 그들이 원하는 책의 목록을 들고 추천하기 시작했다. 그 후 약 200년간 기독교 교회와 지도자들은 주의깊게 기독교의 서적을 검토하였고 마침내 27개의 작은 책자와 서한을 선택해 신약 성경 법전으로 삼게 되었다.

처음부터 사복음서와 바울의 서한을 이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다. 저자가 분명하지 않은 후에 나온 기독교 저서나 의문이 갈 만한 내용에 관해서도 논쟁이 집중되었다. 문제를 야기시킨 것들은 허위복음, 행적, 기록들이 늘었기 때문이며 이런 것들은 모두 사도가 저자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엠 알 제임스가 쓴 신약 외전은 600페이지에 달하는 모조작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개가 캐논 안에 담긴 심각한 내용을 쉽게 저해시킬 수 있는 환상적이고도 이단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러한 거짓 복음은 예수가 생존했던 알려지지 않은 시대에 관해 의심을 표명하고 그 기간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 이야기를 모조해 냈다.

예를 들어 그노시스 작품인 로마의 복음은 어린 예수가 진흙으로 동물을 만들고 그것이 살아나게 함으로써 친구를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를 꾸며냈다.(6)  같은 작품에서 요셉이 널빤지를 너무 짧게 잘라 실수를 범한 예를 들고 있다. 어린 예수가 이 판자를 집어 들고 기적적으로 당겨서 원하는 길이가 되게 한다.(7)

마리아의 몽소승천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천주 교회는 이것을 있을 수도 있는 진리로 훗일에 받아들였다.(8)  사도들에 관해서도 이것 처럼 외곡된 이야기가 많다. 중세에 이러한 거짓 꾸며낸 이야기들은 매우 흥미를 끌었으며, 그러한 신화적인 이야기에는 아직까지도 관심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위경과는 달리 신약전서애 자리를 차지할 만한 성스러운 기독교의 책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 중의 중요한 몇가지는 2세기 초에 씌였으며, 여기에는 크레멘트의 서한, 바나바의 서한, 허마스의 목자, 사도의 가르침, 베드로의 묵시록 등이 포함된다.

기원후 200년 경에는 신약전서에 어떤 책이 포함되어야 하는지가 대체로 합의되었다. 이에 관한 좋은 증거로 소위 뮤래토리안 프래그먼트라고 불리우는 원고가 있는 데 이것은 기원 후 180년부터 전해 오는 것으로 여게에는 로마 교회의 경전의 목록이 실려 있다.

이 원고는 18세기에 이것을 발견한 이태리 고고학자의 이름을 딴 것으로 네 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의 서한 13가지, 계시록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베드로의 묵시록을 조건을 두고 승인하고 있으며 허마스의 목자가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히브리서, 베드로후서, 야고보서, 요한의 서한 및 계시록은 일부 교회에서 근 100년을 두고 논란을 계속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콘스탄틴 황제와 동시대에 살았으며 기독교 역사가인 유세비우스가 기원후 325년에 공인을 받기 위해 앞을 다투던 책들을 (1)인정할 만한 책 (2)문제가 되는 책 (3)거짓된 책 (4)불경하고 범위를 벗어난 책으로 분류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9)

이러한 사소한 시비는 결국 해결되었으며 경전의 기준으로 더 이상 논란을 삼지 않았다. 성 예로움이 성경 전권을 라틴어로 번역하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예로움의 신약전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하는 27권의 책을 모두 담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경전이나 계시가 있을 수 없다고 폐쇄적인 기준에 합의를 본 것은 후기성도에게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야기에는 우리는 캐논을 주의깊게 선택하고 변경해서 만든 신약전서에 대한 신뢰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어떤 책이 교리상 건전함을 인정받지 못하고 일반에게 사용되지도 않으며 저자를 신뢰할 수 없다면 경전으로는 거부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비길 데 없는 종교 기록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더해 준다.
[
성도의 벗(리아호나), 1974.3]

 
flo01e.gif경전에 경전을 추가함
flo01e.gif구약성서의 기원 


All Contents Copyright by 1999-2009
For questions and comments, send e-mail to
pcway@hanafos.com
http://www.ldskorea.net
TEL: 010-4236-9900 / 070-7620-9900 / 031-726-9900 / FAX: 031-726-9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