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몬경 백성
'리하이'의 발자취를 따라서
-리하이의 여행로를 따라-

[제1부]

림 엠과 호프 에이 힐튼/글
제릴드 더불류 실버/사진


dia_pink.gif리하이의 여행로를 따라서-[제1부]  
dia_pink.gif리하이의 발자취를 따라서-[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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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이의 발자취를 따라서-[제3부]

 
 

편집자 주:
146년 동안 몰몬경 독자들은,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남쪽 홍해 변방 광야로 여행하다가 때로는 홍해 연안에 이르기도 하며, 이 여행을 통하여 많은 고생을 당하기도 하면서 결국 바운티풀이라 하는 곳에 이르게 된 리하이 일행의 여행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았다.  독자들은 리하이 일행이 멈추었던 곳, 배를 만들었던 곳, 리하이에게 약속된 땅, 곧 서반구에 그들이 도착한 곳, 등과 같은 역사적인 장소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여 왔다.
이러한 사건들은 수천년 전에 중동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의 야산, 계곡, 성읍, 그리고 신약의 복음이 전파된 로마등지의 사진을 볼 때, 우리는 성경을 보다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교회 잡지의 편집자들은 린 핼튼과 그의 부인 호프 부부에게 리하이의 여행지역을 조사하도록 제언한 바 있다. 과거 수년간 힐튼씨 가족은 여행사 경영주로, 그리고 브리감 영 대학교 성인 교육 여행 연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유럽, 중동, 아프리카 및 아시아 지역을 십여 차례 여행한 바 있다. 그들은 중동을 사랑하며, 그곳에 많은 친구가 있고 그곳의 도시를 종종 방문하였다. 그들은 그곳의 언아와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였으나 중동학에 대한 학위를 얻기 위하여 연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몰몬경을 사랑하고 몰몬경이 진실하다는 강한 간증을 갖고 있다. 우리는 교회 일간 신문 데져렛 뉴스의 사진 기자인 제랄드 실버 형제에게 힐튼씨 부부와 함께 동행하면서 모험의 장면을 사진에 담아 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리하이의 여행지에 대한 힐튼씨 부부와 실버 형제의 조사 지역은 단지 가능 지역에 부로가하다. 그러나  이들의 조사는 우링게 몰몬경에 대한 중요한 증거를 주고 아랍 문화가 몰몬경에 기여한 바를 소개하여 주었다.

 

 

     교회가 조직된 146년(1977년 현재) 지난 지금까지 리하이가 지나갔던 광야의 길을 다시 추적해 보고자 중동 지역을 탐험한 회원은 사람도 없었다.

엔사인 잡지사에서 린과 호프 힐튼 부부에게 여행 을 부탁하였고, 힐튼 부부가 나에게 사진 기자로 함께 동행해 것을 부탁하였을 , 우리는 가능한 많은 정 보를 수집하여 회에 보고하고자 결심했다.

우리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리라는 것도 알았다. 아랍국은 외국인(특히 미국인과 기독교인) 자국내로 입국시키기를 꺼리며, 따라서 비자를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여행을 계속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있었다. 주님께서는 가장 어려운 경우에서도 우리가 목적했던 바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다.

힐튼 부부가 사업을 이유는 그들이 중동을 사랑하고 특히 아랍의 친구와 두터운 우정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었다. 린은 12 동안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수십 차례나 중동을 여행한 바가 있었다. 호프 역시 아랍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이들 부부는 아랍 국가의 학생들을 위한 장학 재단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오만의 살랄라(바운티풀로 추정되는 )까지 리하이가 걸었던 길을 추적함에 있어서 우리는 끝에서부터 시작하여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아랍 국가에서는 이스라엘로부터 들어오는 외국인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 이다.

처음부터 입국 허가 문제에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호프는 워싱톤 시에 가서 오만 대사와 사우디 아라비아 대사를 만나 입국 허가를 신청하였다. 입국 수속 절차는 너무도 느리게 진행되었다. 린은 그의 몇몇 아랍 실업인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았으나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1 중순경 우리가 미국을 떠났을 때까지도 우리는 두 나라의 비자를 받지 못하였다.

우리는 당시 십이사도 보조로 계시던 로버트 헤일즈 장로로부터 우리가 목적하는 모든 일이 성취될 있게 해달라는 특별한 축복을 받았다.

헤일즈 장로님의 말씀만 믿고, 우리는 우리가 있는 최대한으로 곳까지 비행기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우리가 이집트의 카이로에 착륙하였을 때도 여전히 오만과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비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우리는 주님의 사업은 참되다는 브리감' 영의 다음의 말씀을 재삼 인식하게 되었다.

"여러분이 주님의 사업을 수행하나 그것을 달성하지 못할 , 그 일을 달성할 있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권리가 있읍니다."

우리는 비자도 없이 오만의 머스켓에 착륙하였다. 우리와 꼭같은 문제를 갖고 있는 영국인에게 공항 입국 관리소 관원이 비행기로 그곳을 떠나라고 명하는 광경을 볼 있었다.

순간 우리는 간절하게 기도하고 기도하였다. 그 입국 관리소 관원이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나라에 엿 새 동안 머무를 있는 허가를 주는 호의를 보였다.

후에 알게 일이지마는, 당시 접전 지역으로 매우 위험한 지역이었던 살랄라로 계획을 관원에게 이야기 했다면 결코 입국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우리는 살랄라로의 여행을 서둘렀다. 어느날 , 러스켓에 있는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헤일즈 장로가 주신 축복의 일부가 생각났다. 그분 은 내게 아랍 국가에 있는 동료(언론계에서 종사하는 사람)에게 교회에 대하여 되도록 좋은 인상을 주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다음날 아침 일찍, 린 나는 오만의 공보부 장관을 만나러 갔다. 그는 우리를 보증한다는 미국 대사의 친서만 있으면 살랄라로 있다고 말해 주었다. 미국의 관원은 더할 나위 없이 우리에게 호의적이었으므로, 오래지 않아 우리는 바운티풀로 추정되는 곳으로 출발할 있었다.

살랄라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멀리서 포성이 은은히 들리기는 하였으나 평화로운 곳이었다. 우리가 조사 연구한 결과, 아랍의 작은 마을은 리하이 시대로부터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가지 다행스러운, 공보부의 관원 사람은 살랄라에서 회교 군주의 목장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 미국인을나게 주선해 주었다. 그는 그곳 지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잠시 머무르는 동안 그는 여러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여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있게 주었다.

린은 오만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로 들어가는 임시 비자를 간신히 얻었으며, 호프. 신디아를 지다로 보냈다. 우리가 아라비아의 다레인에 도착하였을 때에도 나는 비자를 얻지 못하였다. 사태가 다시 악화되는 것 같았다. 나는 즉시 출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린에게 필름 여러 통을 건네 주고는, 바레인이라는 조그마한 나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문제에 대하여 많은 기도를 드린 후에 나는 그곳에서국인 관원으로부터지를 받게 되었으며, 나는 편지를 사우디 아라비아 대사관으로 가져 갔다. 몇 시간 , 나는 도장이 꺽힌 비자를 손에 쥐게 되었다. 6 개월만 지났었더라도 나는 결코 사우디 아라비아로 들어 가는 비자를 얻지 못하였을 것이었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후로 여러 차례의 기적이 연이어 일어났다. 다시 아라비아의 다레인을 향해 가기 위하여 바레인 공항으로 달려가 보니, 모든 비행기가 이륙하지 못하고대로 묶여 있었다. 공항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이틀째나 비행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음 비행기로 펴나려 했던 나의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같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면서 있는데, 비행기표 개찰원이 다가와서 표를더니 별다른 뚜렷한 이유도 없이 대기 번호 1번으로 찍어 주었다. 그 비행기에는 두 사랍만이승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적은 계속 일어났다. 다레인에 도착하였을 때 나는 다시 지다로 가기 위해 대기하여야. 그곳에 서도 비행기표 개찰원은 별다른 이유 없이 역시 나의 표에 대기 번호 1번으로 찍어 주어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 다. (이번에도 기도 덕분이었다.)

지다의 호텔은 항상 여러, 심지어는 1 이상 앞두고 예약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 곳에서 방을 찾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행기 여행 중에 나는 지다에 서 아랍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숙소가 마련되었느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자, 그는 "오늘밤은 나와 함께 지냅시다."라고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 날 나는 그의 별장에서 묵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힐튼 가족을 만나기 위해 아바로 가야 했다. 그는 나를 행장까기 전송해 주었다. 다시 나는 대기 번호 1번을 받았다.

힐튼 가족이 나보다 이틀 먼저 출발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바에 가서 어떻게 그들을 찾을지 막연하였 다. 문제에 관하여 주님께 기도로써 간구하면서 지다 비행장에 앉아 있다가 위를 쳐다 보니 힐튼 가족이 걸어 들어 오는것이 아닌가! 그들도 나와 같은 비행기표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바에 도착하자 우리는 지역 군주의 허락 없이는 아무 곳에도 없다는 경고를 받았다. 우리는움이 될 만한 몇몇 지역 역사가들을 찾아 보기 위하여 호텔 주인의 형제에게 문의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가지 학위를 받았으며 군주와 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지역의 역사를 모두 알고 있었으며, 사홀 동안 우리를 데리고 도시 주변을 구청시켜 주었다.

아바를 떠나려고 비행장에 갔을 사진을 찍던 나를 본 관원이 필름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다행히도 필름을 넣은 직후였기 때문에 밖에 찍혀지지 않은 필름을 카메라에서 꺼내 주었다. 그는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다섯 통의 필름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다른 관원이 나의 묵직하고 큰 카메라 장비를 보고는 다른 사람들이 비행기에 탈 때까지 옆에 비켜 있으라고 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나는 열심히 기도하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성신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가 내게 오라고 손짓을 하고는 나의 여권을 훑어 보더니 탑승하라고 말하였을 , 그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의 변화를 역력히 있었다.

우리는 요르단에서 베두인 유목민 토산품점을 발견하였는데, 그곳에는 리하이가 여행길에 갖고 갔을 법한 물건, 가죽 주머니, 낙타 마구, 족제비 가죽으로 만 든 올리브 기름 주머니 등의 물품과 많은 사진이 있었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우리는 요르단의 공보부 장관 을 만나, 교회 계보과를 위하여나라의 가족 기록서를 사진찍을 있도록 협정을 보았다.

우리는 또한 이스라엘의 서방 점령기를 관할하는 장관 을 만나서 그곳의 아랍 기록을 사진에 담을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가족 기록은 아랍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성스러운 것이 다. 우리가 가족 기록을 보관하는 교회의 원리를 설명했을 그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들의 기록이 화강암 동굴 속에 영원히 보존된다는 말을 듣고는 몹시 기뻐하였다.

아랍인은 매우 훌륭한 민족이다. 그들은 모두 천성적으 로 다정하고 교활하지 않다. 그들이 복음을 받으면, 틀림없이 강한 신앙이 그들 중에 불붙을 것이며, 많은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나라에 교회의 문을 열게 달라고 기도하라는 킴볼 대관 장님의 권고의 말씀을 되새겼다.

우리에케 문이 열리고, 이유도 없이 우리 나라에 받아들인 등을 면서 우리는 이러한 기도의 결과를 경험하였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 앞에서 길을 예비하시며 우리가 사명을 완수할 있도록 도와 주시는 것을 보았다.

 


 

     우리에게 맡겨진 방대한 과제를 생각해 보라 !  우리는 2,500여 년 동안 버려진 길을 따라 가야만 했다. 그 길의 절반은 오늘날, 오만, 사우디 아라비아, 요르단, 그리고 이스라엘 등으로 분할되어 전화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리하이 일행이 여행한 길에 대한 실마리란 오로지 니파이가 수년 동안의 여행에 대하여 기록한 열 여덟장이 그 모두였다. 게다가 이 기록의 목적은 여행에 대한 지리적인 사실 기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친과 그 자신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시현을 기록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임무를 지명받았으며, 우리는 몰몬경이 진실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니파이의 실제 기록을 전제로 하여 여행을 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몰몬은 니파이의 기록을 요약하지 않고 그대로 몰몬경에 포함시켰으며,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요셉 스미스는 이를 문자 그대로 충실하게 번역하였다. 우리가 발표한 결론과 전제는 물론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리하이의 행적을 조사한 우리의 흥미로운 모험은 몰몬경에 언급되어 있는 실제적인 장소에 관한 몇 가지 기본적인 지식의 결과로 얻게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조사한 것 중에서 고무적인 사항의 하나는 아라비아 반도가 초시간적인 지역이라는 점이다. 이곳은 또한 지리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도 불변하는 지역이다. 이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예전과 마찬 가지로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백년 전이나 천년 전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

물과 아라비아의 초시간성과는 깊은 관계가 있다. 물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다. 이것은 아라비아인의 생활에서는 불가피한 사실이다. 아라비아 반도의 거대한 오아시스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 사막에서 도시가 번창할 없으며, 거대환 공동 우물과 샘으로부터 도시가 뻗어갈 있는 지역은 한정되어 있다. 물이 있는 지역은 리하이가 여행한 지역에 대한 실마리가 될 있다.

주님은 리하이가 여행한 시기, 방법, 리고 길을 알고 계셨다. 몰몬경 독자도 때는 알고 있다. 우리는 여행 방법과 장소에 대하여 실마리가 있는 것은 모두 모으기로 하겠다.

우리는 몰몬경을 가지고 시작하였다. 우리는 몰몬경을 읽으면서 여행에 관하여 몰몬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 보기로 하자, 그리고 니파이일서부터 구절씩 읽어가며 우리의 마음에 떠올랐던 가지 의문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 먼저 니파이일서 1장에서 우리는 리하이 가 "평생을 예루살렘에서 사셨"다는 것을 읽을 있다. (4)

리하이는 "나아갔"다가 "예루살렘에 있는 집으로 돌아" 왔다. (5,7) (그렇다면 그가 예루살렘성을 나갔다가 다시 성내로 돌아왔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 2장에서 주님은 리하이에게 "광야로 떠나가라" 명하셨다. (2) (리하이에게 있어서 광야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의미하는가? 숲을 의미하는가? 사막을 의미하는가? ) 후에 그들은 '집과 상속의 땅과 금은 보화를 남겨 두고" 떠났다.(4) ( 그는 금은을 갖고 가고자 하지 않았는가? 최소한의 경비가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아니면 여기서 말하는 금은이란 금은제 물건을 의미하는 것인가 ? ) 리하이는 "다만 가족을 이끌고 양식과 천막만을 가지고 떠나갔느니라." (4) (어떤 종류의 양식을 갖고 갔겠는가? 천막을 가지고 어떻게 여행을 했 겠는가? 이러한 생활 방식은 당시의 아라비아 유목민의 유목 생활과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가? )

방향에 대한 실마리가 5절에 나와 있다. "부친은 홍해 변방에 이르러···흥해에서 가까운 변방의 광야로 여행하여 갔느니라." (참으로 흥미있는 부분이다. "변방"" 가까운 변방"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적어도 홍해라는 분명한 경계표가 있다. 홍해에 "가까이" 가는 길이 있고, " 가까이" 가는 길이 따로 있는가 ? ) 다음 구체적인 설명이 나와 있다. "사흘 동안을 여행하고 나서 부친은 어느 강변 골짜기에 천막을" 쳤다.(6)(: 홍해에 이르른 후부터 사흘을 말하는 것이지 예루살렘을 떠난 사홀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강과 계곡을 구별할 있겠는가 ?·)

다른 절에는 좀더 구체적인 실마리가 나와 있다. "이 강물은 홈해로 흘러들어가며 어구에서 가까운 변방에 계곡이 있더라"(8) (리하이의 천막이 홍해로부터 내륙 지방에 있었을까 ? ) 계곡은 레뮤엘이라 하였고, 강은 레이맨이라 하였다. 이것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얻을 있다. " 강물은 홍해로 흘러들어가며" (샘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 ) 리하이는 레이맨에게 " 강물을 닮아 쉬임없이 달음질 의의 샘에 이를지어다! "라고하였다. (9) (아라비아에 쉬임 없이 흐르는 강이 있는가? ) 리하이는 레뮤셀이 " 골짜기를 닮아 굳세고 강건하여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계명을 지킬지어다 ! "라고 하였다. (10)

그리고 니파이는 "부친은 천막에 기거하고 계셨" 다고 설명하였다. (15) (장기간 기거하셨다는 의미인가? )

예루살렘을 왕복하는 여행이 시작되었을 , 경전에 기록된 어휘의 변화가 재미있다. 예를 들면, 니파이와 그의 형제들이 눗쇠판을 가지러 갔을 , 그들은 천막을 가지 고 "예루살렘을 향하여(2)" 갔다.(3:9) ( 그들은 천막을 갖고 갔는가? 예루살렘은 사방에서 "올라가"야만 하는가? ) 레이밴의 집에서 문제를 당하고는 "상속의 땅으로 내려가" 그들이 남겨 두고 금은 보화를 가져 오기로 결정하였다. (22) 그리고는 다시 예루살렘에 있는 레이밴의 집으로 "돌아 갔(3)". (23, 영문 4 : 4, 34, 35; 5: 1 참조) (이것은 매우 흥미있는 부분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후에 어느 쪽으로 해서 상속의 땅으로 다시 "내 려" 갔겠는가?  광야와 상속의 땅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는가? 홍해 변방에 있는 리하이의 천막 으로부터 그들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가처

니파이가쇠판을 갖고 돌아 왔을 , 리하이는 "주님께 제물과 번제를" 드렸다. (5 : 9) (제물용 짐승은 어디 에서 났는가? 그들이 짐승을 갖고 왔는가? 아니면 근처에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로부터 짐승을 샀는가 ? ) 7장에서 니파이와 그의 형제들은 이스마엘의 가족을 데리러 돌아 갔을 때에도 역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up)갔고 광 야로 "내려"(down)왔다는 말이 영문에 나오고 있다. (2 5) (놋쇠판을 갖고 로부터 두번째 여행에서 때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겠는가? )

16장에서 그들은 리아호나를 받아 "우리가 광야로 가져갈 있는 모든 것을 한데 모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양식도 남은 대로 모두 모았으며" (예루살렘으로부터 갖고 식량 이외에 다른 양식이 있었는가? ) "광야 로 가져갈 온갖 씨앗의 종자를 한데 모았느니라."(II) (어디에서 종자를 얻었는가? 추수하였는가? 샀는가? 예 루살렘에서부터 갖고 왔는가 ? ) .

다음 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나서 천막을 들고 레이맨 강을 건너 광야로 길을 떠났느니라." (12) (그렇다면 리하이의 천막이 강의 서편에 있었다 는 말인가? 그들은 동쪽의 남단으로 여행하고 있었는 ? ) 16 13절에는, 그들은 나흘 동안 "남남동으로"여 행하여 천막을 쳤다. 그들은 그곳을 세이저라고 이름지었 다. (나흘 동난의 여행을 마치고 도착한 곳은 어디인가?) " 우리 일행은 다샤 [그들은 그곳에서 적어도 잠시동안 머물렀음에 틀림이 없다] 같은 방향으로 [이것은 남남동 일 것이다] 홈해에 가까운 변방에 자리잡은 광야의 가장 비옥한 땅을 따라 길을 갔느니라." (14) (가장 비옥한 땅은 어디일까 ? )

 


리하이가 예루살렘에서부터 남향 길을 택하여 여행하였다면 헤브론 근처
탈코미나의 비옥한 계곡과 울창한 산이 가까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을 것이다.


리하이가 예루실렘을 떠나기 수백 년 ,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이름을 브엘세바, "언약의 우물" 리하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남향길을
택하여 여행하였다면 이 오아시스 마을을 통하여 여행하였을 것이 .

 

이번에는 얼마나 여행을 했는가? 니파이는 단지 이렇게하고 있다. "우리는 활과 화살과 투석기로, 식량으로 짐승을 잡아가며 여러 동안 여행하였느니라. [쉬어가며 여행을 하였다는 말인가, 아니면 쉬지 않고 여행을 하였다는 말인가?]" (15) "여러 여행하고 나서 우리들은 휴식을 취하며" (17)

그러다가 그들은 재난을 만났다. 18절에서, "좋은 강철로 만들어진" 니파이의 활이 부러졌으며, 형들의 활은 "탄력이 없어진지라"(21) 그들은 몹시 화를 내었다.(왜 강철로 만들어진 활이 부러졌으며, 형들의 활에 탄력이 없어 졌겠는가 ? )

니파이가 나무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식량할 짐승을 사냥한 다음 (그들은 사막에서 어떠한 식품을 찾을 있었겠는가? 어떠한 종류의 짐승을 사냥할 있었겠는가? ) 그들은 "처음 여행을 시작했을 때와 거의 같은 방향으로 [그들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여러 날을 여행하다가" 니파이는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밝혔다. "잠시 머무르고자 다시 천막을 쳤느니라 [반영구적인 의 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33) (어디에서 이렇게 천막을 쳤겠는가? "잠시" 얼마 정도의 시간을 말하겠는가? 영문에 의하면 "the" space of "a" time 이 라고 되어 있는 , 이와 같이 관사를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일정한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 "죽으매, 네이홈이라 하는 곳에 묻어 장사"하였다. (34) (누가 네이홈이라 불렀는가(7) 그들은 그를 그곳에 장사하였는가 ? 그가 죽기 전에 얼마나 오랫동안 병석에 누웠겠으며, 장례식은 며칠만에 이루어 졌겠는가 ? )

17장에서 그들의 여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번 에는 "그때부터는 거의 동쪽으로만' 나아갔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동쪽으로만 갔겠는가 ? ) "광야를"지나 면서 많은 고난을 이겨 나갔으며," (1) (여행하는 것과 혜쳐 지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가? "많은 고난"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 )

2절에서 우리는 그들이 "날고기" 먹고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많은 고난"인가? 그들은 고기를 익혀 먹지 않았겠는가?) 

광야에서 8 동안 머물러 후에 "우리는 과일과 들 꿀이 풍성하여 바운티풀이라 이름 붙인 곳에 이르렀나니," (꿀이 있다는 것은 꽃과 알파파와 같은 피는 목초가 자 라는 곳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그곳에서 바다를 보았고 이흘 이르레엔툼이라 하였으니 [홍해와는 다른 곳임에 틀림이 없다] 번역한 물이 많다는 뜻이라."(5)( 바다가 홍해보다 크겠는가? ) 그들은 "해변에" 천막을 쳤 다. (6) (그렇다면 좋은 해안이 펼쳐 있거나 적어도 천 막을 치고 짐승을 잡울 만한 초원 비슷한 곳이 펼쳐져 있는 곳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7절에서 보면, 니파이가 "산으로" 갔다. (산은 하나만 있었는가?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주님께 "녹여 만들" 광석을 구할 있는 곳을 알려 달라고 간구하였다. (9) (근처에 광석 매장지가 있었는가 ? ) 그리고는 "돌에서 녹여 쇠붙이로, 연장을 만들었다." (16) (이같은 과정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요하는가? 그들은 어떠한 종류의 연장을 필요로 하였겠는가?)

 

그림1 : 리하이의 여행로였을 가능성이 있는 길과 관계 있는 고대의 두 가지 보고

 

주전 600년
 리하이의 여행길 (추정)

 

--> 네이흠 : 몰몬경, 예맨의 지역과 연관
                       - 고고학적 발견

 

 

 

 

 

주전 24년
    스트라보
리하이가 택하여 갔을 여행길과 매우 비슷한 길로
원정간 10,000명의 로마 병정들의 불운에 대하 보고

  1. 유대부터 페트라까지는 "사막"이다.
       (스트라보 16:4:21)
  2. 상품이 류세 코메로부터 페트라까지 국경을 넘어 교역되었다. (16:4;24)
  3. 많은 사람들이 이 기을 따라 살고 있었다.(16:4:21)
  4. 페트라로부터 류세 코메까지 이르는 대상의 길은  군대를 다스린다는 보고(16:4;23)
  5. 아라비아 황무지에는 물이 필요하며, 타는 듯한 열기가 있다.(16:3:3)
  6. 아랍인은 낙타 떼를 지킨다.(16:3:1)
  7. 홍해 연안에는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16:3:6)서남 아라비아는 부강한 곳이었다.(16:4:3)
  8. 아코바로부터 칠십일간 여해아여 온 상인은 마립에서 그들의 상품을 유향과 교역한다.(16;4:4)

주후 57년
  페리 플러스

이집트에서 인디아까지 항해한 희랍인의 문서

  1. 나바테안이 류세 코메로부터 페트라까지의 도로를 장악하고 있다. (페리플러스 19)
  2. 각기 다른 종족들이 류세 코메로부터 인도해까지 길 게 늘어져 살고 있다.(페리플러스 19)
  3. 므자에는 양과 낙타를 치는 유목민이 살고 있다.(페리플러스 20)
  4. 무자는 아랍의 선박 주인과 선원으로 붐비며, 상거래가 빈번한 곳이다.(페리플러스21)
  5. 오셀리스는 장이 서는 마을이며 물이 있는 곳이다.(페리플러스 25)
  6. 아라비아에서는 낙타가 유향을 나른다.(페리플러스 27)
  7. 모사(아마도 리하이의 여행길에서 바운티풀에 해당되는 곳일 것이다)에서는 유향이 '전 지역에 쌓여 있으며", 이곳에서 유향이 수출된다. (페리플러스 32)

 

니파이의 형들은 그들이 겪는 고생으로 인하여 반항하였다. 니파이가 그들을 꾸짖자 그들은 화를 내여 "[그를] 잡아 바다 깊숙히 던져 버리려" 하였다. (48) (이러한 일은 모래 사장에서는 이루어질 없다. 바운티풀에는 절벽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지당하여 떨기 시작하였으며, 니파이와 함께 만드는 일을 도왔다. 18 2절에서 니파이는 만드는 일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법" 아니었다는 것을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만드는 방법을 그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배는 무엇으로 만들었겠는가? 배의 늑재를 올릴 만한 큰 나무가 바운티풀에 있었는가?) 마침내 "우리는 모든 것 광야에서 거둔 많은 과일과 고기와 꿀과 식량을··· 준비하고, 짐과 종자를·.·배에 실었으며" (6) (다시자라는 말이 나왔다. 그들은 다른 곡식을 추수하였는가? 어떠한 종류의 양식을 갖고 갔겠는가? 항해는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었는가? 바운티풀에라 하는 곳은 비교적 좁아서 광야로 사냥을 나가는 것이 힘든 일이 아니었는가?

이상은 나파이가 우리에게 실마리와 우리에게 떠오르는 의문점들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의문에 대한 가능한 해답을 합께 생각하고 찾아 보며, 고대와 현대의 학자들의 연구 저서를 조사하여 가능한 모든 도움을 얻기로 하였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중동 7 개국에 펼쳐 있는 100 명의 아랍 친구틀에게 우리의 여행 계획을 서신으로 알렸다. 우리는 그들의 열렬한 반응과 도움에 놀라움 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한량 없었다.

우리가구하여 얻은 정보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많은 친구들이 기꺼이 우리의 연구 조사를 이해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정보를 나누어 것이었다. 특히 요르단, 암만 의 살림 사드, 에집트, 카이로의 앤지크리, 사우디 아라비아, 지다의 하십  다야니, 사우디 아라비아, 아바의 세이크 헬완 하브타, 이스라엘의 사아디 파타피타, 그리고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나벨 무스타킴 여러 사 람의 희생적인 도움과 협조가 없었다면 우리의 여행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같이 많은 사람들의 충고를 토대로 하여 우리는 도서관구부터 시작하였다.

유타 대학교와 브리감 대학교의 중동학 학자들과 인터뷰를 가지면서 우리는 앞에 전개된 과업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갖출 있었다.

점차로 분명한 영상이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몰몬경을 주의 깊지 않게 읽으면 마치 리하이와 그의 가족은 사람이 전혀 살고 있지 않은 사막을 여행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몰몬경을 주의깊게 정독하면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여행했음을 말해주는 실마리를 여러 군데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리하이는 가족이 먹을 식량과 물과 들짐승을 갖고 여행하였다. 그들을 먹일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기록은 없다. 그들은 일하여 식량을 구하였으며, 굶주림으로 불평을 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세가 호랩산에서 지팡이로 바위를 치니 물이 솟아 나왔던 것과 같은 기적도 일어 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리하이의 가족 역시 당시의 다른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물웅덩이에서 다른 물웅덩이를 찾 아 여행하였을 것이다. (물론그들은 하늘로부터 보낸 리아호나를 받았다.) 우리가 중동 지역을 여행하면서 발견한 사실은 신선한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은 었없다는 것이다. 물이 몹시 귀한 곳이기 때문에 물의 원천이 사람에게 발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은 있을 없는 일이다.

그림2 : 살랄라로부터 이집트와 지중해에 이르는 고대 유향길
 


림3 : 고대 니느웨이 세나체립 궁전에서 발견된 이 돌 부각은 701년(연대 추정)
앗시리아가 유대의 라치쉬성을 함락시킨 사실을 묘사해 주고 있다. 이것을 자세히
조사하면 유대인 포로가 입은 의상은 리하이 시대를 전후로 1세기 내에 입던 의상이며,
예루살램으로부터 25 마일 이내의 지역임을 보여준다. 또한 주전 7세기 경에는 어떠한
방법으로 낙타에 짐을 실었는지를 보여 준다. 리하이와 그의 일행은 사막에 있었을 때
이와 같은 모양이었을 것이다.

 

그림4
레뮤엘 골짜기에 거하였던 리하이 일행의 최소 규모 

성 명

신 분

1.  리하이

지도자

2. 새라이아

리하이의 아내

3. 레이맨

리하이의 장남

4. 레뮤엘

리하이의 차남

5. 샘

리하이의 삼남

6. 니파이(1)

리하이의 사남

7. 야곱(2)

광야에서 첫 번째로 얻은 리하이의 아들

8. 요셉(2)

광야에서 마지막으로 얻은 리하이의 아들

9. 조램

레이밴의 종(니파이일서 4:35)

10. 이스마엘

적어도 두 아들과 다섯딸의 아버지

11. 이스마엘의 아내

 

12. 이스마엘의 장남

몰몬경에는 "이스마엘의 두 아들과 두 아들의 가족"
(니파이일서 7:6)이 라고 엄급되어 있으므로, 그들에게 아내와 자녀가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에라터스 스노우 장로는 예언자 요셉이 리하이의 딸들과 이스마엘의 아들들이 결혼하였다고 말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설교집 23:184)

13. 장남의 아내

14. 이스마엘의 차남

15. 차남의 아내

16. 이스마엘의 장녀

조램의 아내(니파이일서 16:7)

17. 이스마엘의 딸

레이맨의 아내

18. 이스마엘의 딸

레뮤엘의 아내

19. 이스마엘의 딸

샘의 아내

20. 이스마엘의 딸

니파이의 아내

(1) 몰몬경에는 니파이의 여자 형제의(니파이이서 5:6)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이들이 니파이의 누나인지 여동생인지, 예루살렘에서 낳았는지, 광야에서 낳았는지, 약속의 땅에서 낳았는지 알 수 없다.

(2) 야곱과 요셉을 레뮤엘 골짜기에서 출산하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들의 이름은 리하이가 예루살렘을 떠난 지 약 10년 후, 바운티풀을 떠날 때에 비로서 몰몬경에 언급되어 있다. (니파이일서 18:7}

 

그들 일행이 천막을 쳤던 네이홈이라 하는 곳은 니파이가 "네이홈이라 불리웠다"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이미 정착이 이루어졌던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야영지, 레뮤엘 골짜기, 세이져, 바운티풀 등은 그들 자신이 이름을 붙인 곳이다. 물론 이러한 곳들도 알려진 오아시스였을 것이나, 단지 리하이가 다시 이름을 붙였을 따름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셈족의 관습이다. 이러한 장소들은 리하이 일행에게 상당히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리하이는 가족에게 그의 교춘을 심어 주기 위하여 가족이 모두 알고 있는 개인적인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니파이는 정규적으로 그들이 짐승을 번제로 드렸다고 기록하였다. 러한 짐승은 어디에서부터 왔겠는가? 꼴을 찾아 돌아 다니는 염소 떼나 양떼는 걸음이 느려서 그들의 여행 속도를 느리게 하였을 것이며, 낙타와는 달리 염소나 양은 매일 물을 먹어야 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리하이는 정상적인 카라반의 속도로 여행하면서   지역은 베두인 유목민으로부터 동물을 사거나 다른 물건과 교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고대로부터 베두인 유목민족이 아라비아 반도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 "미디안 제사장"이며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유목민으로셔 미디안 광야에 살고 있었다. ( 2 : 16, 3 : 1) 리하이가 여행했을 가능성이 있는 북동 사우디 아라비아의 지역 에는 상당 수의 가축이 살고 있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미디안을 점령한 그곳에서 675,000마리의 양과 그밖의 많은 보화를 노획하였다. ( 31 : 43)


림5 : 주전 600년 경, 예루살램으로부터 아코바까지 이를 수 있는 세 가지 길



하이가 남쪽으로 향하는 왕도를 택하여 여행하였다면, 에돔의 고대 수도인
페트라로 여행하였을 것이다. 모세 시대에는 페트라 셀라로 불리웠다. 페트라 성이
세워진 대지는 고대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게 한 역사적인 장소인 와디 무사
(모세의 골짜기)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질러 있다. 페트라는 왕도를 지나는
여행자로부터 통과세를 징수하여 부유한 성읍이 되었다.

 


그림 좌 : 리하이가 예루살렘을 떠난 지 약 200년 후 돌에 새겨진 페트라의 그리이스식 무덤
그림 우 : 팔레스타인의 대도시 중의 하나인 여리고는 요단강이 사해로 들어가는 지점에서
북쪽으로 11.2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른 봄, 왕도에서 본 모압 땅.
아마 리하이가 예루살렘에서 동쪽 길을 택했다면 이곳을 통과하게 되었을 것이다. 

 

리하이가 여행한 중에 사람이 살고 있는 자역을 찾을 있는 부분은 니파이가 배를 짓기 시작할 나타난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법으로" 배를 만들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니일18 : 2) 그가 배를 본 적이 없다면 이러한 말을 있었겠는가? 홍해의 연안을 따라 배를 짓는 조선소가 있어서 대대로  그 기술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것은 주목할 만한 일아다.

주전 600 이전에 흥해의 연안을 따라 이어 있는 불모의 광야에는 마을이 있었고 문화가 발달되었었다는 사실은 사람의 증인의 설명에 의하여 더욱 분명하다. (그 림 1 참조)

희랍의 역사가, 스트라보씨는 남부 아라비아에 있는 "향내나는 나라" 정복하기 위하여 주전 24년에 밸리우스러스의 지휘하에 에집트를 떠난 일만 명의 로마 보병들의 불행한 운명에 대하여 썼다. 이들 병정들은 우리가 리하이의 여행로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길을 따라 여행 하였으며, 길을 따라 사람들이 살았다고 확인하였다. 여행길은 그들이 아라비아에 도착한 북부 지점, 류세콤메로부터 요르단의 페트라까지 뻗쳐 있는 매우 중요하고 유명한 길이었다. 그 여행은 어려웠으다.(대다수가 기아, 갈증, 질병으로 죽었는데, 이는 충성스럽지 못한 안내자 때문이었다.) 이들은 낙타 등에 물을 싣고 다녔으며 아랍 "도붓 장수와 상인"으로부터 양식을 사먹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마시아의 스트라보, 스트라보의, 호레이스 레오날드 존스 , 런던: 월리엄 하인만 주식회사, 1930, 7 : 353 63)

주후 57년경에 무명의 희랍 작가가 에리드레안해의 페리플러스라는 기행문을 썼다. 그는 아라비아 반도를 배로 여행하면서 리하이가 갔으리라 생각되는 길을 따라 가면서 여러 항구에 정박하였다. 책은 리하이 시대인 주전 600 이전에 이미 많은 마을과 시장이 있었으며, 오만으로부터 유향이 거래되었고, 해운업이 성행하였으며, 계절풍이 길을 따라 불어 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해 주 고 있다. (에리드레안해의 페리플러스, 번역, 월프레드 에이치 쇼프 , 뉴우델리, 인도, 오리엔탈 북스 리프린트사, 1974)

우리가 발견한 중요한 사실은, 지역에 대한 고대의 지도자와 현대의 지도가 모두, 고대에서 가장 교통이 빈번한 도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유향로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향로의 하나는 홍해 연안을 따라 아라비아 반도 사분지 삼을 내려 오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나이란에서 다시 남쪽으로 예멘까지 가는 길이다. 번째 길은 첫번째 길에서 내륙 쪽으로 백여 마일 들어와서 첫번째 길과 비슷한 평행선을 이루어 남쪽으로 내려 오다가 나이란에서 교차된다. 그러나 길은 나이란에서 살랄라까지 동쪽으로 뻗어 간다. 이같은 도로들은 리하이 시대로부터 적어도 900년까지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2,200 전에도 길이 사용되었다. (페 리플러스, 120 21페이지 참조) 이상의 도로에 대한 증 거는 오늘날에도 많이 찾아 있다. (그림 2 참조) 길은 주간 10세기 , 사바 문화가 전략상으로 세워 놓은 요새의 폐허를 따라 쉽게 추적할 있다. 또한 요르단의 페트라로부터 북위 19 근처의 사우디 아라비아 남부에 위치한 나이란까지의 도로도 수천 명의 낙타 여행자들이 도로 양변의 언덕에 있는 평평한 돌에 새겨 놓은 그림 문자로써 쉽게 파악될 있다. 이들 여 행자들은 예루살렘, 에집트, 바빌론 등지에 세워진 성전에서 없어서는 안될 유향을 낙타에 잔뜩 싣고 단조로 운 길을 따라 북쪽으로 여행하였던 것이었다.

(trail)이라는 어휘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기 쉽다. (trail)이란 비교적 다듬어진 좁은 길이나 도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계곡이나 골짜기를 따라 가는 거친 길을 의미한다. 길의 폭은 지역에 따라 1로미터부터 18 킬로미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리하여 여행자들은 같은 길의 같은 지역에 있더라도 서로 거리를 두고 천막을 수가 있었다.

우리는 홍해 해변을 따라 남남동으로 좋은 도로가 있음 을 알았다. 리하이가 이미 건설되어 있는 도로를 피하여 물도 없는 산과 사막 길을 택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몰몬경에는 그의 여행길을 감추려 하였다거나,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기 쉽듯이 사람의 눈을 피하여 도망 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리하이는 알려진 대로를 택하여 여행하였을 것이다. 이같은 가정을 뒷받침 주는 또 다른 증거는 홍해 변방으로 여행하였다는 니파이의 기록이다.(니파이일서 2 : 5) 바로 길이 고대로부터 존재하였던 유향길인 것이다.

더우기 유향길은 오아시스나 고대 우물을 따라 이어진 길이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천연자원국에서 그린 현대 지도에는 길을 따라 평균 30 킬로미터 간격을 두고 118 개의 우물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물이 없이 리하이 혼자의 힘으로 길을 개척할 수는 없었을 것이며, 사막 거주자가 찾지 못한 물웅덩이를 도시 거주자가 찾아 낸다는 일은 있을 법한 일이 아니다.

일단 리하이와 그의 가족이 여행길에 오른 , 그들은 많은 사람틀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었다. 리하이 시대의 카라반은 대부분이 아랍인이었으며, 사나(현재 예멘의 수도)에서 사바 민족이 리하이의 천막을 자주 드나드는 방문자였을 지도 모르며, 리하이 역시 그들의 방문자가 되었을 것이다.

여행에 앞서 연구 조사한 결과, 우리는 척어도 리하이 가족이 남쪽으로 여행했을 가능성이 있는 길을 이미 찾은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길의 존재는 많은 의문을 던져 주었다. 유향길이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저자 는 낙타 마리당 225 킬로그램의 유향을 싣고 북으로 여행하는 대상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비크, 40 41페 이지 참조) 우리는 실마리를 찾기 위하여 성경을 참조하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배시에 향을 사용하도록 명하실 때 향을 섞는 비율에 대하여씀하셨다.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각각 동일한 비율로 유향에 섞는 것이다. 혼합 향은 성스러운 것이었으며, 권능을 받지 못한 사람이 이를 사용하거나 태워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출애급기 30 : 7 9, 34 38; 레위기 10 : 1 7) 이것은 특히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상징이었으며, 원래는 지성소를 가리는 장막 곁에서 태웠다. 이것온 또한 동물을 죽이고 번제를 드릴 나오는 악취를 제거하기 위한 "탈취제"로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속죄제를 드리는 날에는 지성소에서 유향을 태워 "향기로운 연기가" 속죄소를 감싸게 하였다. 좀더 깊이 연구한 결과, 우리는 유향을 사용하여 제사를 드리는 민족이 유대인뿐만이 아니고 "거의 모든 고대 국가(에집트, 바발론, 앗시리아, 페니키아 등지)에서 종교 예식에서 흔히 사용하였다"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제 우리는 유향이 그토록 많이 사용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그러나 그토록 값비싸며, 그것은 어디에서 얻은 것인가? 우리는 유향이 아라비아 반도의 아래쪽 모양으로 생긴 살랄라라 하는 좁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토산목인 유향목에서 황색의 유상액을 받아 말려 크림과 같이 만든 것임을 알게었다. 살랄라는 오만의 설타나테에 있는 도파주의 아라비아 해변에 위치하고 있다. 유향목에서는 연간차례씩 유상액을 받는다. 여기에서 나오는 점성의 유상액에 강하고 향기로운 향기를 넣어 씹거나 태울 있다. 성경 시대에는 아기 예수께 황금이나 몰약과 같은 수준의 귀한 예물로 바쳐졌던 유향이 오늘날에는 값에 지나지 않아 아라바아의 어린이들이 즐겨 씹고 있다. (마태복음 2 : 11 참조)


그림6 : 리하이가 택하였을 가능성이 짙은 길
 


코바만은 홍해의 북동쪽에 자리잡은 만이다. 리하이는 "홍해 변방"(니파이일서 2:5)
을 여행할 때 이곳을 지나갔거나, 이곳에 잠시 머물렀을 것이다.


해의 황량한 서해안에 놀라웁게 이루어진 엔지디 오아시스.
리하이가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여행하였다면 이곳과 우물이
있는 다른 곳에서 묵었을 것이다.
 


디 알 아라바의 근원
이 곳에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오는 길이 합쳐지는 곳을 볼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가지 의문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분명히 리하이는 상당히 부유한 사람이었다. 니 파이가 나열한 재산 목록 "금은 보화"에서 리하이는 일반인 수입보다 많은 수입을 얻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리하이는 천막을 갖고 있었다. 내구성이 강한 염소털 을 짜서 천막을 만드는 일이 매우 힘들고 오랜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지만 그는 여러개의 천막을 갖고 있었다. 안내자 중의 사람이며 유명한 역사 학자인 살림 사드씨의 견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유대 지방의 여행자들은 굴속에 야영을 하며 천막은 사막 여행자들만 사용한다는 것이다. 도시 거주자인 리하이는 예루살렘을 떠날 때 장비 중의 하나로 천막을 준비하였겠는가?

살림씨는 리하이가 예루살렘 성에서 다소 떨어진 "상속 의 " 살고 있었으리라고 추정하였다. 그곳에서 리하이는 염소와 양을 치고 곡식과 꽃을 재배하여 고대 성곽으로 쌓여 있던 예루살렘 성내의 시장에 내다 팔았을 가능성이 짙다. 다른 가능성은, 리하이가 아랍인 대상으로부터 물건을 사서 예루살렘 시장에 팔기 위하여 사막으로 자주 나갔으며 그는 사업을 통하여 많은 재산 을 모은 것으로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장사 때문에 예루살렘 남부 사막에서 천막에 기거하면서 대상의 렬을 기다렸을 수도 있다.

물론 이상의 각은 모두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리하이가 사막 사람들과 교역을 하였다는 가설은 다 음 가지 문제에 대한 설명이 있다. (1)그가 다른 준비보다는 가족과 여행하기 위하여분한 천막과 동물을 준비했던 , (2)그의 아들들이 천막 다루는 법과 광야에서 여행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 그리고_ (3)리아호나를 얻기 전에 그들이 주요 여행로와 물웅덩이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는 .

그들이 실제로 예루살렘 지역을 떠난 방법에 대하여 우리는 어느 정도 강한 증거를 얻게 되었다.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에서 물건을 나르는 짐승으로 가장 흔하게 사용 되었던 동물은 당나귀였다. 당나귀는 낙타보다 돌길이나 천정과 발코니가 많은 좁은 성내 골목길을 다니기에 더 좋은 동물이었다. 낙타 대상이 예루살렘을 우회하여나 갔던 이유의 하나는 (예루살렘의 상인들은 낙타 대상이 동쪽으로 지나갈 , 예루살렘 밖으로 나아가 카라반을 맛았다.) 예루살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