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일성도(후기성도) 기억의 책>에서

최수영 형제 - 역사 이야기

 

최수영 형제
허옥자 자매

 


허옥자, 최수영 (뒤)미경, 명훈, 성훈, 경훈. 은경

 

최수영 형제 : 서울 서부지부 주일학교 교사, 인천지 부 서기, 인천 주일학교 교사, 전주기부장, 서울 선교부 집행서기, 복대와드 감독, 청주스테이크상, 고등평의원, 청주스테이크 선교부잠

 

나는 1964년 서울 경동고등학교 2학년 때 급우 박상옥(충북 보은 출신)의 소개로 말일성도 그리스도 교회를 알게 되어 서울 서부지부에서 Elder Tiligey, Byron SciTmidt, David Lee, William Williams, Cniig c. Williams 장로들에게 복음을 배우고, 그 당시 서울 서부지부 선교사 집에서 일했던 강영식 형제로부터 침례를 받고 Craig c. Williams 잠로의 안수를 받고, 서부지부 주일학교 교사, 인천지부 주일학교 교사 및 지부서기를 거쳐 1971년 3월 전임 선교사 부름을 받아 전주지부에서 선교사 지부장으로 12개월 봉사하고 여수에서 27fl월 봉사한 후 L. Edward Brown 선교부장의 집행서기로 봉사했다.

1973년 3월 귀환한 후에도 Brown 선교부장의 집행 서기로 계속 봉사했고, 5월 문교부 유학시험에 합격하여 그해 8월 하와이 교회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영어 교육학을 전공하여, 1977년 하와이 중 · 고등학교 영어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다음 유타주 브리감 영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공학과 언어학을 전공하여 1981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9년부터 1986년까지 브리감 영 대학교 한국어 교수로서 한국어 프로그램을 개척하고 정착시켰으며, 1986년 9월 한국교원대학교 영어교육과 교수로 오게 되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청주스테이크 복대와드 감독으로 부름을 받아 2년간 봉사했고, 청주스테이크에서 황충열, 김동환 스테이크장에 이어 제3대 스테이크장으로 1988년 7월부터 1994년 3월까지 봉사하였다. 2000년 현재는 청주스테이크 고등평의원과 스테이크선교부잠으로 봉사하고 있다.

결혼은 인천 허채 초대 스테이크장의 맡딸인 허옥자와 1974년 3월 16일 화와이성전에서 하였고, 슬하에 3남 2녀(은경, 성훈, 경훈, 명훈, 미경)를 두고 있다.


1 . 조상의 배경

나는 1946년 1월 2일 전남 완도군 고금면 도남리에서 고려시대 때의 대학자이자 교육자요 해동공자라고 불리운 최충의 30대손 최홍민(崔洪民)과 김해 김씨 김봉례(金奉禮)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족보에 의하면 나는 해동공자 최충의 31대손이요, 현감공파 즉 최만리(버뾰J의 아들 각(흡 : 현감공파 시조)의 18대손이다. 최만리 할아버지는 세종대왕 때 집현전 부제학을 하셨고 유학자들을 대표하여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셨으며, 세종대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청백리(청렴한 관리) 내호이며 황희 정승이 2호이시다.

안성 불지 부락에 산소가 있으며 아들이 5형제였으며, 맏딸은 이의석에게 시집 갔고 이율곡의 증조모이시다. 조상들이 정직하게 살아서 최씨 앉은 데는 풀도 안난다는 말이 생긴 것 같고, 축복사의 축복문에 우리 조상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고 성전에서 의식을 해 주기를 기다린다고 해서 1986년 한국에 돌아와 족보사업을 열심히 하여 돌아가신 우리 조상들의 구원의 의식을 베풀 수 있도록 한국에 주님의 성전이 1985년에 서울에 세워지게 되었고, 본인은 그곳을 자주 방문하여 드디어 1991년 직계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 그리고 할머니들의 부모에 대한 계보기록을 제출하였고, 1992년 1월에 조상들을 위한 대리침례를 청주스테이크 교회회원들과 나의 자식들과 같이 받아 주어 직계의 성전의식을 끝마쳤다. 대전의 송윤헌 형제는 최씨 조상의 의식을 하러 스테이크 회원들을 데려왔으니 한턱 내라고 농담도 하였다. '나는 종종 어떻게 왜 우리 조상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을까?' 하고 자문해 보았는데, 정직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읍을 쉽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이 정직한 삶을 사는 전통을 갖고 있어서 복음을 쉽게 받아들었다고 판단된다.

 

2. 부모님의 배경

아버지 최홍민(崔洪民)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여 서울에서 중등학교에 다녔으나, 몇 년 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대모로 시집 온 할머니가 자식 가르쳐서 무엇 하느냐고 학비를 보내 주지 않아 할 수 없이 시골로 내려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여 면 서기가 되었다. 그 당시 일본 통치하에 있었고 어느 일본 사업가가 아버지의 성품과 정직성을 신뢰하여 면 서기를 그만두고 같이 사업을 하자고 제의하여 무역업을 하게 되었고 많은 재산을 모았다. 6 · 25 사변 당시 청년단장 및 동네와 면의 중요한 자리에서 성실하고 충실하게 일하셨으며, 최씨 가문의 전통대로 정직하고 청렴하게 공직에 봉사하였으므로 인기는 별로 없는 청렴결백한 공직자였다. 조상을 찾고 연구하면서 느낀 것은 최씨 집안이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가풍이 있었다는 것과 돌아가신 아버님이 그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우리 후손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아비님이 융통성도 없이 고지식하게 정직한 분이었다고 생각했으나, 족보를 연구하면서 아버님의 그러한 청백리 자질이 최씨 기문의 전통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아버님이 얼마나 정직했느냐 하는 일례를 들면, 전남 완도군 고금면 도남리, 척찬리, 세동리, 3마을 바닷가에 원을 막아 개간지를 만들려고 건설부에서 여러 명의 측량기사들이 측량하러 왔다.

아버님께서 추진위원장이셨고, 건설부에서 측량하러 오신 분들의 섞사를 저희 집에서 하게 되었는데, 하루는(중학교 2하년 때) 연동에 가서 소주 한 독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기로 지원했고 20분을 걸어서 부두에 가서 우리 배를 타고 흔자 노를 저어 약 한 시간을 가서 연동에서 소주 독을 싣고 다시 와서 지게에 지고 왔다. 보통 어른의 하루 품이라고 생각했고 어른이 할 일을 내가 했으니 어른 품삯을 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른 품삯의 반만 주지 않는가? 그래서 "아버지, 어른 일을 내가 했으니 하루 품삯을 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했고, 아버님은 "공금이지 않느냐."고 했다. 마음 속으로 저렇게 융통성이 없는 분이 있을까 하고 섭섭해했다. 매사에 그렇게 정직했기 때문에 청년단장, 동네 이장 및 위원장을 하게 되었고, 모두 다 아버지의 정직성을 믿어 주고 신뢰는 받았으나 인기는 없으신 분이셨다.

어머니 김봉례는 전남 완도군 약산면 해동리 김해 김씨 김찬균의 장녀로 태어나, 일찍 어머님을 여의고 18살에 시집 와서 시누이 둘과 시동생 셋을 시집, 장가 보내고 첫딸과 아들 둘을 어려서 잃고 근심하다가 아들 다섯을 줄줄이 낳았고, 그 중 막내가 나이다. 어머님은 같은 마을에 사는 아버지의 작은 마누라 때문에 많은 심적 고통을 느끼며 살아왔고 우리 가정은 그 일 때문에 불화가 잦았으며, 어머님은 자식들을 잘 키우고 교육시키는 것이 인생의 보람이었고 자녀교육에 매우 헌신적이셨다. 살아 있는 아들 중 큰아들인 최수일(崔秀逸)은 서울 상대를 졸업하고 현대건설 경리이사, 한국도시개발 주식회사 대표, 인천제철 사장, 현대중공업 사장, 인천제철 회장을 역임하였고 현대 그룹 정주영 회장의 신임받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어머니는 1983년 미국 유타주 프로보에서 1년 동안 나의 가족과 생활했고 '막내아들을 성공시켜 준 교회'를 박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셔서 37년간 피우던 담배를 끊고 침례를 받으셨고, 김종균 축복사로부터 건강의 축복을 받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막내아들을 성공시켜 준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건강하게 사시다가 93세가 지난 2000년 4월에 돌아가셔서 완도읍 조상의 산소에 묻히셨다.


3. 어린 시절

나는 전남 완도군 고금면 도남리에서 태어나 고금 초등학교를 다녔다. 졸업할 때 완도경찰서장 상을 받게 되었고 그때 영어사전을 상품으로 받게 되어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는 목포시에 있는 외삼촌 김봉천 댁에서 넷째형인 의영 형님을 따라 목포중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중학교에서 영어를 다른 과목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큰형님이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재학중이어서 학비가 많이 들고 경제적인 형편이 좋지 않아, 둘째 수웅 형님과 셋째 의장 형님이 중학교만 다니게 되었고, 넷째 의영 형님은 중학교 졸업 후 2년 쉬고 큰형님이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동양세멘트 회사에 취직이 되어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4. 고등학교 시절

나도 고등학교는 서울로 가고 싶었으나 큰형님과 부모님께서 고등학교 진학 문제에 대하여 말씀도 없고 또한 서울로 올라오라는 말도 없어서, 1963년 1월 결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고 셋방살이하는 큰형님께 목포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다고 전보를 치고 새벽 4시 반에 도착하였다. 도착하니 큰형님께서 미소를 지으시면서 "너 누가 서울에 올라오라고 해서 올라왔느냐"고 말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형님의 셋방으르 따라갔다. 그 당시 빠듯한 신입사원 월급으로 넷째 의영 형을 가르치고 결혼하여 셋방살이를 하는 큰형님, 형수님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우겠다는 열의로 서울에 올라와 의영 형과 같은 경동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나는 1964년 서울 경동고등학교 2학년 때 충북 보은에서 유학 온 박상옥(Sang-마t Park) 급우를 알게 되었고, 그가 보여 준 선교사의 명함에 있는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 솔트레이크성전을 보고 성스러운 건물이라고 느껴서 그의 교회에 대하여 질문했고 같이 방문하자고 청하여 서울 서부지부의 선교사들과 공부하게 되었고, 선교사들의 순수한 태도와 <구원의 계획>이라는 소책자에 크게 감명을 받아 6개월 후인 1964년 12월 12일에 서울 서부지부의 강영식 형제와 Craig c. Williams 장로한테서 침례를 받았다.

그 당시 영어회화반에서 John Scoville 장로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질문했을 때 행복한 가정을 갖는 것이라고 해서, 행복한 가정을 갖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을 때 지금 행복한 가정을 갖고 있으나 자기 자신의 행복한 가정을 갖는 것이 희망이라고 대답해서 이상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당사 나의 기대는 과학자가 된다든지 사업가, 장군, 교수 등과 같은 희망을 갖는 것이 젊은이의 포부요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교회에 대하여 배우면 배울수록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가정은 지상의 천국' '어떠한 사회적인 성공도 가정에서의 실패를 보상해 줄 수는 없다'는 몰몬 사상을 좋아하게 되었고, 어느새 이상하다고 생각한 Scoville 장로의 행복한 가정을 갖는다는 소망이 나의 소망이 되었다.

 

5. 인하대학 시절

1966년 인천 인하공대 기계과에 입학했고, 하느님께 불평하는 기도를 가끔 했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어느 대학 무슨"학과를 지망했으면 좋겠는가?' 매일 4―5번 기도했다. 처음에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가서 외교관이 되고 싶었으나 3학난 대는 어쩐지 공대 기계과를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연세대 공대를 지망할까 생각했으나, 간판을 보려면 연대 공대를 가고 실속을 보려면 인하공대에 들어오라는 친구 연규복의 형 연규천 선래의 조언을 듣고 인하공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막상 공대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아 2년 동안 하루에 4~5번 '인도해 주십사' 하고 기도했는데도 주님께서는 적섭에 맞지 않는 공대에 오도록 버려 두셨나 하고 주님을 가끔 원망했다.

그때 인천에 교회가 없어 서울 서부지부 교회를 가기 위해 5시쯤에 일어나 미숫가루를 타 먹고 25분쯤 걸어서 제물포 역까지 가서 1시간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20분 정도 갈어가 서대문 서부지부를 참석했다. 어떤 때는 라면으로 점심을 할 때도 있었으나, 큰헝님께 많은 돈을 타 쓰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인천에서 서울까지 교회에 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큰형님께 교회 다니면서 헛돈을 쓴다는 말씀을 듣지 않기 위해 점심을 사 먹지 않고, 성찬 빵을 준비하면서 빵 테두리의 까만 부분을 떼어 두었던 것을 점심으로 먹곤 하였다. 저녁 성찬식을 참석하고 인천 기숙사로 톨아오면 밤 10시경이 되어 저녁식사를 못하고 잠자리에 들가가 일쑤였다. 그때 지금 캐나다에 살고 있는 정지헌 형제가 자취방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해서 식사를 대접받아 대단히 고마웠으며, 그후 브리감 영 대학에서 정지헌 형제의 자녀들을 만나서 대단히 반가웠고 기뻤다.

대학 1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여 보초를 하루에 2번씩 서고 배가 고파서 무척 고생하였다. 훈련소에서 나는 중대의 서무를 보았는데, 어떤 동료들은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하여 돈을 썼으나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모든 것이 연합하여 너에게 경험이 되고 유익이 되게 할 것이다."라는 상호향상회 주제를 생각하며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경험을 얻고 배우러 왔으니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서 나에게 경험이 되도록 보내 주신 곳이년 아무 곳이나 가겠다고 결심했다. 정말 하느님이 보우하사 38선 너머 6군단 822포병대대 알파포대로 가서 무척 고생하고 무척 배가 고팠다. 보초도 하루 저녁에 2번 설 때도 있었고, 밥은 양이 적어 스푼으로 누르면 그릇의 반도 안 되었다. 어느 날 카투사로 근무하는 박왕갑 고종사촌형이 면회를 와서 전곡읍에 가서 볶음밥과 군만두를 사 주어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1970년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하려고 하자, 큰형은 사업이 잘 되지를 않아 취직을 시켜 줄 테니 취직하여 I년간 돈 벌어서 다니라고 해서, 내가 아르바이트로 가정교사를 해서 다닐 테니 등록금만 대어 달라고 했으나 등록금도 없으니 그렇게 학교에 다니고 싶으면 사촌형 최의강 형님께 사업 자금으로 빌려 준 돈을 받아서 등록금으로 하라고 하였다. 그 당시 청계천 무허가 건물에서 과자공장을 하는 최의강 형을 찾아가 말씀드렸더니 "네가 그렇게 배우고 싶어하니 학비를 도와푸어야 되는마' 하고 거금 15만 원짜리 어음을 선뜻 내어 주었다. 옆에서 형수께서 듣고 계시다가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라고 어음을 주어 버리느냐"고 하므로 빼앗길까 봐 두려워 얼른 나왔다. 그렇게 하여 등록을 하고 복학은 하였으나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기가 막연하여 주님께 간구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그당시 인하공대 기계과를 1등으로 졸업하고 기계과 조교로 있던 최상혁 선배의 친절한 도움으로 가청교사 자리를 손수 소개해 주어 어려운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중3을 가르치년서 학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교회에 갈 때 입을 옷이 적절하지 않아 형님의 옷을 줄여서 입기도 했다.

[*사진/ 인천 인하대에서 최상혁과 최수영(1971년)]

처음 본 후배에제 친절하계 대해 주고 학비 벌어서 다닐 걱정까지 해 주고 손수 가정교사 자리까지 소개해 주신 최상혁 형제에게 교회를 소개했고, 선교사를 만나 보겠다고 해서 Carter 장로와 Joginson 장로를 소개해 주어 침례를 받았다. 왜 그렇게 초면의 후배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그렇게 순건하고 소박하고 세상 때가 묻지 않고 깨끗하게 보였다고 하였다. 그 당시 기계과 조교로 있던 백준옥 형제, 정밀기계공학과 조교 김희남 형제, 기계과 정광순, 정옥 형제들이 침례를 받고 그 외 인하공대생들이 많이 침례를 받았는데, 서울에 가서 지부대항 운동경기 시합 때 존깨도 없었던 인천지부가 우승을 여러 번 하여 서울지방부에서 놀라곤 하였다.

그 당시 나는 주일학교 복음메시지반 교사였는데 거의 매일 공과를 읽고 어떻게 가르칠까 생각하고 연구하며 가르쳤으나, 공대생이라 그런지 서툴러서 고등평의원으로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인천지부를 도와주던 황종섭 형제께서 가끔 도와주곤 했다. 구약을 가르치는데 반원들이 별로 읽어 오지 않는 것 같아 읽어 와서 퀴즈를 맞추는 반원은 짜장면을 사주겠다고 하였고. 허채 지부장의 만딸인 허옥자 자매가 퀴즈를 맞추어서 그 덕분에 모든 회원들이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었고 허옥자 자매의 짜장면 값은 내가 지불했다. 거의 매일 공과책을 읽어 보며 어떤 방법으로 공과를 전개할까 하고 많은 시간을 공과 준비에 보냈는데, 가정교사를 해서 고학하는 나에게 어느 날 Joginson 관리선교사가 지부서기로 봉사할 수 있는가 물었고,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며칠 후 허캐 지부장님께서 지부서기로 봉사할 수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Joginson 장로에게 지부서기가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물었는데, 잘 모르지만 일이 많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며칠간 생각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다가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했으니 받아들여야겠다고 결정하고 허채 지부장께 하겠다고 했다. 그 당시 서울 지방부에서 보고서와 그 양식을 써서 보내라고 했으나,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 Jorginson 관리선교사에게 물어도 모르고, 더구나 지부장은 보고서나 기록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교회 지침서와 서적을 뒤지면서 지방부에서 보내라고 하는 양식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덕분에 교회의 거의 모든 지침서를 공부하게 되었고, 번역된 교회 공과책과 서적들을 모두 탐독했다. 학교 공부는 엉망이었고 겨우 학점만 따면 다행인 것으로 여겼고, 기계과 조교로 계신 최상혁 형제님한테 가끔 학점 관리를 잘 하도록 꾸중도 들었다.

제대하고 기계과에 복학하여 어렵게 학교를 다니는 동안 교회일에 충실하였고, 허채 지부장 맡딸인 허옥자 자매를 사랑하게 되었다. 허채 지부장 부부가 한국 지부장으로서는 처음으로 하와이성전에 인봉받으러 간 동안, 몰몬경을 같이 읽고 공부하자고 제의하여 일주일에 2-3번 지부장 집에서 허옥자, 허선회, 허양회와 같이 몰몬경을 읽고 토론을 하였다. 동생이지만 먼저 결혼한 허옥선 자매도 가끔 방문하곤 하였다.

허채 지부잠 가족 분위기가 좋고 허옥자 자매를 좋아해서 몰몬경 공부를 하자고 했는데, 지부장께서 미국에서 돌아와 미국에 간 동안 복음공부를 자녀들과 같이 해주어 나에게 고맙다고 했을 때 기분이 참 좋았다. 주일학교 경전 읽는 과제를 잘 준비해 오고 상호부조회 서기로서 기한 전에 보고서를 잘 정리하여 내며,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서 그런지 항상 미소짓고 상냥한 허옥자 자매가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1970년 9월 어느 날 허옥자 자매에게 결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 기도를 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허 자매를 좋아하고 허 자매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제가 전화하여 다방으로 나오라고 해서 나의 마음의 느낌과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려고 하는데, 올리버 카우드리의 경험에 의하면(교성 8장) 옳은 결정이면 뜨거운 느낌을 주겠다고 했는데 제가 전화 걸어 propose하는 것디 옳은 결정입니까댔' 기도를 2번 계속해서 해보았으나 뜨거운 느낌이 없었다.

그렇다고 차가운 느낌도 없었다. 그러면 주님께서 하라는 말도 안 하시고 하지 딸라는 말도 안 하셨으니, 나의 생각대로 용기를 내서 행하자 하고 전화를 걸어 다방으로 불러냈다. 다방에서 만나 내가 말을 꺼내기를, "나는 침례받은 이후 대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봉사하겠다고 계획을 세웠는데, 큰형님 형편이 어려워 대학 2년을 마치고 선교사업 2년을 하고 유학시험에 합격하여 하와이 교회대학으로 유학을 가려고 합니다. 나는 선교사업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여자나 결혼 때문에 선교사업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 제가 선교사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까?" 하니, 허 자매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자기 여동생이 먼저 결혼했고 집안에서도 빨리 결혼하기를 원하니 어렵겠다. 대학 3학년만 같아도 기다리겠는데 이미 대학도 졸업했고, 지금은 약국에서 약사로 일하고 곧 시집 가도록 집안에서 기대하고 있으니 어렵겠다고 했다. 거절은 했지만 기분 좋게 설명해 주었고 부드럽게 밀해 주어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교회에서 교사로서 가르치면서 허 자매도 나를 무척 좋아하는 것으로 느껴져서, 어느 날 근무하는 약국으르 찾아가 또 이야기를 하니 그렇다면 생각을 좀 해 보겠다고 했고 크리스마스 때에 대답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한 달 후 다시 찾아가 크리스마스까지 기다리느라고 공부도 잘 안 되고 하니 우리 서로 금식하고 기도하자고 날짜를 정했다. 금식을 하고 약국에 다시 찾아가서 제물포에서 동인천까지 걸어오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고 이야기 하였다.

1970년 12월 24일은 쓸쓸한 날이었다. 인천 교회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었고 허옥자 자매의 부채춤 공연과 여러 가지 행사가 있었으나, 나에게는 허전하고 쓸쓸한 크리스마스 파티였다. 혹시 이날 허 자매로부터 어떤 연락이 있을까 기대했으나 허사였다. 최상혁 형제님의 하숙집으로 찾아가 이야기를 좀 나누고 서울 큰형 집으로 짐을 챙겨서 돌아왔다.

겨울방학이 되어 드디어 1971년 1월 선교사로 나가기로 작정하고 김종균 지방부장님의 사무실인 서울대학교 문리대 생물과로 찾아갔다. 김좀균 부장과 같이 선교본부로 와서 서류를 작성하고 Robert H. Slover 선교부장님과 접견을 하고 서류를 미국으로 보냈다. Slover 선교부장님께서 선교사로 나간다고 유학을 가는 데 혜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했을 때 조금 섭섭하였고, 내가 유학 가기 위해서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또한 가더라도 떳떳하게 문교부 유학시험을 거쳐서 정식으로 유학 가겠다고 결심했다.

이호남 선교부장 제보좌께서는 인천에서 내가 열심히 경전을 연구하여 가르친 것을 몇 번 관찰하셔서 그런지, 선교사 추천 첩견할 때 앞으로 교회회원들이 교리에 대하여 의문이 생기면 '최수영 형제에게 물어보자' 하도록 복음의 전문가가 되라고 권고해 주셨다.


6. 선교사 생활

1971년 3월 미국 교회본부에서 부름이 와서 서울 청운동 선교본부로 갔다. 양복도 없고 겨울 코트도 없어서 큰형님의 양복 한 벌과 봄 코트를 형수께서 다려 주셨는데, 옷이 조금 커서 코트를 입으니 사람들이 나를 몰라 보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 LTM을 거쳐 Ⅱ명의 풋내기 선교사들이 와 있었다. Garwon 장로의 인솔로 이발을 하러 갔었고, 이발 후 명동에서 징기스칸 요리를 먹고 YMCA 호텔에서 자고 선교부장 보조들이 와서 새벽 6시에 청운동 선교부로 모이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배가 아파 잠을 한잠도 못 잤고, 너무나 아파서 Garwon 장로와 같이 선교본부로 가지 않고 새벽 6시에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x ray 사진을 수없이 찍어 보고 검사를 한 결과 담석증 인것 같다고 했다. 큰형님 집에 소식이 전해졌고 수웅 형이 병원에 찾아와서 치료비로 쓰라고 Garwon 장로에게 얼마를 주고 갔다. 진통제를 맞아서 그런지 저녁때가 되니 조금 괜찮아 퇴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아픈 몸으로 선교사업에 나온 것같이 선교부장님께서 오해하실까 봐 대단히 걱정이 되었다.

나는 1966년 인천 인하공과대학 기계과에 입학하여 공대가 적성에 맞지 않아 주님께 불평하는 기도를 가끔 했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어느 대학 무슨 학과를 지망했으면 좋겠는가 매일 4―5번 기도했고, 처음에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지망하여 외교관이 되고 싶었으나 3학년이 되어서는 어쩐지 공대 기계과를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인하공대를 왔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하였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을 몇 년 후에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년 공대를 입학했기 때문에 2년 수료 후 유학시험을 치를 자격이 있었고(인문계를 지원한 학생은 4년 졸업 후 유학시험 치를 자격이 주어졌다), 그 당시 학비를 대어 준 큰형님의 사업이 잘 되지 않아 2년 수료 후 학업을 중단해야 될 상황이 되었고, 공대생이라서 2년 수료 후 유학시험을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고 하와이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인하공대를 갔기 때문에 그 당시 인하공대 기계과 조교요 명석한 학자인 최상혁 헝제님을 교회에 인도하게 되었고, 최상혁 형제 덕분에 백준옥, 김희남 조교들과 많은 인하공대 학생들이 교회에 가입하게 되어 인천 교회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고, 또한 허채 인천지부장의 맡딸 허옥자를 알게 되어 결혼하게 되었다. 또한 공대 기계과의 배경으로 미국 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과 Gordon Low 교수의 연구자료를 컴퓨터와 통계학으로 분석하는 일자리를 갖게 되었고, 특히 교육공학 분야에서도 컴퓨터를 활용한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인도라는 것을 몇 년 후에 깨닫게 되었다.

1971년 Robert H Slover 선교부장님의 안수로 장로신권을 받고 ,3월 14일 복음선교사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복음선교사로 부름받은 그 다음날 담석증에 걸려서 고생을 했으나 다행히 수술하지 않고 저설로 소변으로 나왔다. 전주에서 선교사 지부장으르 약 1년 봉사한 후 여수지역으르 전출되어 약 2개월 봉사 후 서울선교본부 L. F^ward Brown 선교부장의 집행서기로 봉사했다. 선교사를 하면서 격정하기를 귀환 후 큰형님께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어 학업을 계속하고 싶어서 하와이 교회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고학하여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데 ··· 하는 생각이 많았으나, 어느 날 교리와 성약을 읽다가 "나 주는 내가한 말을 너희들이 행할 때에는 너희의 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으나 내가 한 말을 너희가 행하지 아니할 때에는 너희는 약속을 받지 못하느니라."(교성 82 :10)를 읽고 오늘을 열심히 살면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또한 현재의 일인 선교사업을 열심히 하면 주님께서 도와주시겠지···, 만일 도와주지 않으면 주님께 데모를 해서라도 나의 공부하고 싶은 소망을 탄원하자고 생각하고, 그러기 위해 현재의 일인 선교사업에 충실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진/ L. Ed Brown 한국 4대 선교부장(1972년)]

서울선교본부에서 존경하는 L. Edward Brown 선교부장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 그는 가정의 밤 프로그램과 가정복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그의 가르침대로 그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Brown 자매의 헌신적인 현모양처의 모습과 천사 같은 아이들을 볼 때 언젠가는 나도 브라운 선교부장님 가정과 같은 행복한 가정을 갖자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부장님께서 가끔 지방대회에 참석하실 때 나를 데리고 다녀 한 방에서 자기도 하고 가까이 지내면서 예수님과 니파이 같은 분이라고 생각되었고, 언젠가는 12사도가 될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어느 날 광주지방부 훈련모임에 가기 위해 자료를 준비하다가 원탁 포마이카 책상을 손상시켰으나 아무 말도 않으시고 이해해 주섰고, 또한 신중하게 기도하는 태도로 권고하고 일 처리를 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예수님 같은 지도자라고 생각되었다. 그분의 훌륭한 일면은 어느 날 구중식 선교부 부동산관리자께서 경복궁 앞에 있는 교통순경들에게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돈을 좀 주어야 된다고 설명하시다가 잘 이해를 못하시니까 "한국에서는 명짚때나 특별한 날에 교통순경들께 뇌물을 주어야 된다"고 했을 때, 조용히 복도에서 선 채로 생각하시더니 "뇌물로 주지 말고 사랑으로 줍시다."고 대답하여 그의 훌륭한 대답에 우리 민족을 대표해서 내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고 그리스도인다운 포용력과 아량을 느꼈다.

1973년 3월 15일 선교사를 끝내고 5월 10일 문교부 유학시험이 있어서 굉장히 마음이 조급했으나, 브라운 선교부장께서 계속 집행서기로 봉사하도록 해서 주중에 선교부장단 모임과 주말에 지방대회 및 새로운 기부장단을 훈련시키러 다니느s}고 많은 시간을 교회일로 소비했다. 유학시험 합격할 때까지 집행서기를 해임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으나 "나 주는 내가 한 말을 너희가 행할 때에는 너희의 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으나···."(교성 82 : 10)를 기억하고 신앙으로 인내했다. 다행히 5월 ?일 유학시험 발표에 영어, 국사, 시사에 다 합격하여 7-8월에 유학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유학시험에는 합격했으나 막상 떠나려고 하니 Brown 선교부장님한테서 너무나 많이 그리스도와 같은 태도와 모범을 배운 것 같았고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웠고 또 배울 것 같아 만일 선교부장님께서 나를 원하신다면 일 년 유학을 늦추고서라도 선교부장님을 도와 교회일을 할 수 있다고 했더니, 내가 잘 되는 것이 교회가 잘 되는 것이니 계획대로 유학을 추진하라고 하였다.

 

7. 하와이 유학

1973년 7월 인천 처갓집에서 약혼식을 하고 8월에 하와이로 유학을 떠났다. 학교에서 Stawart 형제와 그의 애인 Kelly 자매가 학생회 부탁으로 학교 차로 마중을 나왔다. 호놀룰루에서 Laie까지 1시간 겊렸는데 오는 길에 농장에서 바나나 몇 꾸러미를 싼값에 샀다. 한국에서는 대학교 때 아르바이트해서 2천 원주고 바나나 3개를 사 먹어 본 것이 고작이었다. 고대 법대를 졸업하고 서부지부장을 지내신 이태문 형제 집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기숙사에 들러서 짐을 풀었고, 아직 기숙사 수속을 못 해서 아침식사를 어떻게 하나 궁금해하고 있는데 이태문 부부께서 샌드위치와 과일을 깨끗이 준비해서 갖고 오셨다. 그 이후 사려깊은 이태문 부부의 친절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들이 LA에서 행버거 가게를 하고 있을 때 흑인이 술을 먹고 차로 들이받아 고생을 하고 있어서, 우리는 B\"U 대학에 가면서 은경이 엄마와 상의하여 우리가 필요한 것보다는 이태문 지부장님 가족이 자립하는 데 돈이 더 필요하다고 느껴서 상당한 돈을 몇 년간 이자도 생각하지 않고 빌려 드리게 되었고, 그 돈이 사업을 일으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황종섭 형제님과 같이 학교에 가서 수속과 등록을 하려고 할 때 돈을 얼마 가져 왔느냐고 물었고, 학비 250달러와 한 달 생활비 100달러를 가지고 왔다고 하자, 그러면 비상금이 필요하니까 학교의 융자(Q)an)를 얻어 학비와 기숙사비를 우선 내고 직장을 얻어 일하면 2주마다 월급에서 제한다고 했다. 그래서 100달러는 잡비로 쓰고 250달러는 결혼 비용과 비상금으로 쓰기로 했고, 어떤 직장을 구할까 망설이고 있었다. 마침 기숙사로 가는 길에 선교사훈련원(Language Trai마ng Mission ; LTM)이 있고 광주 지방대회에서 자주 만났던 이도환 형제님이 LTM 관리인이라고 해서 들렀더니, 이 형제님이 말씀하기를 한국에서 온 유학생의 아르바이트 직장은 대개 청소관리인데 다른데 청소하는 것보다는 선교사들을 위해 청소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하셔서, 나도 선교사 생활을 했으나 그렇게까기는 선교사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는데 저런 마음 자세로 일하는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승낙했다. 나는 LTM이 Prov() MIC(Missi에aiy Training Center)로 통합될 때까지 이도환 형제와 같이 LTM 청소부와 시간제 한국어 교사로 학비를 벌었다.

그 당시 LTM 선교부장으로 Eugene mi 부장님이 봉사를 했는데, LTM 청소관리인인 이도환 형제와 나에게 참 친절하고 겸손히 대해 주었다. 이도환 형제는 졸업하고 한국 신학연구원(종교 교육원) 교수로 오게 되었는데. 귀국하가 전 ⅢⅡ 선교부장님을 찾아가 당신은 참 겸손한데 당신 철학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Hill 선교부장의 대답은 "나는 사람을 대할 때 저 사람이 앞으로 하나님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대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을 들었단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겸손은 그런 철학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다. 그런 분이니까 청소부인 우리에게 그렇게 겸손하고 친절하게 대했을 것이다. 그 말씀은 나의 인생에 큰 교훈이 되고 있다.

대학에 등록하고 외국 학생들은 Jay Fox의 감리 하에 영어시험인 Michigan English Proficiency Test와 Essay 영작시험을 보아 어떤 영어 코스에 배치해야 하는가 결정을 하며, 이 때 80% 이상이고 Essay시험에 합격하면 영어 코스를 하지 않고 바로 정식 코스틀 택하게 되는데 나는 모두 합격했다. 그래서 이도환 형제께 모두 합격했다고 말하자, 놀라면서 여태까지 한국에서 온 유학생 중에서 ELKEnglish Language Institute) 코스를 택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내가 유일하게 EU 코스를 택하지 않고 정식 코스를 택하게 되었으니 놀랄 일이라고 하면서 천재 취급을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하신다. 내가 선교생활을 하

면서 선교부장님께 매주 보고서를 보내고 뒷면에 영문으로 편지를 썼는데 그런 훈련이 도움이 된 것 같다. 나는 학점 신청을 할 대 생각하겨를 중학교 때 사라호 태풍으로 논에 바닷물이 들어와 농사를 못 지어 하숙비를 1 수 없어서 1년 쉬었고, 군대 3년, 적성에 맞지 않는 공대 2년, 그리고 선교사 2년을 했으니 남보다 적어도 5년이 뒤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2년 만에 졸업해 볼까 하고 첫 학기부터 17학점을 택했다.

[*사진/ 이도환, 최낙윤(장모), 김재숙 (뒤)규하, 민아, 민경, 규식(1999년)]

Eric Shurnway 교수의 'Freshman English Writing' Class에 이종범, 허영환 그리고 내가 택했고, 허영환 헝제는 내가 ELI 코스를 밟지 않고 올라와서 기대를 많이 했으나 셋이 모두 중도에서 포기했다. 'Biology 100' Class는 각 Chapter가 끝날 때마다 I페펴1 가서 시험을 보고 4~5 Chapter 후에 Ul파 test를 보는데, 하여튼 두꺼운 Biology 책을 2-3 번은 탐독해야 되었고 전문 학술지도 요약해서 제출해야만 했다.

Introduction to Psychology'는 Gwxiwin 교수가 가르쳤는데, 그 Class도 Chapter 시험은 Lab에 가서 보고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Class에서 보는데 너무 읽을 분량이 많아 다음 학기에 다시 택하겠다고 작정하고 꼬박꼬박 강의에 참석하였다. 2학기 말에 교수를 찾아가 한국에서 처음 와서 미국 실정을 잘 몰라 무리하게 17학점을 택했고, 너무 힘들어 Chapter 시험을 잘못 보았고 다음 학기에 택하려고 하니 x grade(그 당시 외국인을 위해 영어 코스만 X grade를 주었는데, 실력은 많이 발전하여 미국 학생의 수준에는 도달 못했으나 다음 학기에 택해서 학점을 얻으라는 배려에서 영어 코스만 x를 줌)를 좀 달라고 하자 영어 코스에만 x가 있다고 설명하므로, 그러면 l(Incomplete)를 좀 달라고 하니 1는 아파서 수술을 했거나 그 외 사고를 당해서 Paper를 못 냈을 때 주는 것인데 "너는 아픈 사실도 없고 꼬박꼬박 강의에 참석했는데 어떻게 I를 주느냐'고 해서 '이렇게 융통성도 없는 사람이 있나?' 하고 생각하며 계속 서둔 영어로 논쟁을 했지만 통하지가 않아 나와 버렸다. 내가 한국에서 인하공대 다닐 때, 미분방정식 학점이 나오지 않아 제대하고 온 학생들이 모여서 설탕 한 봉지 사가지고 교수를 찾아가, 1학년 때 미적분학을 배우고 군대 갔다 오니 다 잊어버려 미분방정식에 어려움이 있었으니 잘 봐 달라고 하여 B학점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하여튼 Goodwin 교수가 융통성도 없이 답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분은 오히려 내가 이상하다고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분한테 그 Class를 다시 택해 A학점을 받는 것이 복수라고 생각했으나, 다음 학기에는 다른 교수가 그 Class를 가르쳤다. 아무튼 첫 학기 17학점 중 몰몬경(2학점) A, Biology 100(3학점) A, 체육(PE 100, 1학점) A, 종합 6학점만 이수하고, Freshn피1 English Writing(4학점) X, English Speed reading(3학점) X, Psychology(4학점) F를 맞았다.

미국에 유학 와서 낙제 점수를 받았으니 공부도 못 끝내고 쫓겨날 것 같아 겁이 더럭 났으나, 연구와 신앙과 기도로써 노력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다음 학기에는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였고, 장학금 자격 기준을 보니 15학점 이상 택해서 B+ 이상이면 학비의 1/2, 평균 A이면 학비 전액 장학금이라고 해서 15학점만 택하여 열심히 했더니 전부 A학점을 받았고 장학금도 전액 받게 되었다.

장학금을 받으니 하도 선이 나서 장인 가족과 최수일 큰형님께 장학금 받았다고 편지를 써서 자랑을 했다. 그러나 며칠 후 생각하기를, 장학금을 받았다고 자랑을 했으니 학기 시작할 때마다 새 학기 장학금은 받았나 하고 궁금할 것 같아 계속 받지 못하면 큰일이라고 생각되었고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부담과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생활에 여유가 없어 악착같이 장학금을 받도록 최선을 다했고 계속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결혼은 인천의 허옥자 자매가 약사 이민 수속을 하여 1974년 3월 1일에 하와이로 와서 3월 16일에 하와이성전장 Charles Lloyd Walch의 주례로 이루어졌고, 한국 형제 자매들이 다 모여 기혼자 기숙사 lounge에서 reception을 하여 비용도 들지 않았고, 신혼여행은 Polynecian Cultural Ce마er(하와이 민속촌) 모텔에서 이틀 자고 돌아왔다. 결혼식에는 장영보 가족, Helena Lee와 아들 Abraham Lee, 허영환, 이태문, 이도환, 박동환 형제들이 참석했고, Law 형제 외에 귀환선교사들이 참석해 주었다.

하와이 교회대학에서 생활하면서 교회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무척 애썼다. 킴볼 예언자님의 권고대로 학업 때문에 자녀를 갖는 것을 뒤로 미루지 않고 산아 제한도 하지 않았으며, 엄마의 위치는 가정이므로 은경 엄마가 아이들을 키우는 데 우선 순위를 두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일 주일에 약 30시간 가량 일했고, 방학 때는 주당 90샤간까지 일한 때도 있었다.

니파이의 신앙대로(니파이일서 3 :7) 주님께서 방편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신앙을 갖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주님께서는 항상 약속을 지키셨다. 장학금을 받기 못하면 생활의 여유가 없어서 악착 같이 장학금을 타려고 노력했는데, 하늘과 선생님들은 스스로 돕는 학생을 돕는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8. 대학원 시절

1977년 6월 드디어 영어교육학 학사를 이수하고 또한 하와이 중 · 고등학교 영어 교사 자격증도 취득하였고, 꿈에 그리던 브리감 영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가 신학연구원 교사가 되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전주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봉사한 적이 있는 복음의 친구인 Bob Norton 형제의 도움과 배려로 학생 아파트도 구할 수 있었고 일자리도 구했으며, 신학연구원 교사가 되려면 교육심리학보다는 교육공학이 더 나을 거라는 Norton 형제의 조언과 David Buttler 교수님의 조언으로 교육공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교육공학을 전공하면서, 힘들고 공부가 어려워 많이 기도하고 많이 울었다. "연구와 신앙으로 학문을 탐구하라."(교성 80 : 18)는 경전 구절은 항상 나의 지침이 되었다. 제일 힘든 과목은,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학자요 교수인 David M. Memll의 '교수공학연구'라는 수업이었는데, 숙제도 어려웠지만 특히 기말 연구 프로젝트로 연구를 하여 학술지에 발표를 해주든 안 해주든 상관없이 연구논문을 보내고 사본을 하나 제출하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너무 힘든 과제였고, 내가 택한 연구주제를 위한 준비를 하는 데도 6개월이 흘렀다. 너무나 힘들어 어느 날 교수를 찾아가 다른 쉬운 연구주제로 바꿀 것을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저녁에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이 연구가 너무 힘들어 교수님을 찾아가 쉬운 연구주제를 택하려고 합니다. 아무튼 너무 힘듭니다. 어떻계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기도드렸을 때, 내 자신의 영혼이 분리되어 나의 앞에 서더니 나에게 디음과 같이 묻는 것이었다.

'너, 왜 미국에 왔느냐?' '공부하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쉬운 연구주제를 택해 쉽게 끝내는 것이 합당하느냐?' '아닙니다.' '어렵지만 이 연구 주제를 인내를 가지고 끈질기게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는 느낌이 들어왔다.

그 연구주제를 고생고생 끝에 일 년 후에야 끝냈고, 그 반에서 유일하계 외국인이었던 나만 학술지에 발표하게 되었으며, 그 논문을 연장해서 연구한 것이 나의 박사논문이 되었다. 정말 처음 일 년간은 힘들었으나 나중에는 쉬어져 좋은 연구가 되어 지도교수들한테 칭찬을 많이 받았고 Memll 교수도 그 연구를 끝내 주어서 대단히 고마워했다. 실은 그 연구가 너무 어려워 Memll 제지들이 두 번이나 시도했다가 중도에서 포기하고 누군가가 그 연구를 완수해 주길 굉장히 바랐는데, 능력은 부족하지만 끈질긴 내가 그 연구를 끝내 준 것을 MemU 교수는 매우 흡족해하고 기뻐했다.

[*사진/ 최수영, 박사학위 취득 후 가족과 함께(1981년)]

 

9. 브리감 영 대학에서의 교수생활

1979년 박사과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아시아 · 슬라브 언어(Asian and Slavic Languages) 과장인 Don Jarvis 교수께서, 한국어를 택하는 귀환선교사들이 많아져 한국어를 가르칠 교수를 찾고 있고 박사학위를 이미 소지하고 있는 현직 교수를 찾고 있는데 나도 박사과정이 거의 끝나 가니 접수해 보라고 신청서를 주셨다. 언뜻 느껴지기를 학과장이 서류를 손수 주면서 신청해 보라고 하니 자격은 아직 못 갖추었으나 희망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류를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제출하였다. 제출한 서류를 보시더니 잘 조직되고 정성이 들어가서 그런지 무척 흡족해하신다.

한국어 교수직에 서류를 제출하거 전후에 나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여러 번 했다.
"하나님, 제가 인생의 목적과 학문의 목적을 몰라서 방황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당신의 참된 복음과 구원의 계획을 알게 되어 너무나 기쁘고 감동되어, 나와 같이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학문 중의 학문이요 모든 지식의 근원인 당신의 복음을 가르치는 신학연구원 교사가 되기 위해 당신의 학교인 브리감 영 대학교에 유학을 왔습니다. 이제 당신의 도움으로 박사학위가 거의 끝나가고 한국에 돌아갈 시기가 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브리감 영 대학교의 한국어 프로그램이 주님의 대학에 마땅히 진행되어야 할 수준에 미흡하며 킴볼 예언자님의 권고대로 한국 귀환선교사들에게 의미있는 한국어 프로그램이 제공되어야 하고, 그 일을 하기 위해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기도를 하여 주님과 의논하였다. 브리감 영 대학교에 남아서 한국어 프로그램을 개발시키는 것이 주님께서 바라는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고, 대학 당국이 나를 교수로 채용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며, 은경 엄마에게 대학 당국이 나를 채용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했을 때 "하버드대학 박사 출신 귀환선교사도 많이 접수시켰는데 감히 아직 박사학위도 없는 나를 쓰겠는가." 하고 구약성경의 사라(Sarah)같이 미소를 지 었다.

1979년 8월 나는 브리감 영 대학교 한국어 프로그램을 개발할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 채용되었다. 그리하여 나에게 목표와 방향 감각을 제공해 준 교회와 사랑하는 조국, 그리고 고학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사회적인 여건을 허락해 준 고마운 미국을 위해 보답할 수 있는 길은 한국어를 계속 배우려고 하는 귀환선교사들을 열심히 가르쳐 귀환선교사들이 배웠던 한국어 실력을 더 발전시키고 더 유능한 사회인이 되도록 그들을 도와 미국과 한국, 그리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판단되어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BYU 한국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1982년에 드디어 한국어 전공이 인가되었고, 교수진도 2명으로 늘어나게 되어 한·미 교육위원단장인 Mark Peterson 형제가 I983년에 오게 되었다. 1979년부터 1986년까지 브리감 영 대학교 한국어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한국인으로서 또한 나의 능력의 범위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가 신학연구원 교사가 되는 것이 유학의 동기요 꿈이었다. 그리하여 하와이에서부터 종교 과목을 열심히 택하였으며, 한국에 가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생각도 많이 하고 자료도 열심히 모았다. 나는 침례를 받기 전부터 경전을 연구해 왔으나, 정작 열심히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맥콩키(Bruce R. McConkie) 장로님의 임종 전에 비로 행하닌 그리스도의 젯세마네 동산에서의 고통과 구속의 사업에 대한 강한 간증을 듣고부터이다. 그 간증을 듣고 나도 울었으며, 나도 맥콩키 장로님과 같은 주님에 대한 강한 간증을 갖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도 맥콩키 장로님과 같은 열의와 신앙으로 열심히 경전을 탐구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신학연구원 과정을 끝냈고 많은 종교 과목을 청강해 왔었다.

나는 또 다시 브리감 영 대학교의 유명한 종교 교수들로부터 매 학기 신학 과정을 한 과목 택하여 '한국 신학연구원에서 가르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연구하기로 하였고, 또한 시험지와 그 밖의 필요한 자료를 모으고 학생 교재를 사서 열심히 경전과 교재를 빠짐없이 읽고 깊이 연구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나는 킴볼(Spencer w. Kimball) 예언자님과 같이 경전을 가까이하고 주님과 가까이하고 싶어서 열심히 연구했다.

 

10. 꿈 이야기

나에 대한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 경전을 열심히 탐구하고 성전을 열심히 방문하던 시기가 얼마간 지나고, 1985년 Ⅱ월 18일 저녁 나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나는 성전 가멘트만 입고 어떤 산등성이 꼭대기로 올라가는 자신을 발견하였고, 그곳에서 어떤 모임이 있다는 것도 곧 알게 되었다. 그 모임을 주관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꼭대기에 다다르자 그분은 미소를 지으시며 나를 반겨 주셨다. 나는 그분의 사랑과 나에 대한 신임을 뺏속 깊이 느꼈으며 그래서 기분이 참 좋았고 신이 났다. 나는 그 모임이 이스라엘 12지파에서 뽑힌 14만 4천의 모임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고 어떻게 뽑혔는가 하는 이상한 공식도 보았으며, 주님께서는 어떤 율법에 의해 그의 왕국을 다스린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모임이 끝나고, 하얀 옷을 입은 어떤 두 사람이 양 옆에서 나를 어깨동무하고 산등성이를 날아 어느 성전 입구에 데려다 주고 떠나갔다. 성전 안으로 날아들어가니 은경 엄마가 성전 옷장 앞에서 양복과 그 외 가방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렇게 여러 시간을 기다렸다고 생각되었고 그래서 짜증을 낼 것 같아 조마조마했으나 짜증내지 않고 내가 돌아와 반갑다는 모습으로 나를 반겨 주었고, 약 7m 떨어진 곳에 은경이와 다른 아이들이 옷을 단정히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깨어 보니 꿈이었고, 주님께서 미소하실 때 나를 사랑하고 신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마음이 흐뭇하고 영육이 기쁨으로 흡족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성전을 방문하여 그 꿈이 무슨 뜻인가 해의 영광 방에서 묵상하며 기도해 보았다. 주님께서 나를 준비시키시고 시키실 일이 있어서 그러한 꿈을 주신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할 수 있는가? 이제부터는 100% 정직해야겠고, 남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하고 성도답게 생활하여 주님의 사랑과 신임을 받도록 나 자신을 고쳐 가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밸라드(Melvin J. Ballard) 장로님이 말씀하신 "그때 느낀 감격을 느끼기 위하여 현재의 나 자신과 앞으로 되고 싶은 나 자신을 모두 바치겠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고 느낄 수가 였었다.

1986년 1월 2일은 내가 만 40세가 되는 생일이었다. 솔트레이크성전이 40년 걸려 완성되었고, 그 후부터 본격적으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내가 교회에 들어오게 된 동기도 솔트레이크성전이 거룩한 건물이라는 인상을 받아서였다. 솔트레이크성전이 40년 걸려 완성되어 주님의 사업을 위해 쓰여졌으니, 나 자신(성전)도 이제 40세가 되었으니 주님의 사업을 위해 쓰여져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솔트레이크성전에 가서 나의 자신을 주님 사업에 쓰이도록 바치겠다고 생일날 성전에 가려고 했으나, 솔트레이크성전이 문을 닫아 프로보성전에 가서 나의 자신을 주님의 왕국에 쓰이도록 바쳤다. "40세인 보잘것 없는 저를 바치오니 필요하시다면 주님 원하시는 대로 써 주옵소서." 주님께서 나의 헌납을 받아 주셨는지 확실히는 모르나 세 번 그렇게 기도했을 때 사양하시지는 않으신 것 같았다. 꿈을 꾼 날이 화요일이므로 매주 화요일마다 성전에 가서 그렇게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구했다.

 

1 1 . 한국교원대학교 교수생활

결국 축복사의 축복대로 한국에 돌아가 나의 꿈이었던 한국의 신학연구원에서 가르치기로 결론을 지었다. 그리하여 박병규 한국교육기구 대표께 신학연구원 교사 자리를 문의해 보니 현재로는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한국의 교육 혁신의 요람이 되고 교원 교육의 중추기관이 되도록 최근에 설립된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최충 할아버지의 모범을 본받아 열심히 가르쳐야겠다고 생각되어, 1986년 9월 초에 한국 교원대학교에 오게 되었다.

미국에 13년 사는 동안 '왜 내가 한국에 태어났0며, 나에 대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었다. 13년 살았던 에덴동산(미국)을 떠나고 또한 6년간이라는 세월을 학생으로서 또한 7년간 교수로서 배우고 가르쳤던 주님의 대학교(브리감 영 대학교)를 떠난다는 것은, 시집 가는 처녀의 마음이요 에덴동산을 떠나는 아담과 이브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그의 교회로 인도하셨고 교훈에 교훈을, 경험 위에 경험을, 시련에 시렷을 거듭하여 나를 연단하셨고 그의 신임과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

주님께서는 나를 미국으로 인도하셔서 나를 준비시키시고 훈련시켰으며 그의 왕국의 율법들을 더 잘 보고 느끼고 깨닫도록 도와주셨고, 그 위에 사랑과 신임을 꿈0.로 보여 주시고 그의 사랑하는 한국 땅 나의 조국으로 나의 가족을 보내셨다. 또한 교육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라고 축복하셨고, 나에게 목표를 주시고는 한국교원대학교로 인도하셨다. 한국의 교육의 장래를 위해 나에게 시키실 일이 있는 것 같다.

나는 희망이 있고 의로운 소망이 있다. 나의 남은 생애를 주님을 위해 그의 왕국에서 그의 재림을 준비하며, 그의 사랑하는 종이요 친구들인 그의 교회의 양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열심히 일하고 싶다. 복 천년의 한국의 교육부에서 일하도록 열심히 배우고 준비할 것이다. 그리하여 "착하고 충실한 내 종아, 잘했다."라는 말을 듣고 싶으며, 꿈에서 조금 느꼈던 그의 사랑과 신임을 계속 그리고 영원히 느끼고 받고 싶어 나의 결점과 성스럽지 못한 모든 것을 고치며 주님과 같은 성품을 닮아가도록 노력하겠다. 경전에서 읽을 수 있는 그의 모든 가르침이 사실이라는 것과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나와 같은 자라야 하느니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며 그 말의 가능성을 이제는 믿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먼 옛날 멀리 떨어진 유대 지방에 살았던 낯선 이국 사람이 아니요, 살아 계신 나의 위대한 친구요, 스승이요, 구속주이시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신임하며, 나도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따른다. (1993년)

 

허옥자(許玉子) 자매 : 스테이크 5대 초등협회장, 복대와드 상호부조회 장

나는 1947년 음력 7월 2일 충남 천원군 입장면 산정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대 인천스테이크장을 지낸 허채이고 어머니는 정순복이며, 2남(선회, 양회) 2녀(옥자, 범진) 중 장녀로 태어났다. 나는 돼지띠 중에서도 낮 12시, 돼지가 꿀꿀거릴 때 태어났다고 하여 나의 어머님께서는 항상 "너는 먹을 복을 타고났다." 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나의 아버님께서는 충남 천안군 북면 매송리에서 태어나시어 그곳에서 자라셨고 나중에 인천에 오시어 많은 고생을 하시었다. 후에 월미도 미군부대에서 사진기술을 배우시고 책임자로 오래 일하시어 많은 돈을 버시게 되었다. 나에게는 항상 새 옷과 깨 책이 있었고 모든 것이 풍족한 가운데 부모님의 듬뿐 어린 사랑을 받으며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어머님께서는 내가 의대에 가기를 원하셨지만 약대로 갔고, 약대 4학년에 다니던 1969년 3월 16일 고양이로 인해 우리 교회로 개종하게 되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68년 서울 덕성여자대학교 약학과 3학년에 다닐 때였다. 그 당시 나의 아버님께서 우리 가족 중 처음으로 인천 교회를 다니셨고, 여동생 옥선(범진)과 큰 남동생 선회도 다니게 되었다. 그 전에도 선교사님들은 나에게 교회에 대하여 얘기하려 했으나 나는 바쁘다면서 거절했었다.

1968년 3학년 겨울방학에 어떤 일이 생겼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고양이를 좋아했고 우리집 고양이와 정이 많이 들었다. 어느 날 우리집 고양이는 쥐약을 먹고 거의 죽어가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인생에 대해서 무상함을 느끼고 있었으며 회의에 빠진 때였다. 나는 고양이를 가축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하고 매일 울었다. 나는 하느님을 믿지도 않는데 속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고양이를 살려 주세요. 살려 주신다면 교회에도 나가겠습니다." 나의 눈은 너무 울어 퉁퉁 부었다.

결국 고양이는 죽었다. 나는 나의 외삼촌에게 같이 고양이를 묻으러 가자고 하였다. 외삼촌은 호미를 들고 나는 고양이를 예쁜 상자에 넣고 편지를 써서 안에 넣고 품속에 꼭 끼고 산으로 갔다. 외삼촌은 나의 진지하고 슬픈 모습에 같이 엄숙한 표정이었다. 고양이를 양지 바른 곳에 묻고 나서,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아쉬울 때만 거도하는 것이 합당한 방법이 아니지 않은가?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디에서 인간은 왔으며, 죽은 후에는 어디로 갈까? 흙으로 가는 것이 종말이라면 지금 사는 이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등등이었다.

나는 선교사님께 교회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했고, Winegar 장로와 장병훈 선교사와 같이 공부하기 사작했다. 정말 놀랍게도 나는 인생의 목적과 구원의 계획을 알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나는 드디어 1969년 3월 16일 서울 동부지부에서 장병훈 선교사님으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침례를 받고 나서 나는 교리와 성약을 읽고 더욱 더 우리 교회만이 유일한 참된 교회임을 알게 되었다. 1973년 인천에서 신학연구원(종교 교육원)에 다니면서 이호남, 서희철, 김차봉 교수님으로부터 공부하여 몰몬경과 성경에 대한 진리를 알고 감사했다.

1974년 3월 8일 미국 하와이로 갔고 3월 16일 하와이성전에서 귀환선교사 최수영 형제와 결혼했다. 하와이에서 은경과 성훈을 낳았다. 결혼 후 새벽 5시에 자전거를 타고 민속촌(Polynecian Cultural Center)에 가서 3시간씩 차 닦는 일을 하였고, 아이들을 키우며 열심히 살았다. 그때 같이 지냈던 브래쇼 형제님과 자매님, 이태문, 장병훈, 이도환, 허영환, 이종범, 박동환, 김동환. 허기욱 형제님 가족들과 박길자, 한미상 자매들과의 여러 생활과 바닷가에서의 아름다웠던 기억은 오늘도 나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되고 있다.

1977년 남편이 박사학위를 위해 유타주 프로보시로 이사 와서 BYU 학교 아파트에서 살며 경훈, 명훈을 낳았고, 그때 친정어머님께서 오시어 산바라지를 해주시었고, 아빠가 1981년 4월 교육공학박사를 받고 모교의 한국어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드디어 집을 사서 이사하게 되었고, 1984년 막내 미경을 낳았다.

1986년 9월, 우리 가족은 미국 생활 13년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어떤 분들은 애들 다섯을 데리고 한국에 가면 공부시키기 힘들다고 만류하기도 하였으나, 아빠를 좋아오게 되었다. 아빠가 한국 교원대학교 영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복대와드 감독으로 2년 봉사하고 3대 청주스테이크 회장으로 5년 8개월 봉사하는 동안, 나는 청주스테이크 초등협회 회장으로 3년 봉사하였다. 우리 스테이크 초등협회 회장단 임원들과 매달 와드대회 또는 지부대회를 하는 곳을 방문하여 교회모임에 참석하고 평가모임을 하고 같이 식사하며 지낸 그때가 나의 행복했던 교회에서의 전성기 시절이었던 것 같다.

우리 다섯 자녀는 그런 대로 한국 학교에 적응하려 노력하였고, 은경, 성훈, 경훈이가 영어웅변대회와 영어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였고 명훈인 컴퓨터를 잘하였고, 미경이는 막내로 언니 오빠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잘 자랐다. 은경이가 청주여고 1학년을 마치고 힘들어하여 LA Cerritos에 사는 이모집에 보내어 그곳에서 2, 3 학년을 다니고 졸업하였다. 그 뒤로 성훈, 경훈이가 차례로 미국 유타주 프로보에 가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성훈이는 화학을 잘하여 BYU 주최 경시대회에서 1등으로 두꺼운 화학책을 선물로 받았고, J13 때는 수학을 제일 잘하는 학생으로 뽑히어 신문에도 나고 프로보 고등학교 Sterling scholar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경훈이가 한국과 미국에서 적응하느라 힘들어했으나, 경훈이는 어려서부터 경전을 열심히 읽고 영성이 뛰어났다. 경훈이는 고3 때 선배가 주는 l,000달러 장학금을 받아 BYU에 갔다. I994년 12월 26일 아빠가 한미교육위원회(풀브라이트) 연구장학금을 받아 BYU에서 연구하게 되어, 명훈이와 미경이를 데리고 솔트레이크 공항에서 그리운 은경, 성훈, 경훈이를 만나 우리 온 가족이 오랜 만에 재회할 수 있었다.

2000년 12월 현재 큰딸 은경이는 BYU에서 광고학으로 졸업하고 지금은 LA의 제일 큰 광고회사에서 Media buyer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성훈이는 미국 뉴저지 모리스타운 선교부에서 2년 선교사업을 하고 귀환하여 BYU 한국클럽 학생회장으로 봉사하며 수학-물리 복수전공하며 2001년 8월 졸업 후 좋은 대학원 박사과정으로 들어가려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경훈이는 미국 플로리다 텔라하시선교부에서 2년 봉사하고 귀환하여 BYU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명훈이는 BYU에서 1년 학업을 한 후 뉴욕 남선교부에서 선교사로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귀환하면 BYU에서 화학공학을 계속 공부할 것이다. 막내 미경인 지금 Timpview 고등학교에 재학중인데, 재봉과 노래를 좋아하고 피부 관리에 신경 쓰고 옷에 관심 많은 우리집의 멋쟁이 아가씨이다. 나는 우리 형제와 테니스를 치며 건강관리를 하고 있고, 프로보에서는 김차봉 형제 자매, 이건철, 조덕권 부부들과 테니스도 열심히 치며 가까이 지낸다.

말일에 회복된 교회에서 나의 친정 식구 모두가 LA성전에서 가족인봉되었고, 나도 성약에 의해 태어난 우리의 보배 다섯 자녀들과 복음 가운데서 우리 형제와 살 수 있어 항상 기쁜 마음이다. 훌륭한 부모님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남편과 아이들과 계명을 지키며 의롭게 생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2000년 12월)

 


허옥자께 바치는 '사랑의 시'  (2000년 Ⅱ월, 복대와드 대제사 파티에서 낭송함)

 

허옥자 자매여!
그대는 선택된 냐의 영원한 동반자요 이스랴엘 가문의 훌륭한 어머니 입니다.
나는 그대의 밝은 미소와 성실한 마음을 사랑해 왔습니다.
성실하게 봉사하고 맡은 일에 책임감 있는 태도에 감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대를 미약한 아에게 인도했고, 나는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대를 나의 영원한 동반자요 우리 가족의 어머니로 택했습니다.
그대는 전세에서 하늘 부모의 사랑하는 딸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의롭고 금실이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 밝은 성격과 유덕한 품성을 많이 개발했습니다. 하늘의 부모와 지상의 부모는 그대를 사량하고 있습니다.
그대의 아름답고 너그러운 마음씨와 생황방식 때문에 그대는 많은 친구를 갖게 된 것이고 그들과 함께 기쁨을 갖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대는 소중하고 고귀한 이스라엘의 선텍된 여성입니다.
그대의 의로움으로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여 시온의 자녀가 되게 했습니다.
그대는 의로운 가운데 인도하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의 신권을 존중하고 남편과 자녀를 위해 기쁘게 봉사할 것이며, 자녀들을 의로움 가운데 키울 것이라는 것을 남편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아니하느니라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상고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밭을 간품하여 사며 그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심으며 힘으로 허리를 묶으며 그 팔을 강하게 하며 자기의 무역하는 것이 이로운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 그는 간곤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그 집 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그는 집 사람을 위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방석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 그 남편은 그 땅의 장로로 더불어 성문에 앉으며 사람의 아는 바가 되며 그는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고에게 맡기며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 (잠언 31 : 10-30)

그대는 현숙한 나의 나내입니다.
그대는 하늘 부모의 소중한 딸입니다.
그대는 허씨 가문의 소중한 딸입니다.
그대는 내가 믿고 따르며 존경하는 그리스도의 딸입니다.
그대는 우리의 소중한 재산인 다섯 자녀의 의로운 어머니입니다.
나는 그대를 나의 영원한 동반자요 우리 자녀의 의로운 어머니요 이스라엘 가문의 성스러운 선택된 귀부인으로 그대를 아끼고 사랑합니다.

 

최수영-허옥자(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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