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근옥 : 사회사업가. 평생을 고아 양육과 사회봉사활동에 바쳐옴(1920-2008.2, 만 88세, 2008년) 한국인 처음으로 미국 유타주 소재 브리감영대 총장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1965년부터 5년동안 송죽고아원 원장으로 재직했고 69년부터는 자신이 직접 '텐더 애플즈 홈'이라는 고아원을 설립, 20여년동안 운영했다.

브리감영대는 "국가와 지역사회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지난 10일 황씨에게 이 상을 수여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평양 사동에서 태어난 황씨는 세브란스 간호학교와 단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숭실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 브리감영대에서 2년간 사회사업을 공부했다. 귀국한 후 텐더애플즈 고아원 원장으로 일하던 그는 당시 고아원 소속 84명의 어린이 가운데 33명을 미국에 입양시켰다. 이들 중에는 지난 2000년 5월 한국 정부로부터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선정된 재미 변호사 지니 로비(브리감영대 법대 교수)씨도 포함돼 있다.(한국경제 2000.8.23, 세계일보 2000.8.26)

6세때 부친 사망, 6년간 고등학교 교편, 교사 교환 프로그램으로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에 공부, 여름에 버클리에서 일하던 중 BYU 한국인 학생을 만나 BYU로 초대, 1962년 6월 23일에 침례, 한국에 귀국 송죽고아원 창립, 2000년 8월 BYU에서 Presidential Citation<총장 특별공로상>을 받음)가 말일성도 미군인 스텐 브론슨(Stan Bronson)씨의 도움을 받아 창설한 이 재단은 고아와 가정을 잃은 소녀들을 위한 사업으로 범위가 확대되었다.

 


      황근옥 자매 약력

  • 1920 217일 평양에서 출생
  • 부친: 황찬순님(한의사)
  • 모친: 이정일님
  • 장녀: 황근옥, 차녀: 황명주(북한거주), 아들: 황성호(청주거주)

 

학력 및 경력

 

  • 승혜 소학교 졸업(평양)
  • 1940년 황해도 재룡 명신중학교 2학년 2학기 퇴학(신사참배 거부로)
  • 1942년 서울 정신여고 졸업
  • 1943 12월 세브란스 고등 간호대학(연희 간호학교) 졸업
  • 1945 89일 만주 신경의대 입학 예정(산파일 하면서 준비) 소련의 침공으로 마지막  열차로 북한으로 탈출
  • 1945 815일 북한 선천에서 해방 맞음, 강신명목사(전 숭실대총장)에게서 애국가 부르기와 태극기 그리는 법 배움.
  • 1945 825일 밤11시 급행열차 타고 월남.
  • 1946 3월 이화여대 의과대학 입학, 당시 총장 김활란, 사감 김옥길, 안창호선생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로 좌익 청년(MP)들에게 폭행당함. 한달 병원입원.
    김구선생 병원 위문 오심. 김대중 전 대통령 이희호여사(서울대)와 함께 활동.
    신탁통치 반대 운동으로 이화여대 퇴학.
  • 1946 5월 독립촉성여자 청년단 조직(단장 최이권고문, 박승호, 황신덕, 박순천, 황애덕)
  • 1947년 단국대학교(정치학과)입학, 학도 호국단 가입
  • 1950 625일 한국동란,
    서울에서 1개월 숨어 지내다 당진으로 피난 학도 의용군 지원, 여학생부장(서울에서 대구까지 후퇴) 도강증 없이 검문소 및 서울시내 및 전국을 다님.  군인들과 같이 생활함.
  • 1951년 대구 초등학교에서 단국대학 졸업
  • 1952 4월 숭실 중고등학교 교사로 7년 재직(학교재건에 힘씀)
  • 1958 BYU 유학(정치학과) BYU 한국유학생으로부터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 알게 됨. (유학추천자: 팔머 전 선교부장)
  • 1960 419일 미국에서 혁명 소식 들음.
  • 1961 5.16 혁명 소식 듣고 한미재단의 도움을 받아 3개월 항해로 미군 군함 고급실 타고 귀국
  • 1962년 민주공화당 창당 시 입당 중앙상임위원 서울 영락교회 다님.
    영락교회에서 타교회로
    개종 안 하기로 각서 쓰고 후기성도교회에서 선교사와 공부.
    처음에는 침례 받으라 권했으나 그 다음에는 계속 참석해도 침례 받으라고 말하지 않음.
    선명회(개신교)에서 운영하는 홍제동 소재 송죽보육원 원장 5년 어린이 84명과 같이 생활.
    이중 33명은 미국으로 입양 보냄. 이중에는 재미변호사 지니로비도 포함됨(김영삼 정부 시절 지니로비는 해외에서 한국을 빛낸 100인에 선정된 인물,
    BYU 법대교수)
  • 1965 623일 그랜트장로에게 침례 받음(서부지부 –.>충정와드 현 서대문와드)
    원장 근무 중 침례 받아 원장 직에서 퇴출됨.
    송죽보육원에서 자매님을 따라가기를 원하는 어린이 9명을 데리고 개인 집으로 이사
    서울역 근처 도동, 이곳에서 1973년 텐더 애플스합창단 조직하여 활동.
  • 1970년 범산 고등공민학교 설립 교장 취임(홍제동)
  • 1975년 정신여고 루이스장학회 총무로 봉사
  • 1977년 일문유치원 원장 취임. 5년 근무
  • 1980 614일 솔트레이크성전에서 개인 엔다우먼트 받음.
  • 1983년 동 종교교육원 졸업
  • 1992년 창동으로 이사. 도봉와드 참석(우리집 주인은 예수님 가훈 제작)
  • 1994 75일 세브란스 병원 시신 기증 유언서 작성
  • 1997년 동두천 이사(고향이 가장 가까운 교회가 있는 곳)
  • 1999 79일 북한주민 접촉 승인 받음(걸어서 북한 갈 계획 동생 황명주외 5)
  • 1999 8월 실로암 안과에서 안과수술
  • 2000 8월 브라운장로께 편지(동두천지부 토지구매 위해)
  • 2001 125일 동두천자택을 동두천 지부장을 통해 하나님께 헌납.
    (
    용도: 동두천지부 부부 선교사 숙소, 자매 선교사 숙소)
    교회봉사: 성전봉사자, 상호부조회 회장 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음.

 

사회 수상경력

 

  • 6.25 참전 용사상
  • 1991 47일 김영삼고문 추대 대학학도 의용동지회 회원(유일한 여성동지)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특별 초대됨(미참석)
  • 1995년 세계여성대회 한국대표로 참석(북경)
  • 2000 8 BYU 훌륭한 어머니 상 수상
    한국을 움직이는 500인 사회봉사상
    신문과 방송에 수 차례 기사화됨.

 

황근옥자매님의 개인 소망 : 동두천에 교회를 설립하는 것.

 

삶의 신조

 

1.       애국하며 살자.

2.       근검 절약하자.

3.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4.       태극기를 집에 항상 게양한다.

5.       어떤 일보다 가정방문을 제일 먼저 한다.

 

 



황근옥자매님 영결식
 

2010 220일 오전10동작와드에서 황근옥자매님의 영결식이 돌아가신 지 2년 만에

있었습니다. 시신을 세브란스병원에 후학을 위해 기증하셔서 마지막 봉사를 하신 후에 오늘에서야 화장을 모시고 영결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김종열장로님께서 추도사를 하셨는데 황근옥자매님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삶으로 평생을 사시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김장로님께서 여행을 하시다가 아주 아름다운 가을 단풍 숲을 보게 되셔서 가까이 가서 아름다운 잎새 하나를 채집하려고 했는데 찾기 힘드셨다고 합니다.그러면서 얻은 교훈은 아름다운 잎새 하나하나가 모여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음을 깨닫고 우리가 살면서

아름다운 숲을 이루도록 서로에게 봉사하며 사는 삶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매님께서는 6.25. 참전 용사상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천의 호국묘지에 오늘 오후 2시에 안장되셨습니다.

많은 이들은 그분이 60여년 동안 남을 위한 봉사로 사신 것을 몰랐었습니다.

우리들은 그분이 국가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의 삶을 사신 줄 몰랐었습니다.

우리들은 그분이 후학의 교육에 온 정열을 바쳐 희생하신 것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많은 이들의 어머니로 살다 가신 것을 몰랐습니다.

생애 마지막까지 교회에 봉사하시고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 헌납하고 가신

줄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시며 평생 그리스도의 모범으로 사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글: 이재갑 형제/하리카여행사/유타주관광한국사무소]


한국경제 (2000.8.20)
세계일보 (2000.8.26)
 여성조선 (2000.10)    


 


 

한국경제 2000년 8월 23일

'고아양육 공로' 美 브리감영대 총장상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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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고아 양육과 사회봉사활동에 바쳐온 황근옥(80)씨가 한국인 처음으로 미국 유타주 소재 브리감영대 총장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브리감영대는 "국가와 지역사회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지난 10일 황씨에게 이 상을 수여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평양사동에서 태어난 황씨는 세브란스 간호학교와 단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숭실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 브리감영대에서 2년간 사회사업을 공부했다. 귀국한 후 텐더애플즈 고아원 원장으로 일하던 그는 당시 고아원 소속 84명의 어린이 가운데 33명을 미국에 입양시켰다. 이들 중에는 지난 5월 우리 정부로부터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선정된 재미 변호사 지니 로비(브리감영대 법대 교수)씨도 포함돼 있다.

로비씨는 "원장님은 항상 저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계셨다"면서 "이 땅에 천사가 있다면 바로 황원장님일 겁니다"라고 말했다. 지금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황씨는 북한에 여동생 2명이 살고 있는 이산가족이기도 하다.
강동균 기자

 


항근옥 자매
브리감 영 대학교 총장 표창장 수상

  서울 동 스테이크 동두천 지부의 황근옥 자매(81세)가 지난 8월 10일 브리감 영 대학교 졸업식에서 총장 표창장을 수상했다. 이 상은 전 세계적으로 거룩한 인류애를 발휘하고 투철한 봉사를 실천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황 자매는 1965년 송죽고아원 원장으로, 이후 1969년부터는 텐더 애플즈 홈을 설립해서 운영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텐더 애플즈라는 합창단을 조직하여 돌보던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신앙을 심어주었다. 황 자매는 직접 돌보던 원아 중 33명을 미국인 가정에 입양시켜주었으며 이들 중에는 지난 5월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선정된 지니로비 자매(현재 브리감 영 대학교 법대 교수)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처치뉴스 8월 19일자에서는 황근옥 자매를 표지 모델로 싣고 황 자매의 수상 소식과 업적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아래 기사 참조) 처치뉴스에 한국인 성도가 표지 모델로 등장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또한 한국경제신문, 동아일보, 세계일보 등 국내 유력 일간지에서도 인물 동정란에 황근옥 자매의 수상소식을 전했다.

  황근옥 자매는 현재 동두천 지부에서 스테이크 선교사, 상호부조회 보좌, 성전봉사자로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브리감 영 대학교 베이트먼 총장의 소개로 황 자매                                                                                 가 청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리아호나 2000.10>


처치 뉴스 2000.8.19 표지 모델의
 황근옥 자매
 

일생을 통해 봉사의 모범을 보인
고아원 설립자

8월 14일 BYU 여름 졸업식장에서 위풍 당당한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수천 명의 졸업생은 황근옥 자매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녀가 졸업생을 위한 연설을 한 것은 아니다. 사실 그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터고난 겸손한 태도로 청중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고국 한국에서 그녀가 평생에 걸쳐 이룬 업적과 봉사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 없게 한다.

BYU는 현재 서울 근교에 살고 있는 황 자매에게 총장 표창장과 메달을 수여했고, 그녀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교육에 쏟은 공로와, 인류 복지 증진 및 어린이들의 삶가운데 복음 원리를 심어주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치하했다.

송죽고아원의 원장으로서, 후에는 텐더 애플즈 고아원의 설립자로서 황자매는 어린이 합창단을 구성하여 수십명의 어린이들에게 성취감과 소속감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이 어린이들을 어머니처럼 사랑했다. 그녀는 어린이들과 교회와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리아호나 2000.10>


평생을 고아를 위해 헌신 황근옥 자매
원내는 텐더 애플즈 합창단
(Ensign, 1993.10)

텐더애플즈와 뉴호라이즌 합창단


 

브리감 영 대학교 총장특별공로상
황근옥여사 수여

세계일보  2000-08-26  26면  (문화)
 

미국 브리감 영 대학교는 지난 10일 인류애를 발휘한 사람에게 주는 총장특별공로상을 한국 봉사활동가 황근옥(黃根玉.79.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여사에게 수여했다. 브리감 영 대학교는 유타주에 소재한 학교로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회(공식명칭: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가 재단이다.
황여사는 어린이들을 진심어린 사랑으로 돌보는데 평생을 바쳤다. 1965년부터 5년동안 송죽고아원 원장으로 재직했고 69년부터는 자신이 직접 '
텐더 애플즈 홈'이라는 고아원을 설립, 20여년동안 운영했다. 황여사는 어린이들을 돌보면서 아이들이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애써왔는데 소녀들로 구성된 합창단을 조직해 공연활동을 펴온 것도 이때문이다.
황여사가 돌본 아이들중에는 미국의 가정으로 입양된 아이들(84명)도 많은데 이 가운데에는 지난해 재외한국인에게 주는 '자랑스런 한국인'상을 받은 지니 로비(브리감 영대학교 법학과 교수)씨도 있다.


2000년 10월호

결혼도 마다하고 40년간
200명의고아 돌봐온
황근옥 할머니


“더 많은 사람 돕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합니다”


간호사, 교사, 정치학도, 학도의용대, 독립청년단, 합창단장…, 그리고 고아원장. 지난 8월 10일 미 브리감 영 대학교 총장으로부터 특별 공로상을 수여받은 황근옥 할머니의 간단한 이력이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다양한 활동을 한 단 하나의 이유. 1965년 송죽고아원 원장으로 재직해 지금까지 그녀의 손길이 닿은 아이들만 200여 명을 웃돈다. ‘봉사라면 무엇이든 불사한다’는 황근옥 할머니의 치열한 삶을 배우러 나섰다.



지난 8월 10일 미국 유타주에 있는 브리감 영 대학교(Brigham Young University) 강당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강단에 올라 청중들을 향해 다소곳이 인사를 올린 사람은 자그마한 체구의 한국 할머니, 올해 여든 줄에 접어든 황근옥 씨(80)다. 황씨가 브리감 영 대학교 총장으로부터 특별 공로상을 받는 자리였다. 이 상은 전세계적으로 거룩한 인류애와 봉사정신을 실천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것으로, 황근옥 씨가 한국인으로는 첫 수상자이다. 40년 동안 200여 명의 고아들을 거두고 가난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1965년 황근옥 씨가 처음 원장으로 재직한 곳은 송죽 고아원. 이사장의 권유로 맡게 된 것이 봉사하는 삶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자식처럼 돌보았다. 때마침 자선 활동을 위해 찾아온 미군, 스탠 브론슨 씨와 함께 황씨는 실로 대단한 일을 꾸며냈다. ‘텐더 애플즈(Tender Apples)’ 어린이 합창단 결성이 그것이다. 아이들의 활발한 활동이 곧 전국적으로 알려지자 KBS 방송 출연에 이어 주한 미대사와 한국 대통령까지 관심을 보였다. 곧 ‘텐더 애플즈’는 ‘대디 빅부츠(발이 커서 붙여진 브론슨 씨의 별명)와 송죽원 소녀들’이란 제목으로 앨범을 냈다.

송죽 고아원 원장에서 ‘텐더 애플즈 홈’으로

이들이 일구어낸 것은 단순한 합창단이 아니었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고아들에게 불어넣은 자신감이란 그 누구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이었다. 고아들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평을 받고 있는 황씨는 아직도 그때의 일이 꿈만 같다.

 


황근옥 할머니가 다니는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 게 해달라고 항상 기도한다.

 

“요즘도 가끔 그 음반을 들어요. 기념으로 한 장 갖고 있거든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비로소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아이들은 신이 나서 노래뿐 아니라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1969년 송죽원을 나와 ‘텐더 애플즈 홈’을 직접 설립한 황씨는 고아 사업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후원자도 모집하고 입양도 추진했다. 그 결과 함께 지내던 아이들 가운데 33명이 미국 가정에 입양되어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대부분 ‘텐더 애플즈’ 단원들로 지금은 30∼40대의 어엿한 성인이 되어 교사, 법관 등으로 사회 각계에서 한몫을 하고 있다. 이 중에는 지난 5월 한국 정부가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선정한 지니 로비 씨(브리감 영 대학교 법대 교수)도 포함되어 있다. “한 사람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가르쳐주신 분”이라며 “천사가 있다면 바로 그 분일 거예요”라고 말한 로비 씨 역시 고아들을 후원하며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의학 공부, 애국 학생 운동,
그리고 미국 유학에 젊음을 바치고…


황근옥 씨는 1920년 평양 사동 출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의사가 꿈이었다. 대를 이어 한의사를 하던 아버지를 여섯 살에 여의고 그녀는 일찌감치 의학도의 포부를 다졌다. 관심은 단 하나. ‘힘없고 가난한 한국인이 잘 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였다. 고향 마을 언덕에 살구나무를 심고 매일같이 그 아래서 기도를 했다. “아픈 사람을 도울 수 있는 힘을 제게 주소서….” 가난해서 약 한 번 못 지어보고 죽어가는 아이들도 불쌍했지만 ‘일본인도 아프면 나를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에, 황씨는 홀로 서울 유학을 단행했다.


함께 생활했던 아이들과 즐거웠던 한때를 황 할머니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이 아이는 미국에서 선생님을 하고, 애는 지금 법관이
되어 있고...' 사진을 보면서 흐믓해하는 황 할머니
 

그러나 일은 순조롭지 않았다. 세브란스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만주로 옮겨 신경 의과대학에 입학했지만 소련군의 폭격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때 황씨가 탄 것이 서울행 마지막 열차. 한 시간만 늦었어도 황씨는 지금쯤 평범한 할머니로 북에 살고 있을 것이었다. 황씨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품을 새도 없이 치열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학도 의용대로, 반탁 통치 운동가로 나섰는가 하면 ‘독립 촉성 여자 청년단’을 결성해 총무를 맡는 등 다양한 애국 활동을 펼쳤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애국한다면 목숨을 내놓아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또 힘을 키우려면 배워야 했지요. 남자들과 어깨를 겨루고 시대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단국대 정치학부에 들어갔습니다.”
황씨는 교사로 돈을 벌어가며 1·4후퇴 피난 중에도 학업을 계속했다. 마침내 교환학생으로 미국 유학의 기회가 주어졌고, 그때 만난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된 곳이 브리감 영 대학교였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사회사업을 공부한 것이 고아원을 운영하는 기반이 된 것이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봉사하는 데 쓰겠습니다”

황씨는 북에 두고 온 여동생 둘을 찾으러 이번 8·15 이산가족 방문 신청을 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탈락되어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는 황씨는 그러나 후회는 없다고 한다. 결혼은커녕 연애할 시간도 없이 80 평생을 남을 위해 바친 자의 여유로운 자신감일 것이다. 황근옥 씨는 앞으로 남은 인생도 봉사와 헌신에 아낌없이 투자할 계획이다.

“제가 한 일은 개미 한 마리가 한 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렇게 미미한 존재까지 찾아와 주시니…. 앞으로 얼마 안 남은 인생 다른 사람 돕는 데 바치라는 뜻으로 알고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글·유나니 기자(nani@chosun.com)|사진·허재성 기자



(이원강 형제) [자료:
LDS한인네트워크]

황근옥 자매님이 고령으로 2월 22일 돌아가셨는데요,
23일 밤 9시에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추도예배 모임이 있었으며,
서울동스테이크 의정부 와드에서는 오늘 24일 오후 6시 추모 모임을 갖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많은 고아들을 큰 사랑으로 보살펴온 황자매님은
시신은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장례식 대신에 추도 예배모임으로 갖게 됩니다.
틸 형제님(Eugene Powell Till, 204 E. 4635 N. Provo, Utah 84604, 801 602 3612) 의 추천으로 BYU에서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던 분이기도 하지요.
혹시 미국에서 별도의 모임을 할른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부고할 만큼의 친분이나 연고는 아니지만 워낙 유명하신 분에 대해 게시가 없기에 올립니다.)

그 분의 이력이 과거에 리아호나에 소개된 바 있습니다.(아래)

조금전에 서울 동스테이크 의정부와드에서 추도 예배모임이 있었습니다.
유품전시와 슬라이드 사진과 동영상 방영이 있었습니다.
같은 와드 안전옥 자매님, 조만구 서울선교부 회장님, 이우영 서울 동스테이크 회장님, 최윤환 장로님이 말씀하셨는데, 일화를 회고하며 고인의 숭고한 생애를 기렸습니다.

약력을 보면,
  • 1920년 2월 17일 평양 출생이시고,
  • 1945년 월남 이듬해 이화여대 의대 입학, 신탁통치 반대운동으로 퇴학,
  • 1946년 독립촉성여자청년단 조직,
  • 1947년 단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입학, 학도호국단 가입,
  • 1950년 한국동란시 학도의용군 지원하여 여학생부장으로 활동
  • 1952년 숭실중고등학교 교사로 7년 재직,
  • 1958년 BYU 정치학과 유학, 룸메이트로부터 교회 알게됨
  • 1961년 5.16 혁명소식듣고 귀국하여 민주공화당 중앙상무위원 역임
  • 1965.6.23 충정와드에서 그랜트 장로에게 침례받음
  • 1970년 범산고등공민학교 설립, 교장취임
  • 1977년부터 일문유치원 원장 취임(용두와드 내 소재 5년간 재직)
  • 은퇴후 창동을 거쳐 동두천에서 거주
  • 2008년 8월 22일 별세

수상경력으로는

  •  
  • 6.25 참전용사상,
  • BYU 훌륭한 어머니상,
  • 1995년 북경 세계여성대회 한국대표로 참석
  • 한국을 움직이는 500인 사회봉사상,
  • 신문과 방송에 수회 기사가 게재됨 

Liahona _ 1992 _ October

Whang Keun-Ok:
Caring for Korea's Children

By Shirleen Meek Saunders

Shirleen Meek Saunders, "Whang Keun-Ok: Caring for Korea's Children," Tambuli, Oct 1992, 32

Thirty frightened girls packed their meager belongings in their scarves and trudged through the streets of Seoul, South Korea, to the home of Whang Keun-Ok. The house wasn't really big enough to hold so many people, and the girls didn't know what life would hold outside the comparative security of the orphanage where they had grown up. But they wanted to follow the woman they loved and trusted like a mother. They also wanted to participate in the church her example had led them to: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The pilgrimage on that November night in 1969 marked the beginning of Sister Whang's Tender Apples Home_only one of the charitable projects which she considers her life's mission.

A Dream of Serving

Sister Whang's dream of serving began much earlier, when she was a young girl in Japanese-occupied Korea. A devout Presbyterian, Whang Keun-Ok worked on a farm by day, and by night prayed that she might be able to go to school so that she could work for God. She hoped to study medicine, because her people were dying from lack of proper health care. But because of the subordinate role women occupied in Korean society, this seemed an impossible goal.

In time, however, her prayers were answered. She was able to attend junior high school in Jeryung and in Seoul, working at the same time so she could pay her tuition. She studied hard and was an honor student. After graduation, she enrolled in nursing school.

But life was difficult in her country. Poverty was widespread, and the Korean people were not allowed to speak their own language or practice their cultural customs. Sister Whang herself was expelled from school for not worshipping the Japanese emperor. Because of such persecution, Whang Keun-Ok and several friends made an oath to dedicate their lives to making sure others wouldn't have to endure the same struggles. Later, after Korea won its independence, they converted that oath to caring for those who had suffered in the wars that ravaged Korea_particularly the children.

When the Allied Forces liberated Korea on 15 August 1945, Sister Whang remembers that "every creature, even trees and mountains, seemed to joy for the freedom that we had fought for for a long time." The joy didn't last long. The country was divided; Communists controlled the north part of Korea, and many people tried to escape to the south. Sister Whang got out of North Korea on the last train that left before the fence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went up. She has not seen her family since that day. She immediately began working in refugee camps, teaching the children and caring for those who were hungry and cold.

A Work of Mercy

"I prayed for my solemn mission," she says. "I knew I wanted to help as many poor people as possible, even though I didn't think I had the ability, skill, or power. In order to do that, I knew that I would have to sacrifice worldly possessions, and I knew that I must always fortify myself spiritually."

Sister Whang's work in the camps led her to change her career from nursing to teaching. But after six years, in November 1958, she decided that if she wanted to fulfill her goal to help the poor, she needed more education. Her minister encouraged her to apply for an exchange program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She was accepted. Taking the money she had saved from teaching and the promise of a paid sabbatical from her school, she enrolled.

Soon after she arrived in the U.S., Whang Keun-Ok met two Korean students from Brigham Young University who were working at Berkeley for the summer. They encouraged her to go to Provo, Utah. When she visited the BYU campus in the fall of 1959, she fell in love with the mountains and was impressed by the Latter-day Saints' faith. She spent the next three years there, studying social work. Shortly after she returned to Korea in June 1962, she located the missionaries and was baptized.

In 1965, Sister Whang was appointed superintendent of Song Jook Orphanage. Jini Roby, who lived in the orphanage from the time she was eleven until she was fourteen, remembers that Sister Whang "was always scurrying in and out, in and out. But she always had a smile. She knew all of our names and what we were doing, and she would ask about our specific situations."

Songs of Hope

Less than two years into Sister Whang's administration, Stan Bronson arrived on the scene. A native of Blanding, Utah, Stan was stationed at the 8th U.S. Army base in Seoul and wanted to spend his off-duty hours doing worthwhile projects. He decided helping children would be just the thing. When he inquired about orphanages in the area, Church members referred him to Sister Whang.

When Stan_who is six feet, four inches tall_first met Sister Whang, he was struck by her air of dignity and self-assurance. But he was even more impressed by how comfortable she made him feel. "She has a wonderful spirit about her," he says. "She's dedicated, sweet, polite_one of those people who you know are sincerely interested in you."

Stan told her he could play the guitar and that he would like to come and teach the children some songs. "I went out a few days later, all proud of myself and ready to lift their spirits," Stan remembers. "But Sister Whang said, 'Before you sing, Brother Bronson, the children have prepared something for you.' For the next half hour or so I listened to the most beautiful music_and I felt pretty small."

Stan organized the girls into a choir and taught them songs in addition to those they already knew. " 'Give,' Said the Little Stream" became one of their favorites, because Sister Whang and Stan taught them that they all had something they could share, no matter how small. Stan (whom the girls called Daddy Big Boots because of his large feet) and the girls began performing at U.S. military bases, and that autumn they recorded an album, Daddy Big Boots and the Song Jook Won Girls.

"The musical group lifted the kids so much," Stan recalls. "It took them from being considered surregi people_which means trash_and made them celebrities. They had a record album, they were singing on national television, and the U.S. ambassador and the South Korean president were making a fuss over them."

Sister Whang was eager to have the choir succeed; she hoped to use the money the girls earned from their appearances to build a school for them and for other poor children who couldn't pay tuition. Stan says she was "a public relations genius."

"For example, when the record was released, she told me that we were having a party at the high school to announce it. She said we were inviting President Park Chung Hee, the president of South Korea; U.S. Ambassador William J. Porter; and General Charles H. Bonesteel, the head of the United Nations command. 'How are you going to get guys like that to come?' I asked. She just laughed. 'Well, in President Park's invitation I told him that Ambassador Porter and General Bonesteel were invited. In General Bonesteel's, I said President Park and Ambassador Porter were invited. And in Ambassador Porter's, I told him the others had been invited.' The ambassador and his wife came, and so did the general's wife. President Park, who was out of town, sent a top aide."

In the meantime, the girls had learned that Stan was a Latter-day Saint. "Some of us had never heard of Mormons before, and some of us thought they were pagans," says Jini. "But the only thing that seemed weird about Stan was that he was so tall. One day we said to him, 'You're such a nice person. It's hard to believe you're Mormon.'

" 'Why?' he asked. 'Your superintendent is a Mormon.' "

Jini was translating for the group, and she remembers sitting there stunned as the other girls begged her to tell them what Stan had said. Since the orphanage was sponsored by another religion, Sister Whang had agreed not to discuss her beliefs. The girls had known she was Christian, but that was all.

From the animated reaction, Stan knew he had said something he shouldn't have. But it was too late. The girls started asking Sister Whang about her church. When the orphanage's sponsoring religion found out, authorities told Sister Whang she would either have to convert to their church or find a new job.

Tender Apples Home

It was then that Sister Whang decided to start an orphanage of her own_the Tender Apples Home. Those girls who were interested in the Church received permission to come and live with her.

Funding the orphanage was a constant challenge. Stan worked in the United States to raise money and find sponsors for the girls, and he says Sister Whang was constantly trying to find financial supporters. "She was good at opening people's hearts and getting them to believe in her work," he reports. "I think it was because she was so sincere."

Eugene Till, who served as president of the Korea Seoul Mission from 1974 to 1977, believes that Sister Whang's persistence also played a major role. "She would tell you what she needed, and she would accept nothing less than total fulfillment," he says. "She never took her eye off a goal until it was accomplished. You can understand that kind of determination when a person is going to gain something from her work. But when the results of Sister Whang's efforts came_clothing, money, food_she didn't keep any of it for herself."

Equally as important as supporting her girls temporally was giving them opportunities to feel the Spirit. Jessica Lyon Ohn spent three years in the Tender Apple Home, beginning in January 1975. She remembers that days started for the girls at 6:00 a.m.. with hymn singing, prayer, and scripture study. Sister Whang got up before the girls so she could pray and study the scriptures, then stoke the fires so the house would be warm when the girls woke up. Monday evenings were set aside for family home evening, and Sister Whang made sure the girls had money for bus fare so they could attend church each Sunday.

Sister Whang taught her girls to help spread the gospel. When President Till arrived in Korea in 1974, he learned from a survey that only 10 percent of the people in Seoul were aware of the name of the Church. During his three years as mission president, he and his missionaries concentrated on changing that. With Sister Whang's permission, President Till assigned several elders_who formed a singing group known as "New Horizon"_to work directly with the Tender Apples choir to put on a musical show that would introduce the people in Korea to the gospel.

The group became immensely popular. Through it all, President Till remembers, Sister Whang "taught the girls that they shouldn't be too proud of themselves, because they were just doing what they were supposed to do." At the end of three years, more than 70 percent of the people in Seoul recognized the Church's name.

One of Sister Whang's major goals was to place as many of her girls as possible with Latter-day Saint families. Of the eighty-four children she brought up over a period of nearly twenty years, thirty-three were adopted into Latter-day Saint homes in the United States. Twelve have married in the temple, and nine have served full-time missions.

Also of utmost importance to Sister Whang was that the girls learn responsibility and be treated as equals. They were each assigned chores around the home_preparing food, washing clothes, and cleaning_and they were each expected to use the home's resources wisely. Jessica remembers a time when one of the girls threw away a blouse that could have been repaired. When Sister Whang found it in the garbage, she lectured the girls on not wasting. Then, at the next home evening, she gave everyone a plastic sewing box full of needles and thread and taught them how to mend.

Still Caring about Her Girls

Even though the girls grew up and no longer live with her, Sister Whang cares about them still. Rosemarie Slover, former matron of the Seoul Korea Temple, says that when she and her husband, Robert, returned to Provo two years ago, Sister Whang asked them to check on her girls who lived in Utah, especially one who had just left Korea and would be homesick. Sister Whang corresponds with many of her girls, and her small, sparsely furnished room_she now rents the rest of her house in Seoul_is filled with pictures of them and their families.

And the girls feel a similar concern for their "mom." In October 1990, she went to the United States to escort several children who were being adopted by U.S. families. Many girls who had sung in the Tender Apples choir gathered from far and near to see her. President Till speaks of watching her greet her "children," with a broad smile on her face and tears in her eyes. As each woman arrived, often accompanied by a husband and children, Sister Whang would gather the group in a massive hug and hold on as if she would never let go.

"I've never seen Sister Whang show such emotion," remembers President Till. "It was especially touching when I thought of what might have happened to those girls without her. A couple of them probably wouldn't have survived. The rest of them probably would have ended up as servants or living on the street. Sister Whang truly provided physical salvation for those girls_and gave them the opportunity for spiritual salvation by introducing them to the gospel."

A Heart Big Enough for the World

But Sister Whang's selflessness extends beyond her girls to everyone she meets. "She has a heart big enough for the whole world," smiles Jini. "She can accept and love anybody." Jini saw this illustrated vividly three and a half years ago when Jini went to Korea to find her brother, from whom she had been separated twenty-eight years earlier. He was now an alcoholic, both mentally and physically ill. He had no home, no money, no job_nothing but the tattered clothes on his back. Jini was forced to place him in a government institution.

Since family members were required to provide patients' personal items, Jini called Sister Whang. Could Jini leave money and have Sister Whang phone the institution occasionally to see that her brother had the things he needed? Sister Whang promptly agreed. But instead of calling, she traveled to visit the man each week. By then she was the principal of a large preschool and kindergarten. But she regularly took nearly a whole day off work to bake him treats, ride the bus to the institution, then sit with him and hold his hand_even though he could give her little response.

"I couldn't believe she did that," says Jini. "She had never even met this guy. But she said, 'I look forward to it every week.' "

"If there ever was a ministering angel, she's one," says Stan Bronson. "I believe with all my heart that she was raised up by the Lord for these purposes."

Through it all, Sister Whang_one of Korea's gospel pioneers_has done all she can to help build God's kingdom on earth. She served for many years as district and stake Relief Society president, and she has been a temple worker since the Seoul temple opened in 1985. She asked to officiate two days each week instead of the normal one, reports Robert Slover, former temple president. Why? "She says it's the Lord's work," explains Suzette Marble, "and she would do anything for Him_and be happy to do it."

Sister Whang's example has changed the lives of all who know her. "She never talks about what she has done, but she just goes about her work in her own small, quiet way," observes Sister Slover.

"I think of her every day," says Jini, "and I use her as a role model. She has taught me that one person can make a difference."


<황근옥자매님의 추모식에서 발췌한 내용>

 

 고 황근옥 자매는 어떤 이에게는 대한민국을 지극히 사랑하는 애국지사로, 어떤 이에게는 갈 곳 없는 아이들의 사랑 많은 어머니로, 어떤 이에게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범을 보여준 참된 성도로, 어떤 이에게는 지팡이를 짚고 동두천에서 성전까지 부지런히 와서 함께 의식을 받던 선한 친구로 기억된다. 추모식에 모인 사람들은 이날 고 황근옥 자매와 함께한 추억과 그녀가 미친 선한 영향에 대해이야기하며 흐뭇하게 웃기도 하고 눈물을 머금기도 하고 송구한 마음에 고개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누룽지만 먹는 어머니

추모식에서 첫 번째로 말씀을 전한 김동례 자매는 1960년대에 송죽보육원에서 처음 황근옥 자매를 만났다고 한다. 황근옥 자매는 그곳에서 원장으로 재직했으며, 김동례 자매는 보육원 원아로서 황근옥 원장님을 잘 따르던 어린 소녀였다. 김동례 자매가 기억하는 황근옥 원장님, 그리고 어머니는 이렇다.

“늘 새벽밥을 지어서 아이들에게 아침식사 먹일 준비를 다 해내셨어요. 당시에는 따뜻한 쌀밥 먹기 어려운 시절이라 그게 더 귀했거든요. 황 자매님은 항상 따뜻하고 흰 쌀밥은 아이들을 먹이시고 본인은 남은 누룽지로 식사를 하셨어요. 제가 한번은 흰 밥을 드리려고 누룽지를 빼앗으려 했는데 어찌나 세게 버티셨는지, 절대 누룽지를 빼앗기지 않으셨어요.”

 텐더 애플스

송죽보육원에서 황근옥 자매가 보낸 시간은 5년 남짓이다. 황 자매가 1965년 6월 23일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보육원에서 해고되었기 때문이다. 이 보육원은 개신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이때 보육원 아이들 중 아홉 명은 황근옥 원장님을 따라가겠다며 함께 이사를 하게 된다. 이후 황 자매는 서울역 근처에서 집을 얻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우게 된다. 1973년, 황근옥 자매의 집에서 “텐더 애플스"라는 이름으로 고아원 어린이 합창단이 조직되었다.

 미군 사병 스텐 브란선(한국 명 배인선, 뉴질랜드 귀환 선교사) 형제가 기타로 합창 반주를 하고 노래를 좋아하는 교회 회원도 함께 노래를 했다고 한다. 텐더 애플스는 당시 서울 선교부 유진 피 틸 회장이 운영하는 뉴 호라이즌 중창단과 함께 전국 순회 공연을 하기도 했다.(KBS, 미8군부대, 극동방송, 진해부대, 교회 등)

 추모식에 연사로 선 서울 남 스테이크 허병석 회장은 “당시 텐더 애플스는 지금 소녀시대와 같은 사람들로서 우리 청남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죠.”하며 텐더 애플스를 소개하기도 했다.  

평생 조국을 사랑한 그녀

추모식 서두에 연단에 선 복지 선교사 송평종 장로는 황근옥 자매의 약력을 소개했는데, 제목은 “애국녀 황근옥”이었다. 이날 송 장로가 소개한 약력에 따르면 황근옥 자매는 1920년 2월에 평양에서 출생하여 일제강점기와 광복, 신탁통치 시절과 한국 전쟁, 대한민국 정부수립 및 민주화 과정 등 다사다난한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살아왔다. 1940년, 황해도 재룡 명신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일본 신사 참배 거부로 퇴학을 당하면서부터 황 자매의 역사적 참여는 시작된다. 세브란스 간호 대학을 졸업하고 의대 진학을 앞두었을 때 북한 선천에서 광복을 맞았고, 이후 월남하여 이화여대 의대에 입학했으며 김활란, 김옥길, 이희호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이 일로 퇴학을 당한 후에도 독립촉성여자 청년단을 조직하며 활동했고, 단국대학교 입학 후에는 학도 호국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가난한 조국에서 교육계에 몸담으며 가난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고 돌보는 데에 평생을 바친다. 김동례 자매는 황근옥 자매는 일상에서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했다고 회상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실 때에도 그 부지런한 분은 가만히 계시지 않았어요. 맨 손으로 담배꽁초를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시곤 하셨는데, 주변 젊은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피던 담배를 공손히 끄기도 했죠. 그리고 항상 쉬지 않고 일하시고 검소하게 생활하셨어요. 제가 시집갈 때 실크 블라우스를 하나 해드렸는데, 몇 십 년을 입으시면서 좋은 옷을 선물 받아도 간직해 두었다가 힘든 사람들에게 나눠 주셨어요. 폐품으로 재활용해서 이것저것 만들어서 쓰시고, 그렇게 만든 것을 나눠주기도 하시고 했죠. 늘 나라를 위해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시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셨어요.”  

꺼지지 않는 신앙의 불빛

고 황근옥 자매의 생활 신조 중 하나는 “어떤 일보다 가정 방문을 제일 먼저 한다.”였다. 60년대에 침례를 받은 이후 늘 한결 같이 복음 생활을 해온 황 자매를 허병석 회장은 “한국 교회에 큰 교훈이 되신 분입니다. 말씀보다는 자신의 일생으로 큰 영향을 미치셨죠. 이에 대해 이견을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고 소개했다. 김동례 자매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에 대한 고인의 모범을 보고 자라왔다고 간증했다. “어쩌다 새벽에 잠이 깨서 보면 항상황 자매님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어요. 새벽 시간에 일어나셔서 혼자 경전을 연구하시고 영어 공부도 하셨어요. 그리고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는 항상 모든 아이들과 함께 경전을 읽고 기도를 하셨죠. 그분은 정말 산상수훈에 나오는 팔복 말씀대로 훌륭한 삶을 사셨어요. 한번은 친부모조차 포기한 병든 아이를 데려오신 적이 있는데, 정성껏 간호해서 결국 건강하게 키워 내셨죠.”

세월은 흘러 황근옥 자매의 몸은 연로하게 되었지만, 신앙만은 변함이 없었다. 최근까지도 지팡이를 짚고 동두천에서 신촌에 있는 성전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성전 봉사를 오면서도 의식 시간에 늦지 않게 잘 준비해서 참석했으며 손뜨개로 만든 숄을 성전에 기증하기도 했다.  

가난하고도 풍성한 삶

황근옥 자매의 추모식이 사망한 지 2년 만에 열린 이유는 황 자매가 생전에 세브란스 병원에 의학 발전을 위해 시신을 기증하겠다고 유언서를 남겼기 때문이다. 2년 동안 의학 연구에 쓰이던 황 자매의 시신은 이제 화장되어 작은 유골함에 담겨서 친구들 품에 돌아왔다. 허병석 회장은 “경제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신 분이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돕고 마치 부모처럼 돌보신 분입니다. 아픈 몸으로 돌아가셨지만 그게 그분께는 고난이나 고통으로만 설명되지는 않은 듯합니다. 자신의 불편함과 슬픔보다 사랑하는 주변 사람과 그리스도를 위해 슬픔을 겪으셨습니다. 지금 그분이 평안하게 잘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하고 말했다.

허 회장은 요한계시록 21장 3~4절을 나누며 황 자매의 지금 모습을 그려보았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자료제공: 박승호 형제]


1960년대 촬영된 뉴 호라이즌( New Horizon)과 텐더 애플스(Tender Apples)의 노래

동영상의 영어 솔로는 미군 사병 스텐 브란선(한국 명 배인선) 형제 입니다.

1960년대에 촬영되었지만 잘 보관되어 영상이 아직도 깨끗합니다. 매우 귀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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