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명원(圓明園)
Yuanminguan Park

원명원은 북경서교 해전구 동부에 위치하고 "品" 자의 거꾸로 놓인 모양으로 지어졌다. 원명원은 원명, 장춘, 이춘 3개원으로 조성되였는데 총 면적은 350헥타르에 달하며 건축면적은 고궁만큼 크며 수역 면적만 하더라고 이화원의 면적과 같다.

원명원은 당시 강남의 풍경을 대표하였으며 중국고대화원 예술의 정화이다. 원명원의 남부는 역대황제가 정사를 보던 곳이며 기타 구역에 분포된 경구만 하더라고 40여개되며 그중 50여개 경관은 중국 전지역의 명승지를 본받아 설계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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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서호 10경처럼 이름까지 그대로 받아온것이다. 더욱 신기한것은 원명원중에 서양식공원 풍경까지 있는것이다.

그중 제일 유명한 것은 "관수법"이라고 하는 서양식 분수, 미궁, 양옥은 전부 이태리 르네상스시기의 품격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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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중에는 베네치아 도시 모형이 있는데 만리밖에서도 아름다운 수상도시 베네치아를 구경할 수 있는것 같이 지어져있다.

원명원은 명인의 글과 그림, 서적, 의기, 금 은 보석 등 고대문화물이 보존되여 있으며 기이한 나무와 진귀한 나무가 백만여그루 있다. 참으로 볼만하고 감상할만 한 곳이 많다.

현재 원명원은 1860년 영국의 약탈 및 1900년 프랑스의 방화등으로 그 잔해만 남아있다. 중국정부는 원명원의 잔해를 그대로 후손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파괴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 안내소에는 철저하게 파괴된
경위를 상세하게 안내하고 있다.  

 

원명원[圓明園, Yuan-ming Yuan]


(병)Yuanming Yuan (웨)Yüanming Yüan.

중국 청대(淸代) 황실의 정원.

 

베이징[北京] 서쪽 교외의 이허위안[和園]동쪽에 있다.
본래는 1709년 강희제(康熙帝)가 넷째 아들 윤진(胤)에게 지어준 별장이었으나 윤진이 옹정제(雍正帝)로 즉위한 후 1725년 황궁의 정원으로 조성했다.
건륭제(乾隆帝)는 원명원을 크게 확장하여 동쪽에 장춘원(長春園)과 기춘원(綺春園)을 신축했다. 기춘원은 나중에 만춘원(萬春園)으로 이름을 고쳤다.

원명원이라고 하면 보통 원명·장춘·기춘의 3원 전부를 가리킨다. 1709~1860년 청나라 황제는 1년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기거하며 정무를 보았다. 3원은 호수가 밀집되어 있는 평지에 건립되었다.
면적은 320㏊이며 그중 수면이 35%를 차지한다. 원명원 앞쪽 중앙 축선상에 있던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과 뒤쪽의 구주(九州)·청연(淸宴) 두 건물이 궁전과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크고 작은 건물 100개는 모두 호숫가 섬들의 조경 풍치림에 건립한 것이다.

3원 중 원명원은 뒤쪽에 있는데, 호수 주위에 있는 9개의 섬 위에 조성해 배치했고, 구주·청연과 같은 9동의 부속건물이 딸려 있다. 또 호수 푸하이[福海]에 있는 10개의 섬 위에는 많은 누대와 헌관(軒館)을 여기저기 배열했으며, 호수 한복판에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의 세 섬을 상징하는 작은 섬 3개를 조성했는데, 이곳은 3원 중 경물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이다. 기춘원은 작은 정원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장춘원은 비교적 넓고 중앙의 큰 섬에 세워진 순화헌(淳化軒)이 주요건물이다.

3원은 150년 동안 사용되었다. 정원의 각 풍경과 건물은 천하의 이름난 정원들과 역대 황제의 정원을 모방해 만든 것이다. 궁정에서 중시하는 온화하고 점잖으면서도 화려한 풍격에 따라 건립했으며, 청대 조경 풍치림 예술의 최고 수준을 반영한다. 또 장춘원 북쪽에는 프랑스 로코코 양식을 본뜬 '서양루'(西洋樓)가 있었는데, 유명한 화가 낭세녕(郎世寧)이 설계한 것으로 유럽식 건축의 중국화를 구현한 건물이었다.
3원은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탔고, 지금은 옛 터도 대부분 없어진 채 '서양루'의 잔해만 남아 있다.



폐허의 원명원

북경의 황실 유적에서 보았던 금빛 기와의 거대한 건물 대신에 잡초 사이로 난 소롯길이 낮은 언덕을 볼 수 있다. 몇몇 노인이 낚시대를 드리운 호수에는 파란 하늘이 시린 모습으로 잠겨 있고 길가의 잡초는 노랗게 퇴색한 모습으로 늦가을의 여린 햇살 아래 한가로울 대로 한가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떠들썩한 북경 시내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다. 가끔씩 자전거를 탄 사람이 옆을 지나갈 뿐 싫지 않은 조용함을 만끽하는 곳이다.

한 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되어 버린 어떤 곳에 가면 누구나 조금쯤은 감상적이 된다. 퇴락한 빈집이나 운동장에 가득 잡초가 돋아난 시골 폐교의 깨진 유리창, 아니면 답사 여행때 만나게 되는 텅 빈 폐사지 - 금빛 불상도 화려한 단청도 웅장한 대웅전도 없이 그저 세월의 이끼가 낀 돌탑만이 무심히 서있는 옛 절터에 서면 우리는 문득 무언가 잔잔히 가슴을 저며오는 스산한 기분에 젖게 된다. 원명원의 주요 건물이 집중되어 있었다는 장춘원(長春園)은 폐허가 되어있다.

청의 건륭제가 외국인 선교사에게 명하여 베르사이유 궁전과 비슷하게 짓도록 했다는 해안당(海晏堂)이 있었는데 1860년 영.불 연합군의 공격으로 철저히 파괴되어 버리고 지금은 깨진 석재만 뒹굴고 있다. 그 곳에는 소풍나온 초등학생들이 잔뜩 몰려와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소풍도 우리와 다른 것이 없다. 싸온 음식을 먹고 사진을 찍고 쉴 사이없이 재잘거리고. 나는 어디서건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유쾌한 기분으로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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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된 석재 사이를 돌아보며 이 곳을 파괴한 서양인의 무지함을 생각하면서 관관객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 때 그들은 그들의 힘을 꼭 이런 식으로 과시해야만 했을까?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중국도 자신들의 화려했던 옛문화를 과시하기 위해 허물어진 유적 복원에 정성을 쏟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곳은 서양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증거하는 유물로 복원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지금 해맑은 목소리로 달음질치는 저 아이들에게 불과 100년 전에 있었던 인간의 탐욕스런 침략의 역사를 알게 해야할까.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라'는 말과 함께.
원명원 안에는 밀랍으로 당시의 연합군에 의한 파괴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다. 역사적인 현장을 대대로 중국인 후손에게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원명원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세차게 일고 있다.

원명원 40경

원명원 내 40곳의 경관을 말한다. 완전한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1. 正大光明
2. 勤政집賢

 

지난 날 웅장하고 화려하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던 황실원림이 폐허와 일부 석제품, 예를들면 서양루의 대량 조각석재. 대수법흔적들만 유물로 남아있다.

중국이 창립된 후 수십년의 정리와 보수작업을 거쳐 현재는 원명원 유적공원으로 개발되었다. 이미 10여 군데의 경관 유적이 보수. 정리되고 산세와 수계도 대체로 원래의 풍모를 회복되었으나 아직도 폐허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관람할 수 있는 경관으로는 서양루. 대수법. 원영관. 향비루. 복해 등이 있다.

개방시간은 하계에는 07:00~19:00이고, 동계에는 07:30~17:30까지 이다.

입장료는 10원이고 유적은 15원이다.

교통편은 331. 333. 365. 375(지선). 716. 717. 801. 810. 814. 951 이화원 전용버스.
운통 104. 105. 특6 등 버스를 타고 원명원에서 하차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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