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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성공적인 세계 선교

(글: 신호범 / 이상태)
 

 

 1. 전세계를 향한 선교

 

 2. 선교사업의 조직과 운영

 

 3. 꾸준히 발전하는 유럽 선교

 

 4. 아시아에서의 특기할 성공

 

 5.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기적

 

 6. 선교의 신대륙 아프리카

 

 7. 동구권과 러시아에 진출

 

 8. 미래의 거대한 선교지역 중국을 준비

 

 9. 유태인과 이슬람과도 가까이



 

 


1. 전세계를 향한 선교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는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막강한 선교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선교사업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 선교사업은 그들을 상징하는 것이며 오늘날 각 나라에서 나온 4만6천명(2002년 현재 6만여명,한국에는 500여명)의 선교사들이 세계 1백46개국과 미국의 50개주를 누비고 있다.

 

제1장에서도 기술한 바와 같이 교회는 최근 20여년 동안에 지역 교회를 탈피하여 바야흐로 세계적인 교회가 되었으며 세계의 어느 구석에도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 결과 이제는 미국과 캐나다와 멕시코를 포함하는 북미대륙과 서부유럽의 몇나라를 중심으로 하던 교회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지중해 연안의 남부 유럽과 북부 아프리카 그리고 인근의 아랍제국 일부, 그리고 아프리카의 전역,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동남아 여러나라와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 홍콩을 거쳐 대만, 한국과 일본, 그리고 필리핀을 중심으로 산재한 태평양의 많은 섬들,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인근 남태평양의 크고 작은 많은 섬들, 북으로 알래스카 일대와 남으로 중미 그리고 남미 전역,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포함한 북부유럽과 그린랜드, 최근 개방된 중부 및 동부유럽의 모든 나라와 러시아 등에까지 선교의 힘을 뻗쳐 “전세계의 모든 백성이 이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계시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선교사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것은 젊은 선교사와 부부 선교사와 일반회원들이다. 젊은 선교사들은 대개 19세에서 20세 사이의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거나 대학교 1학년 또는 2학년 연령의 젊은이들이다. 이들 젊은이들은 선교사로 나가도록 교회로부터 부름을 받는다. 그러나 부름에 응하는 것은 스스로 결정한다.

 

이들은 전도임무를 띠고 세사에 파송되었던 그리스도 당시의 칠십인들과 마찬가지로 둘씩 짝지어 여행하며 하루 16시간씩 1주일에 엿새를 전파한다. 이들의 규율은 매우 엄격해서 데이트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를 보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며 심지어 자기 고향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일조차 자제한다.

 

신앙이 좋은 젊은이들은 선교사로 부름받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대학교육이나 직장 구하는 것을 미루고 결혼도 연기한 채 2년간 선교사로 봉사한다. 선교사로 활동하는 모든 비용은 자기가 저축한 것으로 부담하거나 부모가 부담하는데 월 3백50달러 정도가 평균적인 비용이다. 따라서 전세계적으로 선교사가 쓰는 비용은 연간 약 1억6천만 달러 규모가 된다. 이들은 젊은이로서의 충동이 가장 큰 나이에 그것을 제어하는 능력을 키우고 남에게 봉사하고 희생하는 바른 가치관을 배우게 된다.

 

이렇게 많은 미혼의 젊은이들이 선교사로서 세계 각지에서 일하지만 탈선을 했다거나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계에 의하면 선교사를 마치고 귀환한 젊은이의 97%는 십일조를 완전하게 바치고 교회의 높은 도덕적인 표준을 지키며, 95%는 성전결혼을 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미국의 젊은이들이 선교사업을 담당했으나 오늘날에는 세계 각국에 있는 교회의 많은 젊은이들도 선교사로 떠난다.

중남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의 60%는 같은 라틴 아메리카 출신 젊은이들이며 필리핀에서는 선교사의 75%가 현지인들이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 8백명 중 25%는 한국인이며, 한국인 선교사 중에는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태평양 제도에 나가서 전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이들 젊은이들은 선교사로서의 희생과 봉사를 통해 세계적인 안목과 시야를 갖게 된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은퇴한 부부들도 선교사업에 참여하고 있는데 그 수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현재로 약 3천쌍의 은퇴한 부부들이 세계 각지에서 선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이들은 많은 교육을 받고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으며 직장경험을 통해 좋은 인간관계와 지도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매우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후기성도의 선교사업은 놀랄 만한 크기와 조직과 열성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 선교사의 숫자는 미국에서는 다른 교회의 모든 선교사를 합친 것보다도 훨신 많다. 미국 개신교 최대의 교파인 남침례교 총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는 신자수 1천4백90만명에 대하여 3천8백명의 유급 선교사를 확보하고 있는데 이것은 몰몬교회의 무급 선교사 군단의 10분의 1에 미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는 일반회원들도 전도사업에 열심히다. 모든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이웃에게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하도록 권고받고 있으며 좋은 모범을 보이려고 애쓰고 이웃을 돕는 일에 열성적이다.

 

교회의 성장은 이와 같이 비공식적인 회원가정 선교사업(Home Mission Program)과 공식적인 선교사업이 어우러져 이뤄진다. 후기성도들은 대단히 정직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하며 무섭게 부지런히 일하면서 높은 교육을 받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능력 있고 영향력 있는 신자들이 매우 많다.

 

이러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친구와 친척과 동료와 이웃에게 교회를 소개하고 선교사들은 그들을 가르친다. 교회의 대부분의 활동은 가족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특히 개종자가 어른일 경우에는 대개 자기 배우자와 자녀들을 교회로 데리고 나오게 된다. 이와 같은 회원가정에 의한 선교사업은 성공률이 매우 높다.


이 교회에는 바울 사도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전설적인 선교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 중 한사람만 예를 들어보자. 1810년 웨일스 지방의 플린셔(Flinshire)에서 태어난 댄 존스(Dan Jones)는 1840년에 미국으로 이민갔는데 1843년에 몰몬으로 개종했다. 그는 순교 직전의 조셉 스미스와 함께 하였는데 조셉 스미스는 그를 보고 생애의 마지막 예언을 남겼다. “그대는 웨일스에 다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선교사업의 사명이 부여되어 생을 마치기 전 그것을 완전히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날 그는 폭도들의 총탄이 빗발치는데도 불구하고 카테이지 감옥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몇 달 후 과연 그는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부인과 함께 웨일스로 떠났다. 몇사람의 선교사와 함게 일하면서 그는 1845년에서 1848년까지 불과 3년 동안에 무려 3천6백명의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이 숫자는 당시 웨일스 사람을 2백78명에 1명꼴로 개종시킨 것이었다. 성공이 커짐에 따라 반대자들은 신문과 출판물을 총동원하여 공격해 왔으나 그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자신의 출판물을 통해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의 출판물은 영어 이외의 언어로 된 최초의 간행물이었다.

 

그는 아주 대담한 전도방법을 썼다. 그는 한 마을에 전도하러 갈 때는 몇주 전부터 자기가 온 마을을 개종시키기 위해 간다는 광고를 했다. 그는 시장과 시의회와 성직자들과 경찰에 자기의 뜻을 알렸다. 그는 그 마을에 사는 교회성도들로 하여금 수천장의 전단을 만들게 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가 기착역에 도착할 때는 그 도시의 많은 공직자들과 신이 난 수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대중적 주의를 끌면서 시민들로 하여금 몰몬의 복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그가 개종시킨 많은 사람들은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귀국하는 길에 2백49명의 개종자들과 함께 배로, 다음에는 마차로 유타까지 여행했는데 여행기간은 무려 8개월이 걸렸다.

 

도중에 전체의 5분의 1이 넘는 67명이 콜레라에 걸려서, 아니면 추위와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다. 유타에 돌아와서 그는 맨타이(Manti)시의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1년후 그는 다시금 고향 웨일스에 가서 전도하도록 선교사의 부름을 받았다. 아무런 주저함 없이 1852년에 그는 웨일스로 출발하였다. 포장마차를 타고 솔트 레이크 시티의 동쪽 128Km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는 동쪽에서 오는 대규모의 웨일스 이주민을 만났다. 바로 몇 년 전에 자기가 개종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는 가난한 고향 사람들을 부탁하는 간곡한 편지를 교회지도자에게 썼다.


“존경하는 헌터 감독님, 많은 우리 고향 사람들이 그리로 갑니다. 저는 이 사람들의 정확한 재정상태를 모릅니다. 돈도 별로 없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들을 돌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도와 주신다면 맨타이에 다시 돌아와 모두 갚겠습니다.”


웨일스로 다시 돌아와서 그는 다시금 모든 정력을 전도활동에 쏟았다. 2년간에 걸친 두 번째 선교사업에서 그는 2천명을 개종시켰다.

 


2. 선교사업의 조직과 운영             

 


이같은 성공적인 선교활동은 선교제도 자체가 교회의 다른 모든 운영방법과 마찬가지로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를 통하여 주어지는 계시에 근거하여 영감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라고 후기성도들은 주장한다.

 

예수께서 지상에 오셔서 십이사도를 뽑고 그들의 주된 임무를 ‘사람을 모으는’ 일이라고 강조하시고 선교활동을 직접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관장하도록 하였고 두사람씩 짝을 지어 오직 복음 진리만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게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선교사 제도는 이같은 그리스도 당시의 선교제도와 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선교사업을 수행하는 조직과 그 역할에 대해 살펴보자


square11_bronze.gif 십이사도 정원회

제일회장단 회장과 두명의 회장으로 구성된 제일회장단 아래에 있는 십이사도 정원회가 선교사업 위원회를 구성하여 전세계의 선교사업을 총괄한다. 이 정원회는 전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소임을 맡고 있으며 세상에 나아가 예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임무를 맡은 최고의 의결 및 집행기구인 것이다.


square11_bronze.gif 칠십인 정원회

선교사업 위원회는 칠십인들로 구성된 칠십인 정원회의 도움을 받아 선교 임무를 수행하는데, 이 칠십인들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3백개 가까운 선교부를 분할 관장하며 선교사업 위원회의 지시를 받아 체계적으로 선교조직을 움직여 간다.


square11_bronze.gif 선교사업 관리국

선교사업 위원회와 칠십인 정원회 아래에는 선교사업 관리국이 있으며 여기에서 세계의 모든 선교사를 직접 지명하고 선교사업의 방향, 훈련, 프로그램 기획, 자원의 제공 그리고 필요한 행정을 뒷받침한다.


square11_bronze.gif 선교부장

선교부 회장은 교회 제이회장단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으며 통상적으로 3년을 임기로 하고 있다. 선교부 회장은 부인과 함께 이 소임에  부름을 받으며, 가족과 함께 임지에 거주하면서 1백20명 내지 1백50여명의 선교사들을 직접 관리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개척선교부가 있는데 이러한 선교부에서는 훨씬 적은 수의 선교사를 관할한다. 아직 교회 조직이 완성되지 않은 지역의 선교부에서는 선교부 회장이 선교사의 관할과 함께 그 지역의 교회 회원과 교회활동에 대한 모든 책임도 함께 진다. 이러한 선교부 조직이 <도표 2-1>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93년 10월 현재 전세계에 2백95개가 있다.

 

선교부 회장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선교사 한사람 한사람을 정기적으로 면담하며, 개인적인 문제와 가족의 문제, 장래 진로문제, 선교 동반자간의 문제 등등을 파악하고 의논하며 격려하며 선교활동을 잘 할 수 있게 보살핀다. 이같은 일은 선교부 회장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선교사 중에서 두 보좌를 선정하여 긴밀히 의논하면서 선교사를 지도하고 격려한다.

 

이들 선교사들은 대부분 미혼의 젊은이들이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선교부장의 책임은 크다. 그래서 선교부장을 위한 교육훈련이 1년에 네 번 있으며 또 정기적으로 선교부장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같은 행사는 대관장단의 주관하에 십이사도 선교사업 위원회와 칠십인 정원회가 담당하는데 질적으로 대단히 우수하다.

 

 


(1994.1 현재)

 


square11_bronze.gif 선교사

선교사는 국내에서 봉사하거나 외국으로 파송되는 두가지 경우가 있는데 봉사기간은 2년이다. 젊은 선교사들은 모두 건강한 몸과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임지에 도착하여 선교에 전념하고 선교를 마치고 난 후에는 곧 이전의 직장이나 대학으로 복귀하여 하던 일과 공부를 계속한다.

 

정상적인 후기성도 젊은이들은 이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어 일생의 한단계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같은 관례를 벗어나 선교사로 나가지 않는 젊은이가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이다. 미혼의 여자들도 같으나 여자는 21세가 되어야 선교사로 나갈 수 있으며 기간은 1년 6개월이다. 1990년 1년 동안만 보아도 <도표 2-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약2만6천명의 선교사가 부름을 받았는데 그들의 헌신적인 선교사업은 스펜서 다블류 킴볼(Spencer W. Kimball) 회장의 표현대로 ‘교회의 생명의 피’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세계 전체에 흩어져 있는 4만6천여명의 젊은 선교사들이 둘씩 짝을 지어 성경몰몬경을 손에 들고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은 후기성도들에게는 가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는 바로 복음을 전세계의 구석구석에 전파하여 회원수를 무섭게 증가시킨 원동력인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이 선교기간 동안 겪은 수많은 경험은 이들을 올바르게 성장케 하며 새로운 언어와 문화에 대한 남다른 이해를 가지고 학교와 직장에 돌아가게 하여 보다 훌륭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이들은 또한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책임을 맡아 유능하게 일하게 되므로 교회는 계속하여 젊은 일꾼으로 채워지고 활력있게 발전이 이루어진다. 이같은 전통은 그 어느 문화권이나 종교권의 전통보다 건전하고 희망적인 교회의 자랑스런 한 면을 이룬다.



                              <도표 2-2> 연도별 선교사 부름
 

연 도

1년중 부름받은 선교사

1940

1,194

1950

3,015

1960

4,706

1970

7,590

1980

16,660

1990

26,438

자료: Deseret News 1993-1994 Church Almanac P.399-400.
 

이들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부름을 받으면 대권장이 직접 서명한 친서를 보낸다. 이 친서는 후기성도 젊은이의 귀중한 가보가 된다. 교회에서 경건한 송별 모임을 마치면 이들 젊은이는 집을 떠나 선교사 훈련원에 입소한다. 자국에 배치되는 선교사는 그 훈련이 2주 정도이나 외국에 보내지는 선교사는 2개월여를 머물면서 파송될 나라의 언어를 집중적으로 배우고 문화와 풍습도  공부한다. 선교사 훈련기간에는 선교방법을 비롯하여 새로운 언어와 습관을 익혀야 하기 때문에 어렵고 힘이 드나 이상이 같은 젊은 친구들을 만나 친교를 가질 수 있는 기간이므로 즐겁기도 하다.


square11_bronze.gif 선교사의 일과

새 선교사가 임지에 도착하면 선교부장이 이들을 직접 영접하고 선임 동반자를 정하여 특정한 교회에 배치한다. 이로부터 두 선교사는 짜여진 매일의 일과를 시작하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면 두시간 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언어를 익힌다. 식사를 마친 후 하루의 시간계획을 짜고 혹 부족한 선교사 교과가 있으면 더 익히고 거리에 나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전도 대상자를 찾거나 가가호호 여러 집을 노크하거나 소개받은 가정을 방문하여 가르친다. 저녁에 다시 계획에 따라 전도한 뒤 숙소에 돌아와 성경공부와 언어공부를 하고 일과를 마친다.

 

이러한 하루의 일과에서 선임 선교사가 진도를 관장하며 새로 온 후임 선교사를 훈련하고 가르친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매주 열리는 지역회의(District Meeting)에 참석하며 매 4주 내지 6주마다 열리는 지구회의(Zone Meeting)에 참석하여 새로운 지침을 얻고 선교사 활동 방법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갖는다.

 

선교사들의 일정은 짜여진 선교활동만이 아니라 계속적인 훈련과 교육의 기간이기도 하다. 언어를 계속 배워 임지에 있는 기간 동안 상당한 수준의 말을 익히기 때문에 이들 선교사가 귀환하면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전달하는 민간대사 역할도 한다. 특히 귀환한 선교사가 많은 미국 유타주의 솔트 레이크 시티나 브리검 영 대학교는 세계 각국의 언어와 풍습이 집결된 코스모폴리탄으로 민간외교의 좋은 마당이 된다.


square11_bronze.gif 선교비용 부담

이 젊은 선교사들의 경비는 본인이나 가족이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가족이 경비를 전부 부담하기 어려울 때는 교회의 선교사 기금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조하여 준다. 교회의 회원들은 매달 이같은 선교사 기금을 교회에 헌금하여 교회는 이를 따로 모아서 선교사를 도와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가족이 선교사 비용을 충당한다.

많은 후기성도 가정에서는 장래의 선교사 비용을 위하여 자녀마다 어릴 때부터 저축을 하도록 한다. 자녀들은 스스로 일을 하면서 조금씩 저축하여 선교비용을 만들어간다. 그러므로 선교사업 기간중에 이들 선교사들은 더욱 자기 사명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며 열심히 봉사한다. 자기부담으로 봉사하기 때문에 그 선교사업에 더욱 진실성을 갖게 되며 이는 선교사업의 성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



square11_bronze.gif 가정에서의 선교사 준비

후기성도는 선교사가 되는 것을 개인의 축복이며 또 의무로 알기 때문에 선교사 훈련은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시작된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자녀가 탄생하면 부모는 그 아이의 장래의 선교사 역할을 상상하여 정신적인 다짐과 더불어 물질적인 준비를 하게 된다. 후기성도는 갓난 아기에게 축복을 주는 의식이 있는데 부모는 이 기회에 아기가 자라서 적절한 시기에 선교사로 나갈 수 있도록 축복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부모들은 선교사들의 그림을 보여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선교사가 되는 꿈을 어릴 때부터 갖도록 도와준다.

 

교회는 어린이회서부터 시작하여 선교사에 대해 가르치며 노래하게 하고 또 연극도 하게 한다. 선교사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면 자기의 경험이나 간증을 이들 어린이에게 들려준다.

 

그러므로 후기성도 자녀들은 선교사로 나가는 연령이 되면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선교사로 나간다. 그리고 교회의 회원이 늘면 이러한 젊은이들이 더 늘어나며 그리하여 더 많은 선교사를 내게 되므로 이 같은 연쇄반응은 교회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오는 것이다.


 

3. 꾸준히 발전하는 유럽 선교             

 


“...멀리 있는 너희 백성들아 들으라. 그리고 바다의 모든 섬들에 있는 자들도 다같이  들으라. 진실로 주의 음성은 모든 자를 위한 것이니 아무도 피할 수 있는 자가 없으리라. 그리고 이를 보지 못하는 눈이 없을 것이요, 듣지 못하는 귀가 없을 것이요, 뚫리움을 면할 수 있는 마음이 없을지니라· 그리고 말일에 선택된 내 종들의 입을 통하여 모든 자에게 이를 것이니라. 그리고 이 종들은 앞으로 나아가리니 아무도 그들을 말리지 못하리니 이는 나 주가 그를 명함이니라.”

 

이것은 후기성도들이 선지자로 받아들이는 조셉 스미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일(후일)의 시대에 회복하는 소임을 받은 1830년의 계시로서 회복된 복음을 세계 방방곡곡에 전해야 하는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계시는 또 오늘날 교회가 가진 방대한 선교사 조직과 활동이 그 성취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면 이제 세계 선교의 역사와 현황을 살펴봄으로써 이 같은 예언이 과연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자.

해외로의 선교가 가장 먼저 시작된 지역은 영국이다. 교회가 설립되자마자 조셉 스미스는 해외 선교를 계시로 받았고 1837년에 십이사도 히버 씨 킴볼(Heber C. Kimball)과 올슨 하이드(Orson Hyde)를 동반자로 하여 영국에 파송하였다.

 

영국에서의 선교는 대성공을 거두어 선교를 시작한지 1주일 만에 50명의 개종자를 내었으며 13년 후인 1850년까지 3만여명을 개종시켰다.

 

1850년 이후에는 영국에서의 선교활동은 그리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는데 다른 종파의 박해도 적지 않았거니와 1차대전과 2차대전을 겪으면서 어려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2차 대전후 영국의 선교활동은 재정비되어 다시금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1960년에는 교구가 창설되고 선교부는 2개로 분리 확대되었다.

 

이를 계기로 1950년에 6천3백명이던 회원이 1970년까지 6만명이 증가하여 6만8천명이 되었으며 다음 10년 후인 1980년에는 9만여명이 되었다. 1991년까지는 다시금 70%가 증가하여 15만6천명이 되었다.

이 같은 급속한 선교활동의 성과는 북부 아일랜드(Ireland), 스코틀랜드(Scotland) 그리고 웨일스(Wales)에까지 미쳐 영국 전역에서 선교활동이 활발하다.

 

덴마크의 선교는 영국 다음으로 1850년에 시작되었으며 1920년에 선교부가 설치되었고 꾸준한 선교사업을 통해 1991년에 4천3백여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와 스웨덴 두나라에도 비슷한 시기인 1850년대에 선교사업이 시작되었으며, 1905년에 스웨덴에, 1920년에는 노르웨이에 선교부가 설치되었고 1970년에 각각 교구가 조직되었다. 1991년 두 지역의 회원은 1만1천5백여명이 되었으며 꾸준한 선교가 진행되고 있고 최근 성장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핀란드에는 늦게 선교가 시작되어 1976년에 첫 개종자를 냈으나 1980년대에 꾸준한 성장을 계속하여 1991년에는 4천3백여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특히 핀란드 선교부는 1991년 구 소련지역에 선교사업이 시작될 때까지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은 꾸준한 선교활동은 북유럽지역에 많은 성실한 회원들을 확보하여 교회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꾸준히 늘어나는 선교사업의 결실은 세계적으로도 강한 선교지역을 형성하게 하였다. 1991년 현재의 통계를 보면 이 북유럽 지역(Europe North Area)에 12개 선교부가 있고 그 밑에 2천4백 내지 3천여명의 선교사가 활약하고 있으며 47개 교구에 17만9천여명의 회원을 갖고 있다.

 

지역이 넓으며 민족, 언어, 종교, 문화, 경제상황 등이 전혀 다른 나라로 구성된 지중해 연안의 남부 유럽과 아랍권과 북부 아프리카의 이슬람지역은 서로 여건이 상이하나 하나의 선교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선교지역은 지중해 지역(Europe/Mediterranean Area)이라 불린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지중해 연안의 남부 유럽국가에서는 최근 성공적인 선교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일찍이 1800년대 중반에 이미 선교사가 파견되어 개종자를 내기 시작하였다. 이 두 나라의 선교활동을 중시하여 교회의 십이사도들은 직접 나가서 선교사업을 격려하고 또 정부의 책임자와 만나는 등 활발한 노력을 보였다. 프랑스는 1923년에 선교부가 설치되었으나 1960년 이후 이 지역 선교는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정부의 포교 허락이 늦어서 1965년에야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도표2-3>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두 나라의 회원 증가는 최근에 더욱 두드러져 1985년에서 1991년의 6년간에 프랑스에서는 50%, 이탈리아에서는 33% 정도가 늘어나 1991년 현재 프랑스는 2만4천명, 이탈리아는 1만6천명의 회원이 있다.

 

같은 지역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비교적 선교가 늦은 편이었으나 선교발전과 회원의 증가는 어느나라보다도 빠르다.

스페인에서 교회는 1966년에 첫번 개종자를 냈으나 2년후에는 이미 지부가 생길 정도로 성장했는데 1970년에 선교부가 처음 세워지고 1982년에 첫 교구가 생겼는데 1991년 현재 5개 선교부에 교구는 3개 그리고 회원은 2만3천명이 되었다.

 

포르투갈은 1970년대 초에 처음 후기성도가 발을 디딘 후 4년 만에 정부 당국의 허락을 받아 선교부 창설을 보았으며 그 후 6년 만에 교구가 설치되어 1991년 현재 5개 교구에 선교부는 3개 그리고 3만1천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불과 20년 만의 일이다.

이같이 하여 현재 지중해 연안의 여러 국가에는 18개 선교부가 설립되어 3천6백명 내지 4천여명의 선교사들이 전도활동을 하고 있으며 18개 교구에 총 회원수는 10만명을 넘고 있다.

 

이 같은 지중해 연안의 성공적인 선교활동은 아랍권의 중동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아랍 지역의 내분과 계속되는 전쟁은 선교사업에 어려운 여건을 형성하여 뚜렷한 선교사업의 진전은 없다고 할 수 있으나 교회는 계속 이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성지인 예루살렘에는 종교연구소를 설치하여 젊은 성도들이 고대 중근동에 관한 연구를 충분히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한편 독일과 스위스를 위시한 서유럽 여러 나라에는 19세기에 전도가 시작되어 교회는 꾸준한 발전을 해왔다. 또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권과 서구의 교류가 시작된 것은 그 때까지 차단되어 온 동구권 여러 나라에 다시금 선교의 손을 뻗칠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교회는 지체없이 신속하게 대응을 시작하여 활발한 선교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이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기 때문에 뒤에 따로 기술하기로 하다. 서유럽과 동유럽을 합한 선교지역은 유럽지역(Europe Area)으로 불린다.


1991년 현재 유럽 전역에는 <도표2-4>에서 보는 바와 같이 46개 선교부 산하에 9천2백명 내지는 1만명의 선교사들이 활약하고 있는데 지역이 넓으나 그들의 활약은 대단하다. 유럽 전역에는 87개 교구가 있고 총 회원수는 34만명에 가깝다(<부록2> 전세계 지역별 교회 현황 참조).


종합적으로 보면 이 같은 성공은 후기성도의 선교사업이 가장 처음 시작된 유럽에 그간 십이사도들, 칠십인 정원회 회원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젊은 선교사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이뤄진 것이며 1차, 2차의 세계대전, 또 동서 냉전 여파로 선교가 어려웠음을 감안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이 유럽에는 2차대전 후 1950년대에 선교사업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그 이후의 꾸준한 성장은 세계 종교로서의 면모를 다지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4. 아시아에서의 특기할 성공                 

 


아시아에 후기성도의 선교 손길이 닿은 것은 유럽보다 다소 늦은 1850년대의 일이다. 그러나 개종된 회원수는 선교가 먼저 시작된 유럽에 비하여 더 많다. 더욱이 많은 지역이 불과 반세기 미만의 선교기간에 불과하지만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이 지역 주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열의 때문이었다.

 

아시아에서 선교 대상으로 제일 처음 관심이 집중된 나라는 많은 인구를 갖고 있는 중국과 인도였으며 일본은 훨씬 후에 선교가 시작되었다.

 

중국에 관심이 많았던 교회는 홍콩을 중국의 관문으로 간주하여 초기 선교의 노력을 이곳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정작 교회가 먼저 알려진 것은 인도였다. 영국의 선원이던 두 사람의 후기성도가 1850년 인도 캘커타에 들러 교회를 소개한 것을 필두로 1851년에 조셉 리차드 장로가 인도에 들어가 전도하고 침례를 주며 작은 지부를 설립하였다. 그러므로 이 해가 아시아대륙에 후기성도가 들어온 첫해로 기록된다. 그 후로도 선교사들이 인도에 들어갔으나 잇달은 회원들의 이민으로 인하여 선교 활동은 위축되었다.

중국의 관문인 홍콩에는 1853년 중국 본토 선교의 임무를 띠고 세명의 선교사가 도착하여 약 4개월을 머물렀다.

 

그러나 이들 세 선교사는 중국 본토에 들어가는 허락을 얻지 못하고 계획은 좌절되었다. 중국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어 그후 십이사도의 한 사람인 데이비드 오 맥케이(David O. Mckay)가 1921년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 선교를 신도하기도 하였으나 아편전쟁 이후 서구인에 대한 혐오와 중국 내부의 문제 등으로 인하여 끝내 선교사업이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교회는 중국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고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과 인도 및 파키스탄 등에 사는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근거지로 홍콩을 지목하여, 1955년에 남극동선교부를 이곳에 세우고 한국, 일본, 그리고 필리핀을 제외한 방대한 아시아 지역에 대한 선교 기지를 삼았다.

 

태국에는 다른 인근 국가보다는 훨씬 빠른 1854년에 처음으로 교회가 소개되어 오늘날 회원수는 4천8백명을 헤아리고 있고,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열도에는 1970년대 초기에야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1991년 현재 말레이시아에 5백여명의 회원을 그리고 인도네시아에는 4천1백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교회는 파푸아 뉴기니에서도 활발한 선교활동을 펴서 1991년 현재 3,000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싱가포르에는 1963년에 선교사업이 시작된 이래 처음 10여년 동안에는 선교의 효과가 적었으나 1991년까지는 1천7백여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는 1960년대에 미군성도의 종군과 함께 교회가 소개되어 점진적인 회원의 증가를 보았으며 집회를 여러 곳에서 가지게 되었으나 공산화가 되면서 교회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인도는 힌두교 국가이므로 선교가 어려웠으나 1853년 이후 선교 사업은 190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눈에 띄는 선교는 1965년 홍콩 주재 남극동 선교부의 선교사들이 파견되면서부터였다. 1980년에는 2백25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고 1982년에는 몰몬경이 번역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3배의 회원 증가가 있어 1991년 현재 회원수는 9백여명에 이르렀다. 그 숫자는 비록 적으나 회원수 증가추세로 보아 앞으로의 성공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1992년에는 인도에 정식으로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싱가포르 선교부에서 독립하여 발전한 인도 방가로레 선교부(India Bangalore Mission)는 이도, 스리랑카, 파키스탄에 있는 1천2백명의 신자들과 힘을 합쳐 선교사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같이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나라의 후기성도 회원수는 1970년대로부터 1990년대로 가면서 10년마다 배가되고 있는데 대만의 경우는 발전이 더욱 현저하다. 대만에는 선교가 시작된지 2년 만인 1958년에 회원수 2백명이던 것이 17년이 지난 1975년에는 7천명이 되었고 그로부터 16년 만인 1991년에는 1만9천명의 회원으로 증가하였다.

최근에는 몽고에까지 선교사가 파견되었다. 몽고정부는 자기 나라의 고등교육을 개선하기 위하여 미국 정부를 통해서, 무료로 자문해 줄 전문가를 파견해 주도록 교회에 요청하였다.

 

소련이 붕괴된 후 지금까지 고등교육에 대한 자문을 행하던 소련 전문가들이 본국으로 모두 돌아가 버린 데다가 정부의 재정상태도 지극히 나빠진 때문이었다. 교회는 교육자문을 맡으면서 동시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문가를 파견하기로 몽고정부와 합의하여 여섯쌍의 부부선교사를 선정하였다.

 

이 전문가들은 몽고 정부를 도와서 다섯개 대학과 전문연구소 지도자들에게 교육정책 개발 및 기획, 교육과정개발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몽고에 파견된 전문가 겸 선교사는 경험이 많은 교육자들로서 경영대학 학장, 대학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담당하고 있는 의사, 검퓨터과학 교수, 경영대학 교수, 교육과정개발 및 교육행정 관련 교수, 교육행정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과 한국은 북아시아 지역(Asia North Area)을 형성하고 있으며 아시아 전체에 비해서는 땅도 좁고 인구도 적으나 선교활동에 따른 회원수 증가는 매우 빠르다.

 

위치상으로 보면 태평양에 접한 관계로 일본이 서구의 영향을 일찍 받았거니와 말일성도도 한국보다는 일본에 먼저 들어왔다. 교회가 일본에 들어오게 된 것은 1901년인데 그 때 십이사도의 한사람인 히버 제이 그랜트(Heber J. Grant) 장로가 세명의 선교사와 함께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랜트 사도의 도착으로 동경에 선교부가 설치되고 그 다음해부터 침례를 받는 회원이 늘어 1904년에는 몰몬경 번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두번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일본과 미국의 관계가 나빠지자 좀 더 좋은 시기를 기다리는 의도에서 1924년 선교사업을 중단하였다가 해외 일본인들에 의하여 1937년 하와이에 다시 일본 선교부가 개설되었으며 본토에 선교부의 문을 다시 연 것은 2차대전 후인 1947년이었다. 일본 선교부는 1955년에 북극동 선교부와 홍콩의 남극동 선교부로 분리됐으며, 일본의 선교사업은 발전해 나갔다.

 

1991년 현재 교구는 22개, 선교부는 10개를 헤아리며 총 회원수는 9만9천명을 넘게 되었다. 일본의 기독교인 총수가 백만명을 넘지 않음을 감안할 때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교회의 빠른 성장에 대하여는 제7장에 상세하게 기술한다.

북아시아 지역을 제외한 아시아에는 필리핀과 그에 인접한 마리아나 군도(Mariana Is.), 웨이크 군도(Wake Is.), 괌(Guam), 마샬 군도(Marshall Is.), 캐롤라인 군도(Caroline Is.)가 아시아의 또 다른 선교지역인 필리핀 마이크로네시아 지역을 이루고 있다.


필리핀에는 1898년 스페인-아메리카 전쟁 당시 미국에서 온 포병들 중에 후기성도 군인들이 있어서 이들이 선교를 시작하였으나 체계적인 선교사업은 2차대전 후에 시작되었는데 필리핀 선교부가 설립된 것은 1967년이었다. 그로부터 1991년까지 24년간 선교사업은 경이적인 발전을 이루어 44개의 교구와 12개의 선교부가 설치되고 26만6천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으며 아시아에서는 가장 빠른 교회성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괌과 마샬군도, 웨이크 군도, 마리아나 군도에도 선교사가 파견되어 괌에는 1천여명의 회원이, 마샬에는 1천7백여명의 회원이 있으며 그 수는 매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종합하면 <도표2-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시아의 총 회원수는 38만3천여명에 달하며 32개 선교부에 7천여명의 선교사가 활동중에 있는데 회원수는 매년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또한 중국과 인도의 엄청난 인구를 감안할 때 성장의 잠재력은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부록2> 전세계 지역별 교회현황 참조).

 


5.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기적              

 


멕시코로부터 시작하여 남미의 남단인 칠레와 아르헨티나까지 포함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선교사업은 가히 기적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지역의 성장은 미국의 성장을 능가하며 북부멕시코와 남부멕시코의 2개 지역을 비롯하여 과테말라 시를 중심으로 인근의 중미 7개국(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벨리제, 온두라스, 파나마)을 포함하는 중미 지역, 에콰도르의 구아야쿠일을 중심으로 인근의 5개국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을 포함하는 남미 북부지역,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한 인근의 4개국(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을 포함하는 남미 남부 지역, 그리고 마지막으로 브라질 지역을 합해 모두 6개의 독립된 선교지역으로 나뉘어져 회원수와 교회 조직이 급성장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처음으로 교회가 알려진 것은 1851년 칠레에서다. 그때 몇몇 후기성도들이 그 곳을 들러 5개월 정도 체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칠레에서는 그 후 이렇다 할 발전이 없었다.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에서 선교가 시작된 것은 1900년대에 들어와서부터이며 세계의 다른 어느 대륙보다 선교활동이 늦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선교활동이 늦게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선교는 대성공을 거두고 있는데 이것은 1925년 아르헨티나 선교부에 파견된 멜빈 밸러드(Melvin G. Ballard) 사도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어서 주목을 끈다.

 

그 때 밸러드 사도는 미래의 선교 지역으로 남미를 헌납하면서, “도토리 나무의 싹이 처음에는 그 씨를 벗기고 나오는 것이 어렵고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싹이 난 후에는 무럭무럭 자라서 큰 나무가 되듯이 남미에서의 교회는 크게 성장하리라”고 예언하였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선교 활동은 이 예언의 성취를 증명해 주고 있으며 특히 칠레의 경우는 그 모델이 되고 있다.

 

1961년 칠레 선교부가 설치되던 당시의 1천1백명 회원은 1972년에는 2만명이 되어 10년 동안에 18배가 되었고 그후 10년 만인 1983년에는 14만명이 되었으며 8년 만인 1991년에는 다시금 배가 넘는 32만명이 되어 총인구의 2.3%에 가까운데 미국의 신자 비율보다도 훨씬 높다. 칠레는 선교사 1인당 개종자수로 보면 세계에서 교회가 가장 빨리 성장하는 나라가 되었다.

 

칠레 다음은 멕시코로서 1875년 여섯명의 선교사가 당시 회장이던 브리검 영의 부름을 받고 스페인어로 번역된 교회 간행물을 가지고 이곳에 들어와 인디언들과 멕시코인들에게 선교사업을 한 기록이 있다. 그 후로 멕시코에서는 계속적인 선교활동이 이루어져 1879년에는 교회 십이사도들이 방문하여 처음으로 지부를 설치하였다.

 

그 후 멕시코 선교는 내부의 정치적 상황으로 어려움을 당하여 뒷걸음질친 적도 있으나 20세기에 들어와 급속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1900년초 1천여명에 불과하던 회원수가 1946년에는 5천4백명으로 늘고 1970년대부터는 매 10년마다 2배 이상씩 증가하여 1991년 현재 총회원수는 65만명을 넘었다.

 

칠레와 멕시코 다음으로 선교활동이 시작된 지역은 아르헨티나인데 1923년에 교회가 알려졌고 1925년에는 십이사도 중의 한 사람인 멜빈 밸러드와 몇 명의 선교사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하여 주민들에게 전도를 시작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의 선교활동을 보면 1926년에 남미 최초로 선교부가 설치되었고 2차대전으로 선교활동이 다소 부진하다가 다시금 발전을 보여 1962년에는 아르헨티나 내에 두개의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교회가 들어온 후 반세기가 지난 1978년에는 회원수가 4만명이 되었고 1986년에는 성전을 가지게 되었으며 1991년 선교부는 9개로 확장되었고 회원수는 18만명을 넘어 1978년과 비교할 때 13년 만에 4배나 늘어났다.

 

남미 북부 지역인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에도 1960년대 중반 이후 선교사업이 시작되었는데 불과 10년 이내에 수천명의 회원을 가지게 되었고 1970년대 이후 성장을 계속하여 1991년까지 16개 선교부, 84개 교구에 50만명 이상의 회원으로 발전하였다.

 

중미지역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는데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나카라과, 코스타리카, 벨리제, 온두라스, 파나마 등은 1960년대에 선교가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불과 30년 만인 1991년에는 선교부가 10개, 교구수 48개, 회원수는 26만8천명에 이르고 있다.

 

독자적인 선교지역을 이루고 있는 브라질의 경우는 선교 역사상 유례없는 대 성공을 거두었다. 브라질에 교회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23년 이곳에 이민 온 독일계 신자에 의해서였다. 처음 얼마간은 이들 독일계 이민 그룹안에서 전도가 이루어졌으나 포르투갈어를 쓰는 주민에게로 퍼지게 되었다. 1939년에는 몰몬경이 포르투갈어로 번역되었다. 1940년의 회원수는 2백여명이었다. 그 수는 2차대전으로 증가를 보이지 못하다가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브라질의 발전상을 다음 신문 보도에서 보기로하자.


브라질 몰몬교 460% 성장

[프라임경제] 2006년 12월 12일(화)

브라질 내에 몰몬교파가 6년 동안에 460%정도의 성장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현지언론이 보도했다.

1990년도에 전 세계적으로 770만의 신자를 기록하던 데서 현재 1250만까지 성장한 몰몬교파는 브라질 내에서는 현재 92만 8천 명의 신도를 기록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몰몬교파는 2000년에 19만 9천명을 기록했다.

최근 종교통계센터의 조사에 의하면 브라질 카톡릭 신자들의 비율은 5년 동안에 73.9%에서 67.2%로 감소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몰몬교의 엄격한 일일 규칙들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에딘 수에드 아부만수르 카톨릭대 종교과학신학과 교수는 몰몬교 신도들은 시스템적 삶의 프로그램과, 서약, 엄중한 규정들을 철저히 따른다고 설명하며, 각종 폭력과 가정불화 상황에서 상당수가 몰몬교인들의 행동을 삶의 모델로 삼는 경우가 있다고 덧붙였다.

몰몬 교인들의 행동 수칙에는 커피, 검정색 차, 술, 담배를 금지하고, 교회에서 결혼식이나 세례를 받는 것을 거룩한 특혜로 여긴다. 다시 말하면 ‘고귀한 삶’을 산 사람만이 이러한 거룩한 특혜를 받도록 허락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날 성도의 교회(Igreja dos Santos dos Ultimos Dias)의 기본수칙이다.

몰몬교는 카톨릭이나 기독교와는 달리 만약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가 없으며, 구속은 각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구속을 위한 회개의 1단계는 먼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그 죄에 대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또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몰몬교의 제르손 뻬레이라 자끼스 씨는 회개의 과정은 며칠이 걸릴 수도 있고,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몰몬교에서는 모든 것을 몰몬교리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이들은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또 다른 삶이 있었으며, 낙원의 삶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상에서 고귀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들은 이 외에 예수의 재림과 천년왕국을 기다리며, 이전에 재림에 대한 징조가 있으며, 순종하는 자들은 이 징조를 인식한다고 믿고 있다.
이들은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의 상징이기 때문에 이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브라질 몰몬교는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수의 신도를 기록하고 있으며,(첫째는 미국, 둘째는 멕시코) 전 세계적으로 6만 명의 몰몬 선교사가 있다.

몰몬교 성도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47.8%)이고, 다음은 스페인어(31.1%), 그리고 그 다음이 포루투갈어(7.7%)이다. 몰몬교는 전 세계 16개 선교사훈련센터에서 언어를 가르치고 있고, 몰몬경은 77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몰몬교는 현재 160개국에 진출했다.



1957년에서 1959년까지 불과 2년 사이에 신자수가 3배가 되었고 1966년에 첫 교구가 설치되었는데 20년 후에는 50개의 교구로 늘어나 가히 경이적인 성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91년 현재 브라질은 64개 교구에 40만명의 회원을 가져, 국가별로 보면 미국, 멕시코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회원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는 세계에서 선교사업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며 총회원수는 2백40만명에 달하여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전체 회원의 30%를 점하고 있다(<부록2> 전세계 지역별 교회 현황 참조).

 

최근 카리브해 지역에서도 교회는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처음 당도한 장소인 도미니카 공화국은 1978년 12월 선교 지역으로 헌납된 이래 선교사업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1981년에 최초의 선교부가 설치되었으며 1986년에는 도미니카 최초의 정규교구가 설치되었다. 그 이후 교회는 놀랍게 빠른 성장을 계속하여 신자수는 1986년 1만1천명에 달하였고 1991년 현재는 3만8천명에 이르고 있다.

 


6. 선교의 신대륙 아프리카              

 


아프리카의 넓은 면적과 더운 열대성 기후, 그리고 다양한 민족과 언어와 문화적 배경은 후기성도의 선교사업에는 어려움인 동시에 도전이 되고 있다.

 

아프리카에 가장 먼저 전도가 시작된 것은 1853년 남아프리카(South Africa) 지역으로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남아프리카를 선교 지역으로 헌납하였다. 첫 해에 45명의 회원이 개종하였으며 계속 선교사업이 이루어져 1865년까지 2백91명의 회원이 미국으로 이주한 기록이 있다. 그 후 선교사업은 순탄치 않아 수차례 선교부를 철수해야 했다. 1903년에 다시금 선교부가 개설되었으나 2차대전 때문에 다시 철수하였다. 1930년에는 남아프리카의 북쪽에 위치한 잠바브웨에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프리카 선교는 제2차대전 후부터 활발해졌다고 보겠는데 1945년에 남아프리카에 선교활동이 다시 시작되고 1945년에는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이 이 지역을 방문하여 교회 건물을 헌납하였는데 이것은 교회가 앞으로 아프리카에 적극적인 선교사업을 시작하려는 의지를 나타낸 일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까지는 남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백인지역에 주로 선교활동이 이루어졌다. 그때까지 아프리카 중부의 흑인 지역에서는 공식적인 선교활동이 없었으나 가나와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현지인들이 해외 여행을 통하거나 교회서적을 입수하여 새로운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생적인 교회를 세웠다.


1978년 11월부터 흑인에 대한 선교사업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는데 1980년 초까지 불과 1년 남짓한 사이에 1천7백명 이상의 흑인 개종자가 나이지리아와 가나에서 생겼다.

 

1980년대에 들어와 아프리카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계속하여 선교 개시후 최초 10년간의 흑인 개종자수는 1830년부터 최초 10년간의 백인 개종자수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나이지리아와 가나에는 1978년 11월 두쌍의 부부 선교사가 파송되어 전도를 시작하는데 10년이 채 안된 1987년에 나이지리아에는 1만명, 가나에는 5천5백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1988년 5월에는 서아프리카 최초의 교구가 나이지리아에 설치되었는데 선교사업은 순조로워서 1991년말 현재 나이지리아에는 2개 교구, 2개 선교부에 1만8천명의 회원이 있고 가나에는 2개 교구, 1개 선교부에 9천8백명의 회원이 있다.

 

1986년에는 자이레에서, 1987년에는 스와질랜드에서, 1988년에는 아이보리 코스트에서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자이레에서는 1986년 선교사업의 승인을 받은 후 1년 만에 3백명의 개종자를 내었고 그중 20명이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다. 그후 1991년 선교부가 설치되고 3천4백명의 개종자를 확보하여 4년 만에 10배가 넘는 성장을 이루었다. 아프리카 남쪽인 나미비아에서는 1990년 4명의 젊은 선교사와 한쌍의 부부 선교사가 전도를 시작하여 1년간 1백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1987년 처음으로 선교가 시작된 스와질랜드에서는 1991년 5백여명의 성도를 갖게 되었다.

 

이들 국가 외에도 현재 마다카스카르, 마스카레네 제도 등에서 선교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1992년에는 잠비아, 보츠와나, 그리고 콩고에서 정부승인을 받아 공식적인 선교사업이 시작되었다.


1991년 현재 아프리카 전역을 보면 9개 선교부에 2천명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고 9개 교구에 총회원 5만9천명을 갖고 있어 짧은 선교역사에 비추어 볼 때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또한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에는 이미 성전이 지어졌다.(<부록2> 전세계 지역별 교회 현황 참조).

앞으로 아프리카 지역은 선교의 신대륙으로서 교회의 관심과 기대가 모아지고 있으며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7. 동구권과 러시아에 진출                

 


구 소련을 비롯한 폴란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구 공산권 국가들과 그리스에는 동서양 이데올로기의 냉전 기간 동안 기독교의 선교가 차단되어 있었으며 소수이긴 하지만 이들 나라에 살고 있는 후기성도들의 신앙생활도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이 지역을 항상 주시하면서 가능한 손길과 교섭을 끊이지 않았다.

 

부대관장들과 십이사도 정원회의 사도들이 직접 방문하여 교섭을 하는등 적극적인 진출 노력을 경주한 결과 1980년대 후반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종교에 대한 제한을 해제하고 선교를 허락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선교사가 파견되어 집회장소를 재건하고 필요한 자료를 인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면 공식적인 선교사업이 시작되기 전 동구권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활동을 살펴보자.

교회는 동구권의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기 훨씬 전부터 복음 전파를 위한 계획을 착실하게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교회는 정기적으로 해외 순회공연을 행하는 브리검 영 대학교의 민속음악단과 민속무용단들을 활용하였다.

 

이 팀들의 공연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라면 입국을 거절하는 공산국가로 하여금 교회지도자들을 합법적으로 그리고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교회지도자들은 이들 문화사절단을 따라 공식적으로 이들 국가를 방문하였다.

 

가장 먼저 공연이 이루어진 국가는 폴란드로서 1977년부터 1981년 사이에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다섯개의 민속음악단 또는 민속무용단이 파견되어 공연을 하였다. 그 첫해인 1977년 8월 스펜서 다블류 킴볼(Spencer W. Kimball) 회장은 직접 바르샤바를 방문하여 폴란드를 선교지역으로 헌납하였다.

 

1979년에 브리감 영 대학의 ‘아메리칸 포크댄스’ 민속무용단은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와 소련을 순회하면서 수십만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하였다. 특히 루마니아에서는 독립기념일 하루에 90분씩의 공연장면이 국영 텔레비전에 세차례나 방영되었다.

 

소련의 중앙 텔레비전 방송은 공연장면을 전국의 11개 시간대 전부를 활용하여 1억5천만명의 시청자에게 방영하였다. 몰몬 젊은이들은 공연을 통하여 동구권 국가를 폭풍처럼 휩쓸었다. 1981년에 부대관장 고든 비 힝클리(Gordon B. Hinkely)장로는 ‘영 앰배서더(Young Ambassador)’라 불리는 브리검 영 대학 민속음악무용단을 따라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와 유고의 베오그라드, 자그레브 그리고 소련의 모스크바, 키에프, 레닌그라드를 방문하였다. 그는 몰몬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소련정부 고위관리들을 만났다.

 

공연은 30분짜리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 영 콤뮤니스트 라디오(Young Communist)와 라디오 모스크바(Radio Moscow)를 통해서도 방송되었다. 영자지 소비에트 라이프(Soviet Life)는 민속음악무용단과 브리검 영 대학에 대한 호의적인 기사를 썼다. 브리검 영 대학의 역사학 교수로서 이 여행을 기획하였던 다글라스 토블러(Douglas Tobler)는 “학생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들 나라를 준비시키는 침례자 요한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썼다.

 

1985년 11월 10일 에즈라 태프트 벤슨(Ezra Taft Benson) 사도는 교회의 13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취임 후 열린 첫번째 고위 지도자 회의에서 벤슨 회장은 유명한 심장외과 의사인 럿셀 엠 넬슨(Russel M. Nelson) 사도에게 동유럽의 교회활동을 총괄하는 사도로서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때까지 사회주의 국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부 및 동부 유럽에서는 교회활동이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비엔나 선교부에 소속된 몇몇 헌신적인 부부 선교사들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어렵게 전도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한쌍은 폴란드에서, 또 한쌍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왕래하면서, 두쌍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그리고 다른 두쌍은 그리스에서 전도하고 있을 뿐 소련에서는 한 사람의 선교사도 활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에는 몰몬 신자들이 각각 수천명씩 살고 있었으나 선교사는 입국할 수도 없고 예배를 포함하는 교회의 모든 활동은 정부의 종교억제 정책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경찰은 물론 대중이나 심지어 가족이 보지 않는 은밀한 장소에서만 예배를 보아야 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교회는 폴란드, 동독(1990년 10월 3일 이후에는 서독과 합쳐졌으므로 동부독일이라고 부를 수 있다),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를 포함하는 중부 유럽과 러시아를 비롯하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그리고 그리스를 포함하는 동부유럽에 극적으로 진출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교회발전은 동독의 프라이버그 성전 헌납이 계기가 되었다. 1985년 6월 29일 성전헌납식에서 부대관장 고든 비 힝클리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


  “이날이 당신 교회의 역사에서 오래 기억되는 날이 되기를 비옵니다. 감사와 기쁨의 날로 기억되기를 원하옵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기쁨을 갖게 되는 새로운 날의 시작이 되기를 비옵니다.” 


square11_bronze.gif 동부독일에서의 교회 성장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동독정권이 수립되었을 때에 그 땅에는 아직도 수천명의 후기성도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1946년에는 동독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1947년 드레스덴에서 개최된 개척자의 날 1백주년 기념식에는 약 5천명의 성도들이 참석하였으며 1955년에는 드레스덴 교회 창립 1백주년 기념예배가 거행되었다.

 

1969년 6월 15일 토마스 에스 몬슨(Thomas S. Monson) 사도는 전(全) 동독지역의 선교책임을 맡은 드레스덴 선교부를 설치하였으며 동독성도가 선교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82년에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처음으로 동독 프라이버그에 교구가 설치되었고 1984년에는 라이프치히 교구가 설치되었으며 1985년 6월 28일에는 프라이버그 성전이 헌납되었다. 이것은 미국의 기독교회가 공산주의 국가에서 예배를 볼 수 있는 건물을 짓는 첫번째 기록이 되었다.

 

1988년 10월 교회는 몬슨 부대관장은 동독의 국가평의회 의장, 종교성 장관 등 최고위 지도자들과 회담을 갖고 동독내에서 미국 선교사들의 공식적인 선교활동을 허용하도록 요청하였으며 또한 동독의 후기성도들이 해외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이 자리에서 쿠르트 레플러(Kurt Loeffler) 종교성 장관은 후기성도 선교사들이 자기 본국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좋은 평을 얻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선교사들이 법을 지키고 가정의 중요성을 믿는 충실한 시민이며 열심히 일하는 근로윤리를 갖고 있고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므로 자기 정부는 그들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종교성 장관은 선교사 입국과 동독 선교사의 해외 선교 두가지를 모두 허용하였다.

 

몬슨 제일회장단 회장은 드레스덴 교구 건물의 헌납식에 참석했는데 바로 전날에 있었던 오픈 하우스 모임에는 3만명의 이웃 주민들이 방문하였다.

 

1989년 3월부터 드레스덴 선교부 산하에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1년 반이 지났을 때 이 지역에서는 약1천1백명의 개종자가 생겼다. 또한 동독 선교사 10명이 영국,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그리고 칠레에서 전도하도록 파견되었다.

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1990년 10월 3일에는 독일의 통일이 선포되었다.  1991년 7월에는 드레스덴 선교부가 나뉘어져 베를린에 새로운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square11_bronze.gif 폴란드에서의 교회 발전


1986년 5월 31일 제일회장단 보좌 회장 토마스 에스 몬슨은 종교성 장관이하 종교 행정을 관장하는 폴란드의 정부 고위관리들을 만나 선교활동과 교회건물확보를 요청하였고 이 요구는 쉽게 받아들여졌다.

 

1989년 6월 15일 바르샤바에서는 폴란드 최초의 후기성도 교회 건물에 대한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이 모임에는 교회의 사도인 럿셀 엠 넬슨이 참석하였고 폴란드 정부에서는 바르샤바의 볼라시(市) 시장인 안드레제 오스트로프스키와 비(非)카톨릭 담당 종교국장인 그르제고르즈 리들레브스키, 전임 종교국장 타데우스 두스키크가 참석하여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을 환영하는 연설을 행하였다.

기공식이 끝난 다음날 교회 지도자들은 종교성 장관 블라디슬라바 로랑을 예방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종교성 장관은 새로이 제정된 양심과 신앙의 자유에 관한 법률안을 보여주었다. 1990년 7월 1일에는 폴란드 선교부가 바르샤바에 설치되었고 첫번째 선교사들이 부름을 받아 선교사업을 개시하였다. 이후 교회와 폴란드 정부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square11_bronze.gif 불가리아에서의 시작


사회주의 독재정권이 아직도 위세를 떨치고 있는 불가리아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제삼의 유력자를 중개인으로 하여 불가리아 정부 관리들을 면담할 약속을 한 넬슨 사도와 유럽지역 회장인 한스 링거 장로는 1988년 10월 30일 밤늦게 소피아 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공항에는 안내자가 나와 있지 않았다. (사회주의 국가의 정부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약속을 문서로 확인해 주는 일이 없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으나 내리고 나니 다른 호텔이었다. 길을 잘못 든 것을 안  두 사람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눈보라 속을 걸어서 예약된 호텔로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날 영어를 할 줄 하는 호텔의 교환수는 만나야 할 고위관리의 이름과 사무실이 모두 틀리다고 알려 주었다. 이런 때에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릎을 끓고 기도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기도는 기적과 같이 응답되었다. 다음날 아침 10시에 두 사람은 종교성 장관인 치아코 체코프를 만났다. 그는 방금 소피아로 돌아왔으나 태도는 냉랭했다. 그는 넬슨 사도가 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아무 약속도 되어 있지 않았다. 통역을 통해서 그는, “뭐 넬슨? 링거? 몰몬이라고?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어”라고 빈정거렸다.

 

그러자 넬슨 사도는,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요. 우리도 당신 이름을 들어본 일이 없소. 피차 마찬가지니까 서로 가깝게 지냅시다.”라고 말을 받았다. 모든 사람이 한바탕 웃고는 이내 우호적인 분위기가 되어 면담이 진행되었다

 

1990년 2월 넬슨 사도는 다시금 소피아에 돌아와 불가리아를 새로운 선교지역으로 헌납하였으며 체코프 이하 정부관리들과 언론 관계자들을 만났다. 불가리아인들은 시급한 당면과제로 영어를 가르칠 자원봉사자들을 요청하였으며 교회는 가장 우수한 영어 선생들을 자원봉사 희망자들 중에 선발하여 불가리아로 파견하였다.

 

1991년 7월 불가리아 선교부가 개설되었다. 이것은 베를린, 체코, 헝가리, 폴란드에 이어 동구권 국가에 열린 다섯번째 선교부로서 선교부장에는 불가리아계 미국인 치과의사인 키릴 키리아코프(Kiril Kiriakov)가 임명되었다. 선교부가 개설되었을 때는 이미 불가리아 정부의 승인을 얻어 인접국가에서 온 남자 선교사 10명, 네명의 여자 선교사 그리고 두쌍의 부부선교사가 활약하고 있었고 50명의 개종자가 있었다.

 

1991년 7월 10일에 불가리아 정부는 교회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교회는 불가리아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square11_bronze.gif 헝가리에서의 선교사업


1982년 중부와 동부유럽을 순방하면서 사람들을 열광케 하였던 몰몬태버나클 합창단의 공연실황이 헝가리에서도 국영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전국적으로 방영되었다 극히 좋은 청중들의 반응을 보고 방송국은 미국에 2주일 동안 제작진을 파견하여 교회현황을 소개하는 4부의 미니 시리즈를 제작하였다. 1985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전국에 방영된 이 기획물은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더 많은 자료를 보내달라는 요구가 교회의 선교사업 관리국에 빗발쳤다. 어디에 편지를 보내야 좋을지 모르는 많은 시청자들은 ‘미국 몰몬교’, ‘유타 선교센터’라고 주소를 적어 보내기도 하였다.

 

1987년 4월 19일 부활절에 교회는 넬슨 사도를 부다페스트에 파견하여 헝가리를 새로운 전도지역으로 헌납하고 그 국민을 위한 축복기도를 행하였다. 이틀 후 넬슨 사도는 종교활동에 관한 모든 책임과 권한을 가진 종무위원회(Council of Religious Affairs)의 위원장인 임레 미크로스(Imre Miklos) 박사를 면담하였다. 교회 활동을 주의 깊게 청문한 미크로스 박사는 예정시간보다 배 이상의 시간을 내어주는 등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고 이후 교회의 좋은 친구가 되고 대변자가 되었다.

 

1988년 6월 미크로스 위원장은 교회 활동을 법적으로 승인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이를 넬슨 사도에게 전달하였는데 이 자리에는 벌써 수백명의 개종한 헝가리인 후기성도를 이끄는 지도자들인 게데온 케레스티(Gedeon Kereszti) 박사와 페테르 파울 바르가(Peter Paul Varga) 박사가 동행하였다.

 

1990년 7월 1일에는 부다페스트에 헝가리 선교부가 설치되어 헝가리인들에게 본격적인 전도가 시작되었다. 1989년 10월에는 연례 유럽지역 선교부장 회의가 부다페스트에서 열렸는데 이 때 헝가리 국회는 헝가리 국호를 헝가리 인민공화국에서 헝가리 공화국으로 변경함으로써 국체를 민주국가로 바꾸었다.



square11_bronze.gif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알바니아에서의 선교활동 개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종교활동에 대하여 엄한 감시를 해왔으나 1990년 2월 21일에 교회의 예배와 전도활동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며 1990년 7월 1일에 교회는 50년 동안 공산주의 아래에서 전도가 금지되었던 체코 선교부의 문을 다시 열고 공식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루마니아에서는 독재정권이 무너진지 5주 후 1990년 2월 9일 넬슨사도가 루마니아를 선교지역으로 헌납하였으며 이내 헝가리 선교부 산하의 선교사들이 루마니아에 들어와 선교사업을 시작하였고 많은 개종자들을 내고 있다. 한편 교회는 루마니아 정부의 요청으로 부쿠레슈티의 3만명이 넘는 고아들에 대한 자선 구호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양의 물자를 루마니아로 보내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에도 비슷한 시기에 선교사가 파견되고 교회활동이 시작되었으며 몬슨 사도는 1985년 10월 31일 유고슬라비아를 전도지역으로 헌납하였다. 넬슨 사도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종교담당 정부 관리들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유고의 스포츠 영웅으로서 브리검 영 대학 농구팀의 스타인 크레스미르 코시크(Kresmir Cosic)가 동행하였다. 교회는 유고정부의 승인을 얻어 자그레브와 여러 주요 도시에서 예배활동을 시작하였다.

 

선교사업은 그리스에서도 시작되어 1990년 7월 1일 아테네 선교부가 공식으로 설치되었으며 여러명의 현지인 선교사들도 배출되어 전도가 시작되었다.

 

최근에는 알바니아에서도 선교사업이 시작되었다. 1992년 6월 네명의 복음 선교사가 수도 티라나에 도착하였고 한 쌍의 부부 선교사가 농업을 돕는 선교사가 되어 알바니아에 도착하였다. 1993년 4월 23일에는 댈린 오우크스 사도가 알바니아를 복음전도 지역으로 헌납하였다. 이 때는 55명의 알바니아인 성도들과 18명의 선교사가 참석하였다


square11_bronze.gif 러시아로의 진출


1987년 6월 교회의 넬슨 사도는 소련을 방문하여 종무위원회(Council of Religious a Affairs) 위원장을 면담한 후 러시아 정교, 개신교, 그리고 유태교 등의 종교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는 수석 랍비인 아돌프 샤예비치(Adolph shayevich)로부터 모스크바의 유태교회당(Synagogue)에서 열리는 율법학자 모임에도 초청을 받았다.

 

넬슨 사도는 1989년 8월 모스크바를 다녀와서 자선가인 캘리포니아의 아만드 해머(Armand Hammer) 박사와 유타의 존 한츠맨(Jon Huntsman) 사장과 동행하여 1988년 12월의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아르메니아의 주민을 돕는 협약서에 서명을 한 후 종무위원회 위원장을 다시금 예방하고 교회활동의 공식적인 승인을 요청하였다.

 

이때 소련정부 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교회활동을 승인받기 위해서는 연방정부 차원이 아닌 지방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하고 지역마다 적어도 20명의 소련 신자를 확보해야 한다는 조건을 알려주었다. 교회는 외국에 나가서 개종한 신자들을 쉽게 확보하였으며 러시아가 교회의 등록을 공식 발표하였을 때는 이미 소련내에 3백명의 소련인 후기성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교회 관계자들은 이 때에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레닌그라드의 한 부부는 1989년 7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방문했다가 몰몬으로 개종하였고 스베틀라나라고 불리는 젊은 부인은 1989년 가을에 소련에서는 매우 비싸고 구하기 힘든 러시아 성경을 구하러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헬싱키에 갔다가 우연히 공원에서 러시아어 성경을 줍고 또 거기서 몰몬교회의 선교부장을 만나 가족 전체가 개종하게 되었다. 이들이 귀국하여 친구들에게 교회를 소개함으로써 여러명을 개종시키게 되었으며 정부의 승인조건을 쉽게 달성하게 된 것이다.

 

1990년 4월 에스토니아에서는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을 얻어 수도인 탈린에 최초의 교회가 설치되었다. 또한 에스토니아 탈린 출신의 자누스 실라(Janus Silla)는 개인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소련인으로서는 최초로 선교사의 부름을 받고 미국으로 파송되어 전도를 하게 되었다.

 

1990년 4월 26일에는 레닌그라드에 교회 설립을 신청하여 1990년 9월 13일에 허가가 났다. 몇 달 후 레닌그라드에는 두번째 교회 설립이 승인되었다.

 

이러한 예는 다른 여러 도시에서도 반복되어 지금은 성 페테르스부르크에는 이미 7개의 교회가, 모스크바에는 4개, 비보르그에 1개, 에스토니아의 탈린에 1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1990년 하반기에 들어와 러시아 정부는 종교에 관한 새로운 법률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종교의 자유의 원칙을 천명하고 교회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였다. 교회는 새로운 법률에 따라 1991년 3월에 교회 설립에 대한 승인을 신청하였다.

1991년 6월 24일 러시아 부통령 알렉산더 루츠코이(Alxander Rutskoi)는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서 몰몬 태버나클 합창단 공연이 끝난 후에 개최된 만찬회에서 교회의 러시아정부 등록을 인정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이로써 15개 공화국 중 두번째 공화국의 승인을 얻은 것이다. 러시아는 전체 과거 소련 국토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인구는 1억4천만명을 넘는다.

 

1988년 12월 아르메니아에는 거대한 지진이 발생하여 5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50만명 이상이 집을 잃게 되었는데 교회는 필요한 물자를 기증하는 등 적극적인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유타주에 있는 한츠맨 화학회사(Huntsman Chemical Company)의 사장이며 몰몬신자인 존 한츠맨은 무너진 집을 지을 콘크리트 조립 자재를 생산하는 공장을 지어주고 교회는 이에 필요한 전문 기술자를 무료로 지원할 것을 아르메니아 정부에 약속하였다.

 

이러한 자선활동에 대해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총리인 블라디미르 수레노비치 마르카리안츠(Vladimir surenovich Markariants)는 교회와 자선가들에게 깊이 감사하면서 그 표시로 수도 예레반에 있는 4천평의 땅을 교회에 기증하기로 결정하였다.

1991년 6월 24일에 연간 6천5백채의 아파트를 지을 자재를 생산하는 콘트리트 조립자재 공장이 준공되고 솔트 레이크 시티의 주택 기술자인 데이비드 호온(David Horne)이 교회의 요청으로 자기 시간과 기술을 바쳐 예레반에서 집짓는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1991년 9월에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교회를 공식적으로 승인함으로써 구 소련의 4개 공화국이 교회를 승인하게 되었으며 1992년 2월에 모스크바, 성 페테르스부르크, 키에프의 세 지역에 선교부가 설치되어 선교사가 파견되고 복음전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1993년 5월에는 라트비아, 벨라루스(또는 백러시아), 리투아니아 공화국이 차례로 선교지역으로 헌납되었다. 구 소련내에 몰몬 신자수는 놀랍게 빨리 증가하고 있으며 교회에서 회원수 통계를 발간할 때는 이미 그 숫자는 낡은 것이 되고 마는 정도다. 구 소련 지역에는 1993년 3월 현재 6개의 선교부가 개설되었으며 동구권 지역에도 6개의 선교부가 개설되었다.

 

동구권과 러시아에서의 교회 발전 속도는 거의 ‘믿을 수 없는 정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는 교회의 첫번째 예언자인 조셉 스미스가 1백50년전 어떤 간증 모임에서 행한 예언적인 말이 지금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형제들, 저는 여러분의 오늘 저녁 간증을 듣고 크게 깨닫고 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 교회와 왕국의 운명에 대하여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는 어린 아기보다도 잘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 교회는 북미와 남미를 가득 채우고 온 세계를 채우게 될 것입니다.”

 


8. 미래의 거대한 선교지역 중국을 준비               

 


방대한 인구와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에 복음을 전하려는 후기성도들의 시도는 18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교회는 1853년에 세명의 선교사를 파견하려 하였으나 그 당시 중국의 쇄국정책에 부딪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관문인 홍콩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1921년 십이사도의 한사람인 데이비드 오 맥케이가 세계 여러 선교지역을 순방하던 길에 중국을 방문하여 동행한 휴 캐넌(Hugh J. Cannon) 사도와 함께 북경의 자금성 안에서 중국을 선교지역으로 헌납하는 기도를 올렸다.

 

중국은 19세기 초 아편전쟁으로 인한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과 제2차 대전중 그리고 대전 후의 양대 이데올로기의 대치로 인하여 아직까지 기독교에 대해 거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최근 동서의 냉전 상태가 기적적으로 해소되어 구 공산권 국가들의 복음에 대한 문호도 개방되어 교회의 선교사업도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도 그 문을 굳게 닫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머지 않은 장래에 문이 열리고 문자 그대로 광대한 지역의 거대한 인구에 대한 복음 전도의 봇물이 터질 것을 기대하면서 선교의 기회를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는 한편 그 때를 대비한 준비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979년 1월 1일 미국과 중국간에는 공식적으로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그보다 훨씬 전인 1976년 9월 교회는 브리검 영 대학교 중국어과의 폴 하이어(Paul Hyer) 교수를 중국에 파견하였는데, 그는 모택동의 장례식에 교회를 대표하여 참석하였고 환대를 받으며 고위인사들과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종교인으로서는 모택동의 장례식에 참석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미국과 중국과의 외교관계가 수립된 1979년 3월 30일 스펜서 다블류 킴볼 회장은 일단의 지역대표들과의 모임에서 “우리는 1978년 9월 29일부터 홍콩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만다린어(북경어)로 예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젊은 중국인 회원으로 하여금 중국에서 선교사로 봉사할 수 있도록 저축을 하고 기금을 마련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중국의 문은 열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이미 교회의 지도자들은 미국 연방 상원의 대외 관계위원회(Foreign Relations Committee) 위원장인 아이다호 주 출신 프랭크 쳐치(Frank Church) 의원에게 부탁해서 정부로 하여금 브리검 영 대학교 영 앰배서더(Young Ambassador) 민속음악무용단이 공연하도록 교섭하여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내에서 공연을 갖게 되었으며 이 때 제임스 파으스트(James E. Faust) 사도가 수행하였다. 그는 50여년전 맥케이 사도가 헌납기도를 드린 자금성에서 선교사업이 곧 시작될 수 있도록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다.

1980년 북경정부는 영 앰배서더 민속음악무용단을 다시금 초청하였는데 이 때는 고든 비 힝클리 부대관장이 수행하였다. 1981년에는 브리검영 대학의 인터내셔널 포크 댄스 무용단이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내 최고수준의 극장에서 수많은 고위 관리들도 관람하는 가운데 공연을 하였다.

 

이와 같은 친선관계는 열매를 거두기 시작하여 1981년 초 주미 중국대사는 솔트 레이크 시티를 방문하여 교회지도자들을 만나고 브리검 영 대학에서 연설하였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몰몬 태버나클 합창단의 주요인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세계 최대의 족보기록 보관소인 그래나이트 마운틴(Granite Mountain)을 시찰하였다.

 

1983년에 각각 다시금 초청된 인터내셔널 포크댄스 무용단과 영 앰배서더 민속음악무용단을 따라 두사람의 사도가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의 지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1983년에 미국정부가 대만에 무기를 팔기로 결정함에 따라 위싱턴과 북경과의 관계는 악화되어 여러 미국 방문단의 여행이 중국정부 보복으로 취소되었으나 두 무용단의 공연계획은 취소되지 않았다.

 

1984년 1월 중국의 조자양 총리는 1949년 이래 중국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는데 워싱턴으로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 진주만을 시찰한 후 교회가 운영하는 폴리네시아 문화센터(Polynesian Cultural Center)를 구경하고 마아빈 애쉬튼(Marvin J. Ashton) 사도와 브리검 영 대학 하와이 캠퍼스의 요인들을 만나 교육 및 문화교류 프로그램을 여러 가지로 논의하였다.

 

1984년 4월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심장수술전문 외과의사이며 사도인 럿셀 엠 넬슨 박사는 두달간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 의학계에 최신의 정교한 심장수술법을 전수하였다. 교회는 중국대륙에 선교사업 문호가 활짝 열리기를 기대하면서 놀랄 만한 끈기로 필요한 정지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이 같은 교류가 계속되면서 후기성도 회원 중 중국에 살게 되는 가족이 생기고 또 중국인으로서 해외에 있는 동안 개종한 회원들이 돌아가 살게됨으로써 이들을 위한 작은 교회가 북경과 상해 등 두곳에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90년에는 북경의 교회를 위하여 중국인 순회 선교사를 임명함으로써 선교를 위한 또 한발자국을 내디뎠다. (중국의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교회)

 


9. 유태인과 이슬람과도 가까이               

 


후기성도들은 세계적인 시야와 안목을 가지고 전통적으로 기독교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유태인과 이슬람 사람들과도 가까이 지내려고 노력해왔다. 후기성도와 유태인들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상호 존중과 호감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후기성도들은 자기들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요셉의 후손에 접목된 사람들이라 생각하며 유태인은 유다지파의 후손이라 하여 매우 가까이 느낀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는 두 종교는 종국적으로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후기성도들은 자기들과 유태인은 하나님과 특별한 성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광야(사막)에서 시련을 겪고 심한 박해를 받는 등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1840년 조셉 스미스는 유태인인 올슨 하이드(Orson Hyde) 사도를 팔레스타인에 파견하였다. 이것은 유태인이 다시 모여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거의 1백년전 일이다.

 

1841년 10월 24일 하이드 사도는 감람산 위에서 팔레스타인 성지를 유다의 잔류민이 다시 모이게 될 땅으로 헌납하였다. 그 후 19세기와 20세기초에 걸쳐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앞으로 다가올 말일성도와 유태인의 화해를 예언하였고 팔레스타인을 순례하였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후 몰몬들은 선교사업을 그곳에서 일으키려고 노력하였다. 1972년 해롤드 비 리(Harold B. Lee) 대관장은 교회 최고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1979년 스펜서 다블류 킴볼 회장은 부대관장 엘든 태너(N. Eldon Tanner)와 네 사람의 사도와 더불어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그곳에 살고 있는 2천명의 후기성도와 함께 옛날 올슨 하이드 사도가 139년 전에 그 땅에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감람산 위에 올슨 하이드 기념 정원(Orson Hyde Memorial Garden)을 헌납하였다.

 

또한 브리검 영 대학교 종교연구센터의 유태.기독교 연구과 과장인 트루맨 매드슨(Truman G. Madsen)과 예루살렘에 세워진 브리감 영 대학교 예루살렘 연구센터의 소장인 데이비드 갈브레이스(David B. Galbraith)는 이스라엘의 유명 대학인 하이파 대학과 히브리 대학의 교환교수로 강의와 연구를 시작하였다. 갈브레이스는 1972년에 교회의 예루살렘 지부를 조직하여 지부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그 후 지부는 국제선교부 소속의 이스라엘 지방부로 발전하였다. 1972년 이래 1만2천명이 넘는 말일성도들이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근동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연구에 참여하였다.

 

교회는 이슬람 세계에도 진출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슬람은 기독교와는 원수간이며 유태교와도 나쁜 관계에 있다. 1983년 4월에 교회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첫번째 교구를 설치하였는데 1천6백명의 신자들이 수도인 리야드, 다란, 그리고 알코바 등에 흩어져 있는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있다.

 

기독교 종파 중에서 이슬람 국가에 예배당 설치가 허용된 것은 현재로는 몰몬들밖에 없다. 사우디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는 발전하고 있다. 신장 중의 대부분은 일자리를 찾아 사우디로 온 미국 사람들이나 이들의 조용한 노력으로 사우디 사람 가운데도 신자가 있다. 사우디에서는 기독교회의 활동이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후기성도들은 이와 같은 종교적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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