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말일(후기)성도 기억의 책>에서
 

황종섭 형제의 일대기 - 기억의 책

 


황종섭-진희 (뒤)규철,규선

 

황종섭 형제 : 서울 동부 지부장, 서울 지방부 고등평의원, BYU 아시안 와드 감독

     1938 충청남도 천원군 병천면 병천리 신촌이라는 마을에서 아버지 황상호와 어머니 박문남의 슬하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의 어머님께서는 의사나 산파의 도움 없이 집에서 심한 진통을 겪으시며 낳으셨다.  나는 원래 6월 16일에 태어어났으나 호적상의 착오로 10 25일로 되어 있다. "새마을"이란 뜻을 지난 신촌은 20 가구의 농민들이 모여사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을의 집들은 거의 모두가 초가집들이었으며, 오직 들리는 소리라고는 소들의 목에 달린 방울소리와 숲속의 나뭇가지를 스쳐가는 바람 소리로 이루어진 자연의 교향곡일 뿐 너무나도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마을이었다.

봄이 오면 이 마을의 산들은 온통 분흥색 진달래로 덮였으며, 여름이 오면 산새들과 여치, 매미 온갖 곤충들의 행복한 노랫소리로 조화를 이루었으며, 초저녁에는 앞뒤 논에서 부르는 개구리의 합창이 요란하게 들리기도 했다. 마을에는 그때 만 해도 전기의 혜택이 없었으므로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 저녁이면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마자 뒷마당에 멍석을 펴고 누워 하늘 깊숙이 그리고 그렇게도 총총히 박힌 별들을 바라보며 노래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보통이었다. 나의 어머니와 나는 이 많은 별들을 세려다가 반도 세지 못하고 잠이 들기가 일쑤였다. 가을이 되면, 하늘은 높고 푸르며 공기는 깨끗하고 상쾌했으며 들은 온통 무르익은 곡식으로 덮여 황금 바다를 이루었다. 추운 겨울이 닥치면 산과 들과 초가 지붕은 온통 눈으로 덮여 은 세계를 이루었으며, 이러한 겨울이면 질그릇 화롯불에 밤이나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몸을 녹이곤 했다. 이곳에는 사탕이나 과자를 파는 상점이 없었으므로 다른 군주전부리가 없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부터 3년간 심한 가뭄으로 쌀은 물론 다른 곡식도 거의 추수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 어머님도 영양 부족으로 나에게 주실 젖을 생산할 없어서 나의 아버님께서 어렵게 구하신 설탕을 물 타서 그것으로 나의 유아시절을 연명했다고 한다. 하루는 나의 어머님께서 가족들의 끼니를 위해 산에 올라가 도토리를 주우시는 동안 나는 허기로 인해 울기운도 없어 나의 어머니 등에 업혀 목과 머리가 힘없이 쳐진 채 하루 종일 잠만 잤다고 한다.

이러한 유아기의영양실조로 인해 유년 시절에도 나는 허약했으며, 감기, 말라리아, 기생충에 감염되어 거의 나날을 병마에 시달렸다. 그 당시 의사나 적당한 약이 없었으므로 여러번의 죽음의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며 나는 몸속의 저항력 만으로 나을 때까지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께 얼마나 많은 걱정을 끼쳐 드렸을까?

어린 시절에 나는 혼자있기를 좋아했으며, 시냇물가에서 돌을 모아 궁전을 만들며 공상의 날개를 펴기를 좋아했다. 나는 또한 아버님을 매우 따랐으며 아버님을 따라 논밭에 나가거나, 아버님께서 가끔 저녁에 마을에 내려가 친구들과 어울리실 때에도 나는 아버님을 따라가기도 했다.

내가 다니던 병천초등학교는 신촌에서 약 1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병천 읍내에 있었으며, 이 병천읍은 저 유명한 유관순 열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의 총칼 앞에 맨 손으로 저항하다가숨을 바친 장송다. 나는 학교에 가기를 무척 좋아해서 누구보다 먼저 학교에 갔으며, 오후에는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숙제를 하거나 아름다운 공상을 즐기곤 했다.

나는공부를 썩 잘했으며 특히 음악과 수학을 좋아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이들과 놀기보다는 집에서 책을 읽거나 부모님들과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했으므로 동네 아이들은 나를 '안방 샌님'이라고 불렀다. 초등학교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많지만, 특히 선생님들에 관한 추억으로 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이종학 선생님에 관한 추억이다.

이종학 선생님은 아주 가난 선생님이었으나, 자기 개인보다는 우리들의 장래에 대하여 더욱 염려하셨다. 정규 수업이 끝난 다음에도 가끔 선생님은 우리들을 모아놓고 해가 질 때까지 가르치시곤 했다. 언젠가 번은 선생님의 양복저고리가 퇴색하여 뒤집어 다시 꿰매었기 때문에 단추구멍이 양쪽에 뚫려 있었던 것을 기억이 난다. 이종학 선생님은 나를 4학년 때부터 반의 수학을 가르치는 보조교사로 뽑으셨다. 선생님의 이와 같은 헌신적인 가르침으로 우리 학생들은 모두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다.

이때의 중학교 입학시험은 국가고사였다. 전국적으로 같은 시험이었기 때문에, 시험의 성적에 따라 국내 어느 학교에든 입학을 있었다. 시험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험이었으므로 우리는 이종학 선생님의 지도 아래 열심히 공부했다. 번은 해가 져서 어두워질 때까지 공부하다가 전깃불이 없었으므로 달이 떠오를 때를 기다렸다가 달빛 아래서 좀 더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시험 성적은 전국에서 제일 좋은 중학교인 경기중학교에 입학할 있는 점수였으나, 집안 경제 사정으로 서울로 유학할 수가 없었다. 나는 우등생으로 병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병천중학교를 다녔으며, 1956 3 31일에 병천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3 동안 무엇을 배웠는지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무렵 우리는 6·25 동란을 겪었으므로 선생님들은 자주 바뀌었고 마땅한 교재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적군이 쳐내려왔을 때에는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철모르는 어린아이로 아무것도 모르고 적군의 템크에 오르기도 하고 적군의 노래를 목청 높 여 불러 부모님들을 놀라게 했다.

I · 4 후퇴 때에는 상황이 달랐다. 이때에는 우리 마을 주민들도 마을을 비우고 피난길을 떠나야 만 했다. 아주 추운 겨울아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식량과 약간의 필수품들을 소의 등에 싣고 빙판 위를 도보로 피난길에 올랐다. 소는 얼음에 덮인 길을 빨리 걸을 없었으며, 마침내는 무거운 짐을 실은 길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우리는 우리 뒤를 바싹 추적하고 있는 적군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며, 이 피난 중에 우리는 약간의 쌀과 소금만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얼마 후, 전쟁은 끝나고 우리는 평화를 되찾았으며 정상 생활이 회복 되기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의 추억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음악 시간이었다. 음악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오, 나의 태양 '스와니 강',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산타루치아' 등 아름다운 노래를 가르쳐 주셨다.

나는 이 노래들을 매우 좋아했으며 학교가 끝난 후 집에 돌아와서는 가끔 부모님들에게 이 노래를 불러 드리기도 했다. 이 즈음 나의 가족은 아직도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므로 나는 살을 여미는 듯한 추운 겨울에도 한 벌의 교복 외에는 속내의라든지 장갑이나 외투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우비나 우산도 없이 흠뻑 젖은 옷으로 학교에 가야만 했으며, 이런 상황에서도 고등학교 입시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도 나는 행운아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의 두 형님들은 모두 보통학교를 중단 해야 했으며, 나의 누님은 그나마 보통학교 문 앞에도 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즈음 나의 가족들은 끼니를 거르는 때가 많았으며, 저녁상에는 주로 풀대죽이나 그릇 수를 늘리기 위해 뜯어 넣은 멀건 나물죽이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나의 부모님들은 가정 형편상 나를 고등학교에 보낼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나는 청천 벼락을 맞은 듯 기가 막혔으며, 나는 농촌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보이거 않는 작은 희망을 품고 1956년 봄에 부모님 슬하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내가 서울에 도착하니, 아직도 부서진 건물들이 여기저기 보였으며 성한 건물들의 벽에는 기관총 자국이 남아 있는 등 전쟁 중의 쓰라린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얼마간 나의 누님 황순섭 그리고 매형 배달준 씨의 댁에 머물러 있기로 했다. 나의 매형은 목수였으며, 술에 취해 누님을 구타하기 일쑤였으므로 나의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으나, 이곳 외에는 갈 곳이 없었으므로 별도리 없이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나는 다행히 친구들의 도움으로 몇푼 안되는 월급이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직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월급으로는 나의 소원인 고등학교에 다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열심히 일했으며 근근히 모은 돈으로 1957년 마침내 대경고등학교 야간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한 학기 정도 다니고 나니 그 다음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그나마도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서울경리고등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곧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구한 운명의 장난인지 내가 입학한 지 일 년도 못 되어 이 학교는 재정난으로 문을 닫아야만 했다.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1958년 여름 나는 앤더슨 장로님과 테일러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이분들과 함께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복음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1958년 10월 5일 라스머슨 장로님으로부터 침례를 받고 테일러 장로님의 안수로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1959년에 나의 누님댁은 이북에 가까운 동해안 어촌인 속초로 이사를 하게 되었으며, 나는 당장 갈 곳이 없게 되었으므로 당분간 교회의 번역 사무실에서 자게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정대판 형제님과 이인순 형제님, 이 두 훌륭한 형제님들을 알게 되었다. 어느날 나는 이분들과 번역실 마루에서 취침하게 되었는데, 내가 막 잠에 들 무렵 나는 청대판 형제님께서 자신의 베개를 나의 머리 밑에 넣어 주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분의 너그러우심과 사랑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인순 형제님은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이었으며, 그분 역시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웠으나 그는 언제나 그의 식사를 내게 나누어 주셨다. 이분들에게 더 이상 폐를 끼쳐 드릴 수 없었으므로 얼마 후 나는 부모님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 입교한 사실 이외에는 별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이 시골로 하향하여 아버님의 원두막에서 참외밭을 지키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서울에 있는 친구로부터 자기가 알고 있는 곳에 직장이 생겼으니 즉시 상경하라는 엽서를 받았다. 이직장 역시 보잘것 없는 직장이었으나 나는 다시 한번 향학의 꿈을 안고 상경하게 되었다. 누님댁이 속초로 이사를 한 후여서, 직장은 생겼으나 몸을 의지할 곳이 없게 되어 난처하게 되었다. 당시의 월급이 하숙을 할 만큼 넉넉지도 않았다. 이때 바로 홍순모 형제님께서 나를 데려다 한 가족처럼 대해 주셨다.

1959년 여름, 김호직 박사님께서 별세하셨다. 이분은 한국 최초의 개종자요, 한국에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가 합법적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터주신 개척자이시다. 우리 성도들은 그분의 댁에 모여 그분께서 가장 좋아하시던 찬송가 '오 높은 영광 보좌에' '예수께 오라'를 사흘 저녁을 새워 가며 부르고 또 불렀다. 그분은 문교부차관을 지내셨으므로, 그분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성황리에 거행되었다.

나는 여러 회원들과 함께 이 장례식에 참여하는 동안 특별한 영을 느낄 수 있었으며, 이 어려운 상황 중에 성도들은 굳게 하나로 뭉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60년 9월, 향학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을 받게 되었다. 훈변은 육체적으로 견디기 어려웠으며, 정신적으로는 향학의 꿈이 깨어진 아픔으로 몹시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입대 당시 모든 훈련병들은 지능검사를 했는데, 나의 지능이 높게 평가되었으므로 나는 전반기 기초훈련만 받고 후반기에는 특과학교로 배출되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특과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행정병으로서 그나마 비교적 편안한 군대생활을 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전반기의 기초훈련을 무사히 마쳤다. 특과학교로 배출될 훈련병들은 5두 배출대로 모였다. 이곳에서도 운명의 장난은 나를 그대로 내머려 두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훈련병까지 뽑아 특과학교로 보내고, 나는 후반기의 훈련도 없이 최전방으로 배출되었다.

꼬박 3년 군대 복무기간 중 나는 몰몬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번역판이 없었으므로 영어로 읽어야 했는데, 나의 중학교 영어 실력으로는 거의 모든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아야만 했다. 나는 또한 지혜의 말씀을 완전히 지켰으며 군대생활의 거친 욕설을 입에 담지 않았다. 제대 후 1964년 봄, 나는 교회회원들을 모아놓고 영어로 된 몰몬경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때 나는 지부장이신 클레멘트 장로님으로부터 내가 복음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다는 통지를 받게 되었다.

게일 E. 카 선교부장님께서 나에게 장로선권을 부여하시고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복음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전파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부여해 주셨다. 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지혜와 힘과 그리고 건강을 축복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선교부장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축복을 주셨다.
"그대가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면 그대의 소망인 더 큰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리라." 나는 이 약속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나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고등학교 졸업 없이 대학에 간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서울 동부에 자리잡고 있는 성동지부로 배출되어 그곳에서 나의 선교사업은 시작되었다. 나의 선임 동반자는 캐나다에서 나온 러셀 장로였다. 현재 그분은 유타주 스프링빌에 살고 있다. 나는 이 성동지부에서 단 한 번의 이동도 가 보지 못하고 선교사업이 끝날 때까지 한 곳에서만 봉사했다.

선교사로 부름받은 지 약 2개월 후 어느 날 선교사 보고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부지부 장로들의 숙소로 가게 되었다. 나의 동반자와 나는 이 모임에 조금 늦게 되었다. 우리가 막 허겁지겁 방에 들어서자마자 카 선교부장님은 모임을 중단하시고 나를 다른 방으로 불러 접견하셨다. 이 접견에서 선교부장님은 나를 성동지부장으로 부르셨다. 선교사로 부름을 받은 지 겨우 2개월밖에 되지 않은 풋내기 선교사인 나는 이 부름을 받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 부름을 받고 나니, 보통은 회원들의 이름을 암기하지 못하던 내가 왜 지난 2개월 동안에 성동지부 회원들의 이름을 거의 다 알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지부장으로 부름을 받자마자 나는 신권회, 주일학교, 상호부조회, 그리고 상호향상회 등 모든 보조조직을 모두 개편해야만 했다. 나는 30여 명의 회원들의 명단을 만들어 금식과 기도를 한 다음 한 사람 한 사람 접견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한 사람도 부름을 거절한 사람이 없었다. 내가 접견한 모든 회훤들은 기쁘게 부-름에 응했으며, 성동지부는 나날이 발전했다.

우리들은 용두동에 새 건물을 지었으며, 아시아 대륙에서는 첫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 예배당인이 건물을 1966년 10월 9일에 하느님께 헌납하였다. 지부장인 나는 이 헌납식의 사회를 보았는데, 이 모임을 사회하는 동안 나는 행클리 사도님과 다른 여러 총관리역원들에게 우리 회원들의 감사한 마음을 그분들의 언어로 전달하려고 했으나, 여러 번 연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긴장한 탓으로 나의 혀가 굳어 말문이 막혔던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뜨거워짐을 금할 수가 없다.

1966년 6월 15일 나는 선교사로부터 해임되었으나 1967년 ,3월까지 지부장으로 계속 동부지부라는 새 이름을 가진 구 성동지부에서 봉사했다. 선교 기간이 거의 끝날 무렵 나는 선교사업 기간을 연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나의 선교부장이셨던 스펜서 팔머 부장님은 나의 다른 계획들이 지연될 것을 염려하시어 나의 요청을 거절하셨다. 그분의 이와 같은 예리하신 통찰력과 이해력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복음선교사로 지부장직을 겸하여 봉사하고 있을 동안 잊을 수 없는 경험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팔머 선교부장님이 우리 선교사 숙소를 방문하시던 널에 생긴 일이다. 이 한국 땅에서 예수님을 대표하시는 선교부장님을 영접하기 위해 나의 마음 속에는 마치 주님을 영접하는 자세로 온 주위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허름한 식탁이지만 깨끗이 빨아 다리미질한 흰 보자기를 덮어 최대한으로 환경과 내 마음을 깨끗이 한 다음 선교부장님을 기다리던 나의 가슴에 특별하신 주님의 사랑을 가득히 느낄 수가 있었다. 이 특별한 느낌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팔머 선교부장님께서는 모든 중요한 업무를 제쳐놓으시고 그날 하루를 완전히 나와 함께 보내셨다. 선교부장님과 나는 함께 많은 회원들과 구도자를 방문했고 저녁 식사는 내자호텔에서 비싼 스테이크를 사주셨다. 그날 보여 주신 팔머 선교부장님의 사랑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선교사업을 마친 다음 나는 1967년 8월부터 1969년 7월까지 한국선교부 인쇄실에서 인쇄사로 일했으며, 그 후에는 슬로버 선교부장님의 번역사로 근무했다. 이 기간 동안 나는 대학입학 자격 국가검정고시를 열심히 준비하여, 1968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에서 본 이 시헝을 무난히 합격하였다.

1969년 3월 나는 서울보건전문대학에 입학하여 식품공학을 전공하였다. 낮에는 선교부 사무실에서 번역사로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에 나가 또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던 중 1971년 어느 가을 오후였다.

나는 슬로버 선교부장님께 나의 유학의 희망을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슬로버 선교부장님은 한참 동안 듣고만 계시더니 하와이 선교사훈련선교부에 한국어 교사로 추천할 테니 그곳으로 가라고 하셨다. 이것은 나에게 정말 상상도 해 보지 못한 뜻밖의 일이었다. 이것은 내가 하와이에서 대학을 다닐 수 있는 특별한 기회였다.

나는 곧 모든 서류를 작성하여 외무부에 제출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경우 여행사나 대리업체들로 하여금 서류를 제출하는 것이 통례였으나 나는 내가 직접 했다. 그리고 보통 몇 달 걸리는 결재가 나의 여권은 3일 만에 나왔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더욱 신기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건이다. 나는 외무부 여권 분배 창구로 갔다. 물론 여권이 나왔다는 통지서를 지참하고 갔다. 그러나 담당직원은 여권을 찾을 수 없으니 내일 오라는 것이었다. 그분이 시키는 대로 다음날 다시 갔다. 그분은 아직도 찾을 수 없으니 다음날 오라는 것이었다. 며칠을 이와 같이 두말 없이 돌아섰다가 다음날 찾으러 가기를 며칠 계속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그 담당직원이 말하기를, 수위실에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사무실 출입허가 명찰을 달고 사무실로 들어와 직접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명찰을 달고 그분의 사무실로 들어가 그분의 서류함에서 수십 개의 여권이 한데 묶어져 있는 한 뭉치를 골라 그곳에서 한 여권을 무작정 꺼냈다. 놀랍게도 단 한 번에 꺼낸 여권이 나의 여권이었다. 나는 그 담당직원에게 내 여권이 여기 있다고 전해 주었다. 그분은 여권을 펼쳐 보며, 내계 그리스도인이냐고 물어 보았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분은 말하기를 "어쩐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어쩐지 나는 멍청이와 같이 화 한 번 내지 않고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했다는 뜻인 것 같다.

1972년 2월 2일, 나는 호놀룰루 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여 브래샤 형제님 내외분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이분들은 한국에서 오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사랑과 보살핍을 주시는 훌륭하신 분들이다. 나는 하와이 교회대학에 등록하였으며, 같은 학교에 위치하고 있는 선교사훈련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그 수입으로 학자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게 되었다. 처음 도착하니 어디로 가서 무슨 서류를 제출해야 되는지 도무지 얼떨떨했으나, 친절하신 브래샤 형제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등록을 마치고 조금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는 뜻밖에도 나를 교회로 인도하신 앤더슨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분은 이 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치고 있었다.

브래샤 형제님과 앤더슨 형제님은 한국 초창기의 선교사로서 위대한 신앙을 보여 주신 분들이다. 한때 당시 한국의 위생환경이 깨끗지 못했던 탓으로 일곱 선교사들이 모두 한꺼번에 간염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일본에 있던 북극동선교부 선교부장님이셨던 앤드류 선교부장님이 급히 달려오셔서 이 일곱 선교사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 병을 앓고 있던 선교사들은 모두 한결같이 말하기를 "나는 죽어도 이 한국 땅에서 주님을 섬기다가 죽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위대한 신앙을 지닌 초창기의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은 싹이 터서 무럭무럭 자라 오늘날과 같이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으며, 이분들의 모범은 나와 같은 회원들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고 있다.

나는 카 선교부장님께서 수 년 전에 나에게 교육의 기회를 축복하신 그 축복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하와이에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한국정부에서 허락하는 당시의 최대 금액인 100달러 이외에 손에 쥐고 있는 돈이 없었으므로, 학비와 책값 그리고 생활비 전체를 빌려야만 했다. 이 빌린 돈은 가을 학기 전에 갚아야 하기 때문에 나는 열심히 일해야 했으며, 학기 중엔 하루에 4시간, 그리고 여름방학 중엔 낮에 8시간, 밤에 닮R}, 하루 16시간을 일해야만 했다. 낮에는 하수도 공사장에서 땅을 팠으며 밤에는 학교 인쇄소에서 인쇄기계를 돌렸다. 그러니 너무나 피곤하여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척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하와이 교회대학에 다니는 동안 나는 일본인 3세인 진 s. 다구마 자매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이 자매 역시 불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하와이 교회 대학 시절에 말일성도 교회로 개종한 자매이다. 이 자매는 또 일본에서 선교사업을 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자매였다. 우리는 1973년 12월 15일 하와이성전에서 월치 성전장님의 주례로 성전결혼을 올렸다.

양가의 부모님들은 회원이 아니어서 성전결혼식에 참여할 수 없었으므로 가까운 대학 친구들과 직장 친구들 그리고 몇몇 교회 지도자들만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들이 서로 사귀고 있는 기간 중에 우리 둘은 모두 하와이성전 의식집행자로 부름받아 봉사하고 있었다. 나의 집사람은 일본에서 오는 성도들에게, 그리고 나는 한국에서 하와이성전을 방문하시는 성도들에게 의식을 집행했다. 이 성도들의 대부분은 생전 처음으로 성전의식을 받으시는 분들이므로 이 의식들은 참으로 감격적이며 의미심장한 의식이었다.

그 후 약 일 년이 지난 1975년 1월 7일 우리들의 첫 아들 규철이가 태어났으며, 그리고 다음해인 1976년 6월 26일에는 둘째아들 규선이가 태어났다. 나는 신권의 권능으로 이 두 아이들에게 이름과 유아축복을 줄수 있는 축복을 누렸다. 4년간의 고초 끝에 나는 마침내 브리감 영 대학교 하와이분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여 제21회 졸업생이 되었다(이때 하와이 교회대학이 브리감 영 대학교 하와이분교로 이름을 바꾸었음).

그러나 나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두 번째의 학사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좋아하던 수학과 음악을 공부하기로 했다. 나는 이 두 번째의 학사과정도 잘 마치고 1981년 6월에 다시 한번 우등생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이 무렵 나는 가족을 이끌고 한국에 귀국하여 현재 한국성전이 서 있는 신촌에 자리잡고 있던 한국 서울 신학연구원(종교 교육원)에서 교수로 얼마간 일하게 되어 나의 아내와 아이들은 처음으로 한국에 계신 조부모님을 상면하게 되었다. 나에게 축복하신 교육의 약속은 아직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유타주 프로보에 있는 브리감 영 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을 전공하여 1989년 8월에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유타주 공립대학(Utah Valley State College)에서 수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으며, 나의 가족은 브리감 영 대학교 근처에 집을 마련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는 그동안 미국에 살면서 감독단 보좌, 주일학교 교사, 선교사훈련원 지부장단 보좌, 에지몬트 서스테이크 제,3와드 대제사 그룹장 제2보좌 등 여러 직책을 맡아 보았으며, 현재는 브리감 영 대학교 아시안 학생와드의 감독으로 봉사하고 있다.

나의 교육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나의 자서전 역시 끝맺음을 본 것은 아니다. 나는 대학교 강단에서 강의를 하고 있지만 더욱 공부를 계속할 계획이며, 이제 머저않아 선교사업에 참여하게 될 두 아이들을 잘 키워 볼 작정이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개척자라고 자부하며 앞으로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우리는 부부 선교사르서 다시 봉사할 계획이다. 나는 작고 보잘것 없는 시골 신촌에서 태어나 많은 경험을 쌓는 동안 술한 어려움들을 오랫동안 견디어 왔으나, 내가 말일섭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 입교한 이후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축복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나와 늘 함께하시며 나의 길잡이가 되시는 성령의 힘과 한국 고유의 문화와 그리고 부모님들의 현명하신 가르침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내가 이곳에 언급하지 않은 많은 분들의 영향 역시 나의 생애의 기록에 의미 깊은 상을 펼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오늘날의 나를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분들의 가르침과 모범,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축복과 내가 작고 큰 결심들을 해야 할 한 순간 순간마다 올바른 결심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선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라고 할 수 있겠다.

나의 아내는 불평 없이 자기의 일에 충실한 자매이며,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지극한 신앙심이 깊은 자매이다. 나와 결혼할 당시 아내는 내가 가는 곳이 한국이라면 나를 따라 한국인이 될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아내는 한국인을 매우 사랑하고 있으며, 많은 한국인 자매들처럼 온순하고 착한 성품을 지니고 였는 자매이다. 현재 나의 아내는 브리감 영 대학교 평생교육과(Continuing Education Department)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이호남 부장님, 김차봉 부장님, 그리고 송영학 형제님과 같을 한국인 교수님들을 도와드릴 기회가 있으면 매우 기쁜 모양이다.

나의 두 아들, 규철이와 규선이는 팀뷰(Timpview) 고등학교를 거쳐 BYU에 다니고 있으며, 교회생활도 충실히 하고 학교에서도 모두 공부도 썩 잘하고 있다. 이 아이들이 선교사업을 나가게 되는데, 세미나리를 통하여 얼심히 준비했다. 물론 주님의 뜻이면 어디든지 가서 봉사해야 되겠지만, 나의 욕심으로는 이 아이들이 내가 사랑하는 나의 조국인 한국에 나가서 봉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규철이는 브라질에서 선교사업을 마치고 BYU를 졸업하고 현재는 UCLA의 대학원에서 화학공학을 공부하고, 규선이는 한국 부산선교부에서 봉사하고 기금은 BYU에 재학 중이며, 선교사훈련원에서 한국어 교사를 관리하고 있다.

나의 가족은 서로의 바쁜 생활 중에도 하루에 한번씩 함께 모여 경전을 읽고 있으며, 가정의 밤 시간에는 주일학교, 신권회, 성찬식 그리고 상호부조회에서 배운 바를 토론하기도 한다. 나는 이와 같이 행복한 가정을 축복해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깊은 감사를드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기뿔 때나 슬플 때나, 또는 괴로울 때나 편안할 때, 어느 때든지 교회의 회원이 된 후 40년 동안 한 번도 나의 신앙을 버려 본 적이 없다. 앞으로 남은 여생도 열심히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갈 작정이다.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길가에 흩어져 있는 작은 돌을 보아도, 그리고 스쳐가는 바람의 감촉으로부터도 나는 주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낀다. 나는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질서 정연하게 이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시며, 언제나 우리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국의 <초기 말일성도>에서 발훼하여 수정함).


황종섭 형제의 일생기 후편

'한국의 초기 말일성도'라는 책에 실린 나의 일생기의 후편을 써 달라는 최수영 교수님의 간곡한 청을 거절할 수 없어 변변치 않은 개인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막상 개인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혹시 독자들에게 나의 이야기가 나 자신의 자랑처럼 느껴지게 된다면 용서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주님의 손길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었던 몇 가지 일들을 적어 본다.

전편에서 나의 군 생활에 대해 약간 언급한 바 있는데, 나는 후반기 교육 없이 최전방으로 배출되었다. 최전방 부대에 도착해 보니 동상에 걸린 병사들 그리고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어려운 전방 근무에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고 있는 병사들을 보았다. 전방 부대에 도착한 20여 명의 초년 병사들은 도착한 다음날 아침 연대본부 앞에 집합했다. 소령 계급장을 단 연대부관이 우리에게 요리할 줄 아는 병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취사병이 되면 고된 훈련과 야간보초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이 번쩍 올라갔다. 한 열 명 정도는 손을 든 것 같다. 연대 부관은 나를 지적하며 무슨 요리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땐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은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한번 보기만 하면 짜장면이든 울면이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르 대답했다. 그 연대 부관은 나를 뽑아 장교식당으로 데려갔다. 당시 전방의 장교 식당은 말이 식당이지 통나무를 잘라 얽어매어 식탁과 의자를 삼았으니 그 건물의 허술함은 짐작이 가리라 본다. 그 식당에는 병장 한 사람이 산에서 나무를 해다 밥을 지어 연대본부 장교들에게 식지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 병장의 후임으로 나를 데려간 것이었다. 나는 매일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와야 했고, 불을 때고 무를 썰고 찌개를 끓이는 것을 배웠다. 그때 그 병장은 나에게 타 부대의 장교가 오면 밥을 주지 말라고 나에게 말했다. 쌀을 아껴야 팔아서 제대할 때 용돈을 가지고 나갇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연대의 부관과 어떤 대위 한 분이 점심식시를 하러 왔다. 나는 그 대위에게 "우리는 정량 급식을 하기 때문에 죄송하지만 장교님 식사는 없습니다."라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똑똑히 말했다. 우리 연대 부관은 나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자기의 밥이라도 빨리 갖다 드리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에게 식사를 갖다 드렸다. 그 대위는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나를 계속 유심히 관찰하더니, 식사가 끝나자 나의 이름이 무엇이며 고향은 어디냐고 물어 보았다. 그리고 주산을 놓을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한 ,3급쯤 된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연대본부 인사과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없이 인사과 사무실로 갔더니, 그 대위는 내게 주판을 주며 옆에 있는 병사에게 숫자를 불러 보라고 했다.

나는 그것이 시험인지 몰랐기 때문에 태연히 놓았으므로 틀리지 않고 잘 놓을 수가 있었다. 그때 그 대위는 말하기를 "나는 사단사령부 부관참모부 인사과장인데, 나하고 같이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저는 우리 부대에 정이 들어서 다른 부대에는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분은 잔말말고 따라오라고 말하고 그의 부대로 돌아갔다. 1주일 후 사단사령부 부관참모부 인사과로 전출하라는 특명이 내려왔다. 나는 그곳에서 사무병으로 아주 편안하게 군대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주산놓기를 좋아했다. 언제 어디에 쓸는지 모르지만 그저 재미있어서 틈나는 대로 연습을 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목숨이 위험한 최 전방 보초병으로부터 인사 검열 나온 검열관에게 밥 안 준다고 큰소리쳤다가 편안한 부대로 전속될 것을 미리부터 준비시켜 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때 나를 데려간 그 장교는 강신일 대위였다. 그 당시 나는 높은 사람에게 아부하지 않으려고 고맙다는 인사 한 번 못했다. 이제 어디서 그분을 만나면 크게 대접해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이 부대에서 주위로부터 신임과 사랑을 받으며 편안한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대할 무렵 많은 상사로부터 장기복무를 신청할 것을 권고받았다. 사실 나는 이로부터 많은 유혹을 받기도 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내가 사회에 나가면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군에 있으면 현 보직에서 편안하게 일할 수 있었으며, 입을 것과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찰나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용기를 주시어 제대를 결정하게 하셨다. 만일 내가 군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이 대학교수가 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업의 기회도, 그리고 나의 착한 아내를 만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인생의 교차로에서 내가 가야 할 길로 나를 인도해 주신 주님의 손길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다음은 내가 대학원에 진학할 때 있었던 이야기를 적어 본다. 1984년 내가 BYU 대학원에 원서를 제출할 무렵 거의 동시에 하와이에 있는 하울라와드 감독단 제보좌로 부름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겐 혼란이 일어났다.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감독단에서 봉사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숙사 신청이라든지 장학금 신청 같은 것을 해놓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성전에 들어가 기도를 해 보았지만 분명한 대답은 없었다. 그래서 감독님과 접견을 신청하고 나의 고민을 말씀드렸다. 감독님은 나의 고민을 들으시고 명언을 들려주셨다. "이 교회는 당신이 있어도 발전하고, 또 당신이 없이도 발전합니다. 그러나 당신과 당신 가족의 장래는 당신만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하였고, 학교 시작 이틀 앞두고 솔트 레이크 행 비행기에 올랐다. 최수영 교수 부부가 나를 데리러 공항에 나와 주셨고 비행기는 새벽 1시경에 도착했다. 솔트레이크성전을 방문하고 싶은 나는 최수영 교수 부부에게 피곤하실 테지만 나를 좀 솔트레 이크성전으로 데리고 가 달라고 했다. 그 성전을 보는 순간 나는 그렇게도 오고 싶었던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온 느낌이 들어, 큰 소리로 "하느님 아버지, 제가 이제야 왔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최 교수님 댁에서 금요일 밤을 보내고 토요일 아침 데저렛 기숙사로 갔다 이 기숙사는 1년 전에 예약을 해야 된다는데 나는 무작정 방을 달라고 했다. 천사같이 마음씨 좋고 미남으로 생긴 청년이 그 자리에서 방을 하나 주었다. 나는 보다시피 나이도 많은 학생이니 독방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한 층에 둘밖에 없는 독방을 또 얻을 수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이 호텔과 같은 기숙사에서 보내고, 학교가 시작된 첫날인 월요일 아침 나는 수학과 교수님 방을 두드렸다.

오늘 학교가 시작되어 직장을 달라고 할 수는 없으나 BYU Hawaii에서 수학을 가르친 경험이 있으니 다음 학기에 기회가 있으면 나를 기억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분은 Class 일정표를 살펴보더니, "한 Class가 선생님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그 Class를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나는 새 학기 첫 날부터 신청하지도 않았던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사실, 즉 기숙사 그것도 독방을 그 자리에서 얻은 것과, 신청하지도 않은 일자리를 학기 첫 날에 얻은 것은 우연치고는 너무나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기숙사 생활과 대학원 생활, 그렇게 갈망하던 고등학교도 못 다닐 때를 생각하면 이 모두가 꿈만 같고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캠퍼스 어느 곳을 가거나,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아도 이름 모를 풀꽃들을 보아도 그리고 스쳐가는 바람을 피부에 느낄 때에도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었다.

기숙사 식당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일이 있다. 하루는 간 요리가 나왔기에 식당 책임자에게 그 요리가 맛이 있었다고 했다. 내가 나이가 많은 학생이므로 그는 자주 나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했다. 하루는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와서 줄을 서 있는데, 그 책임자가 내게 와서 줄 서지 말고 식탁에 가서 앉아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식탁에 가서 앉아 있었더니 그책임지는 손수 간 요리를 가지고 내 식탁으로 와서 하는 말이, 오늘 점심에 간 요리가 나왔는데 당신을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기에 두었다가 이제 가져온다고 했다. 이 얼마나 나를 생각해 주는 식당 책임자 인가! 그 고마운 마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또 한번은, 내가 가르치는 수학 시간이 오후에 있으므로 수업 후에 많은 학생들이 면담을 요청하면 저녁식사 시간에 늦기가 일쑤였다. 그날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하여 거의 문을 닫을 무렵에 식당에 도착했다. 식단은 내가 좋아하는 깨우요리이었다. 부지런히 먹고 좀더 먹으려고 주방 쪽으로 갔더니 모두 치워버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내 자리로 돌아와 남은 음식을 먹고 있는데, 식당 창구에서 내가 빈 손으로 돌아가는 것을 본 학생이 한 접시를 담아 가지고 왔다. 조금 있으니 청소하는 할머니가 빈 손으로 돌아오는 나를 보고 또 한 접시를 담아 가지고 왔다.

내가 가르치는 반 학생들 또한 내 Class를 좋아했다. 한 학기가 끝나면 반 학생들 모두 카드에 고맙다는 말을 쓰기도 하고, 어떤 학생은 "This is the only math class I've liked!"라고 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송재근 형제님 부부, 송영학 형제님 부부, 그리고 김태완 형제님 부부, 이분들은 가족을 떠나 혼자 생활하고 있는 나를 친형제처럼 보살펴 주신 고마운 분들이다. 이분들께 드리는 나의 감사한 마음을 이 지면을 통하여 전해 드리고 싶다. 이렇게 모두 주위에서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 틈에서 생활하니, 그리고 교무과에 가거나 또는 서무과에 가거나 모두들 친절하고 웃음으로 대해 주는 대학 교정에서의 나의 생활은 마치 천국에 온 듯한 느낌 그대로였다. 대학원 교과과정은 일 년 만에 끝내었으나, 그래도 가족과 떨어져 있는 생활은 외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일 주일에 한 번씩 보냈는데, 때로는 그 편지에 붉게 물든 단풍잎을 넣어 보내기도 하고 '애인을 가까이에 느끼다'라는 괴테의 시를 넣어 보내기도 했다.

햇빛이 바다 위를 비출 때
나는 그대를 생각한다.
샘물에 달빛이 깃들 때
나는 그대를 생각한다.
.........

떨어져 있어도 나는 그대 가까이에서
그대는 내 가까이에서 산다
해는 기울고 이윽고 별도 반짝이리라
오 이곳에 그대 있다면.

                                           - 괴테

다음은 대학원을 졸업(1987년)하고 현재 근무하고 있는 유타 밸리 주립대학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기생 두 명과 함께 유타 밸리 주립대학에 시간강사로 취직이 되었다. 시간 강사인만큼 대우도 좋지 않았고 연구실도 없었다. 다른 두 동료들은 늘 불평과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학생들을 성심껏 가르쳐 주었다. 연구실이 없었으므로 복도에 둘러앉혀 놓고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랬더니 그해 첫 해에 전교에서 하나 뽑는 우수 시간강사로 뽑혔다. 몇 해 뒤에는 정규 교수가 되었고 또다시 우수 정규교수로 뽑혔다. 그 후에 주지사상도 받게 되었다. 내가 만일 이러한 상을 받을 목적으로 열심히 일을 했더라면 아마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단순히 아무 바라는 것 없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이런 보상이 따라온 것이라 생각된다. 이 대목에서는 나의 자랑을 하는 것 같아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 엘마서 26장 Ⅱ절에 있는 암몬의 말씀을 빌어 변명을 하고자 한다. "내가 나의 힘이나 지혜를 자랑함이 아니라. 보라, 나의 기쁨이 차고 넘치나니,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뻐하려 함이라."

다음은 최근에 BYU 제일스테이크 아시안와드 감독으로 재직(1997-2001) 당시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지난 3년 9개월 동안 참으로 이 와드의 청남 청녀들을 사랑했다. 어떤 일본 자매는 다른 곳으로 떠날 때에 "당신은 유타에 계신 나의 아버지입니다"라는 쪽지를 남겨 놓기도 하였고, 어떤 중국 학생은 내가 해임될 때 눈물로 그의 사랑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복음 안에서는 나라와 민족과 국경도 없다는 아름다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차를 살 때와 같은 작은 일에서부터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될 경우에까지 주님의 손길은 언제나 나와 항께 해 주셨으며.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에는 나의 노력보다는 주님의 인도하심의 결과라는 굳은 간증을 갖게 되었다.

나는 30이 넘어서 대학공부를 시작했는데, 나의 큰 아들은 30 이전에 박사학위를 받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둘째아들은 나를 따라 대학교수가 될 준비를 하고 있으며, 현재 선교사훈련원에서 한국어 교육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우리 가족은 모두 귀환 선교사이며, 각자가 맡은 교회직책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제 세상적인 축복은 내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나는 영성을 발전시키며 주님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쓰도록 노력하고 싶다. 끝으로 시편 23편을 나의 간증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쉽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 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아멘.
(2002년 7월)
[한국 말일성도 기억의 책]



황종섭(우측), 허옥자, 최남용(2005.1 현재 목포 와드 감독)-정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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