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몬은 기독교인인가?

               - 목 차 -

 [3. 인신공격에 의한 배제]

 [7. 교리에 의한 배제 : 성삼위]

  [서문] 

 [4. 역사나 전통에 의한 배제]

 [8. 교리에 의한 배제 : 기타 ] 

 [1. 단어정의에 의한 배제] 

 [5. 경전(성서)에 의한 배제]

 [9. 결론 - 노트 -  번역후기]

 [2. 허위제시에 의한 배제]

 [6. 교리에 의한 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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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에 의한 배제:
성삼위와 하나님의 본질

 

 기독교 교리인 삼위일체를 후기성도가 믿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기독교인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말이 있어왔다. 다시 한번 논쟁의 핵심은 이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놓여있다. 특히 이 논쟁이 갖는 논리적 결함은 일반 기독교인들이 보통 상삼위(trinity)라는 용어를 모호하게 정의하는데 있다. 이들은 습관적으로 그리고 종종 무의식적으로 신회의 본질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과 서기 451년 찰세돈 종교회의에서 형성된 철학적 진술인 니케아 신경을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과 니케아 신경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법에 있어 서로 다르다.

 

성삼위(trinity)란 무엇인가?

만약 성삼위 교리가 성부와 성자, 성신, 세분이 존재하며 이 세분 모두가 온전히 성스러운 분이라는 신약의 가르침을 뜻한다면 후기성도는 이 삼위론을 믿는다. 이 만큼 간단한 문제다. 조셉 스미스가 1842년에 작성한 예수그리스도 교회의 신앙개조 1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우리는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신을 믿는다." 교회의 침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이름으로"행해진다(교성20:73을 보라).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찬식의 축복문은 성찬을 취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영이 그들과 함께 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되어있다(교성20:77-79). 후기성도는 신회를 구성하는 삼위의 본질에 관하여 성서가 가르치는 교리와 성부, 성자, 성신의 신성함을 철저하게 믿는다.

 그러나 "성삼위 교리가 니케아 종교 회의와 찰세돈 종교회의에서 형성되어 훗일의 신학자와 종교회의에 의해서 다듬어진 교리를 뜻한다면, 즉 하나님은 하나의 물질 속에 있는 세분의 동등한 분이라는 삼위일체를 뜻한다면 후기성도는 이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다. 후기성도는 삼위일체가 성서에 나오지 않으므로 믿지 않는다. 정통파가 이해하고 있는 삼위일체의 핵심적인 용어들-예를 들어들어   (coequal동등한) , (consubstantia 동체어),   (circumincession상호관통), 그리고 정작 본장에서 다루고 있는 trinitas   (삼위)-은 경전에서 찾아볼 수 없다. 성삼위(trinity그리고 희랍어로는 trinitas)라는 용어는 서기 3세기 초에 터툴리안이 처음 사용하였다. 티케아 교부와 찰세돈 교부들은 그들이 새로 고안해낸 교리를 설명해주는 용어를 성서에서 찾아내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경전 자체는 셋과 하나가 어떻게 관련되어있는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성서 작가들은 이 문제, 즉 하나님의 본질이나 하나님의 실체나 하나님의 특성을 철학적으로 다루는 문제에 한결같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훗일의 나타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은 신회에 대한 교리를 다듬은 것이며 초기 기독교리에 관한 희랍적 사고에 대한 질문과 이의 철학적으로 대답하기 위해 다듬어져 만들어진 것이다. 4세기와 5세기의 기독교 지성인들은 성서에 나오는 언어는 이 목적에 사용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부적당하다고 생각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이를 보완하고 개선할려고 했다.

 

종교회의에서 경전이 만들어지는가?

후기성도는 하나님이 하나도 되고 셋도 된다고 믿는다. 둘 다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후기성도는 하나와 셋의 관계를 철학자를 위하여 그리고 철학자의 언어로 정의하려고 했던 성서 이후의 교회의 시도를 거부한다. 만약 어떤 주장이 성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무슨 권위로 사도와 예언자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에 강요할 수 있을까?  어떻게 신학자가 사도들의 교리를 늘리고 교정할 수 있을까? 일개 신학자가 경전에 다른 내용을 첨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후기성도가 분명 성경의 가르침에 추가된 니케아 교리와 찰세돈 교리를 거부할 때 신회에 대한 경전의 교리를 거부한다고 비난 받는다 만약 종교회의에서 나온 말을 보완적인 경전으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허위제시하는 것이다 . 후기성도는 종교회의에서 나온 말이 경전이 된다고 믿지 않으므로 따라서 니케아 종교회의가 성서를 지배하는 하극상을 거부한다.

 후기성도를 비평하는 일부 비평가처럼 한편으로 성서 하나만으로 구원에 충분하다고 믿으면서(sola scriptura 교리)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선 또한 성서에 추가된 신조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모순이다. 어떤 이는 종교회의에서 나온 신조와 가르침이 역사적으로 인정해온 성서 교리를 요약해 놓은 것만큼이나 유용하다고 말할지 모르나 이는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대학 1학년 국어를 제대로 들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진정한 요약이란 요약하려는 자료에서 찾아불 수 없는 개념이나 정보를 도입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성삼위를 설명할 때 불가지하게, 이해할 수 없게 존재하는 추상적이고 절대적이며, 초절적이며, 동체이며, 영원한 공체의 교리가 공정한 "요약"이라 부를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경전 구절은 없다. 요약은 퇴고와는 크게 다르다.

 현대 학자들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나온 성삼위 교리와 성서의 내용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성서에 없는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중 한 학자는 "(만약 역사적인 증거를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훗일에 형성된 교리가 원래의 명제롤부터 연역적 논리라는 과정을 통해 얻어질 수 없어 새로운 요소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피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다. 더 나아가 이 학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앞서 받아들여진 개졈을 상당히수정하지 않고서는 완벽한 삼위일체설이 나올 수 없었다.

 그러므로 후기성도는 종교회의의 "요약"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경전 자체를 고수한다. 요약되지 않은 성경은 있는 그대로가 좋다. 왜냐하면 성경은 전적으로 경전 구절로 이루어진 신조만을  담고 있으므로 후기성도들은 경전의 모든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에 나오는 성삼위

 니케아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가 성서시대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기록상의 문제다. 간단히 말해 삼위일체 교리는 신약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주된 기독교파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는 방법에 대하여 예수회 학자인 에드먼드 제이 포트만은 신약성서의 여러 부분을 조사한  다음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관복음서나 사도행정에는 삼위일체 교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는 또한 신약 "어디에서도 똑같은 신회 가운데에서 신의 삶과 활동에 대한 세분의 뚜렷한 주제를 다룬 삼위설을 찾아볼 수 없으며 요한 복음에서도 삼위설이 나오지 않는다.

 바울의 서신에 관하여 포트만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신약 전체를 검토한 포트만은 고전적인 삼위일체 교리가 성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란 결론을 내린다.

후기성도들은 이 이상 동의 할 수 없다. 후기성도 신학처럼 성서신학은 신회의 새 구성원을 인정하나 니케아 종교회의가 이해하고 있는 대로 이해하지 않는다.  학자들이 이 문제에 동의하고 있음을 하퍼스(Harper's) 성서 사전에서도 다음과 같이 확인해 볼 수 있다. "4세기와 5세기의 종교회의가 정의하는 공식적인 삼위일체 교리는 신약성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바울 신학을 설명하면서 제이 피즈마이어는 성서에 언급된대로 사도 바울의 견해는 불명료하며 니케아 후기 견해로 볼 때 성숙치 못한 견해라고 말한다.  "구약과 신약은 사도 바울이 성신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개념을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울은 후일에 발전된 본질과 물질과 인간에 대한 세련된 정의보다는 인격에 대한 보다 유동적인 개념에 있어 구약과 뜻을 같이 한다. 바울이 명료하지 못한 이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후일에 발전된 교리의 출발점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정통적인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4세기의 신학자 만큼 명료하게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바울의 견해가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에 처음으로 제안되었더라면 부적당하거나 결함이 있는 견해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후기성도들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바울의 생각이 바울 이후의 모든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생각보다 더 명료하며 더 권위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부활하신 주님과 대화하고 셋째 하늘에 붙잡혀간 사람은 신학자가 아닌 바울이었다(행3-6: 골후 12:2-4)

 

 

초기 기독교 글에 나타난 성삼위

  후기성도가 아닌 다른 기독교인들도 니케아 용어가 아닌 다른 용어로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해왔으면서도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어 왔다.  위에서 언급한 니케아 교리에 의하면 심지어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되었다.  여기에다 기독교 성인이었던 사도시대의 많은 교부들과 2세기의 희랍 철학자들도 니케아 후기 정통 기독교의 판단에 따르면 제대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포트만에 따르면 고전적인 성삼위 교리는 사도시대, 즉 2세기 초기의 기독교 교리가 아니었다.  사도시대의 교부에 대해 말하면서 포트만은 "교부들에게는 물론 삼위의 교리도 없었으며 삼위에 대한 문제를 깨닫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 가장 저명한 다른 학자들도 거의 똑같은 말로 동의 하고 있다.  제이 엔 디 켈리는 자신의 저서 초기 기독교 교리에서 2세기 사도시대 교부들에 관하어 "비록 교회의 삼위설의 공식이 곳곳에 남겨졌지만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 삼위설의 흔적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같은 책에서 케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는 최종적인 통합을 위해 3백년 이상을 기다려야만 했었다.  왜나하면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381)에 이르러서야  삼위일체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변증자들은 성자와 성신의 교리에 있어 종속설을 믿는 자들이었다.  즉 성자와 성신이 동등한 신이 아니라 성부에 종속된 신으로, 심지어는 성자의 성신의 신성이 성부에 달린 성부의 창조물로 보았던 것이다. 비록 조심스럽게 변명조로 인정하기는 하지만 심지어 정통자들도 이를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종속설은 첫 3세기의 기독교 가르침에서 두드러진 교리였으며 성 저스틴과 오리겐과 같은 정통 교부의 주된 교리였다.
  요하네스 콰스텐은 그리스도를 "뜻에서가 아니라 숫자상으로 두 번째 하나님"으로 보았던 성 저스틴 마터에 관하여 "저스틴은 로고스(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에 관한한 종속설을 지지했다."  오리겐 때 까지는 변증자들은 니케아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성부로부터 자신을 표현하고 나서야 비로서 로고스(그리스도)가 아들이 되었다고 이해 했으며 로고스와 성신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간략히 말하자면 엄격한 니케아 표준에 비추어 볼 때 초기 기독교 변증자들이 이해한 하나님은 그릇된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 초기 변증자들을 강력하게 옹호하며 후기 니케아신학에 근거 하여 변증자들을 판단하거나 그들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것은 "크게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본인도 동의하나 본인은 또한 사도 시대의 교부와 희랍 변증자들이 비록 니케아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기는 하지만 참된 기독교인으로 강력하게 옹호될 수 있다면 동시에 니케아 정통성은 참된 기독교의 필요조건으로 제시될 수 없다고 주장해야 한다.

  게다가 현대 학자들은 니케아 교리는 이 교리를 초안한 감독들 조차 "정통적"인 용어로 이해하기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니케아 교부들의 마음 속에서 언어의 해석과 그 결과로 생긴 신회에 대한 이해는 그 이후의 정통 신학자들의 이해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다. 교회 역사의 아버지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유스가 니케아 문서에 서명하기는 했지만 그는 "모든 사람은 성부가 성자보다 앞서며 먼저 선재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성자의 존재는 선재하신 성부의 미리 의도된 행위에 달려있었다고 주장한 철저한 종속론자였다.  이것은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가 아니다. 말일성도의 신학이기도한 이 같은 종속설 교리가 정통 비평가들에 의해 "비기독교적"이라는 딱지가 붙었으나 종속론장인 유세비우스는 고대 니케아 종교회의에 참석해 니케아 신경에 서명한 감독이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여기서 본인은 영지주의자나 마시오나니트파와 같은 이단 작가들의 말에 의존하고 있지 않음을 주목하기 바란다. 본인은 하나님에 관한 교리가 후기 삼위일체 교리가 아니었던 기독교인들의 예를 제공하기 위해 신약 작가, 사도 시대의 교부, 희랍 변증자와 니케아 교부와 같은 오직 기독교 정통파에 속한 작가들의 말만을 인용하고 있다. 만약 후기성도가 다른 기독교인들과 똑같은 용어로 성서상의하나님을 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을 수 있다면 많은 초기 기독교 작가와 성인들과 신학자들도 똑같은 이유로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이 정확히 같은 삼위일체 용어로 하나님을 보아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맞지 않다.

  이곳에서 삼위에 관한 니케아 교리의 명성을 시혐해 보고자 하는 것이 본인의 목적은 아니다.  후기성도들은 삼위일체를 믿지 않지만 삼위일체를 믿는 사람들을 비기독교인으로 비난하지는 않는다. 니케아 교리는 비록 후기성도들의 동의하지 않는 교리이기는 하지만 성서의 자료가 해석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이다.

  그러나 본인은 본인의 주장을 위해 니케아 교리를 부정하지는 않겠다. 예수님이 니케아 교리인 삼위일체를 가르치지 않았다면, 신약작가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사도 시대의 교부들이 이것에 관하여 몰랐거나 이것과 관련된 문제를 올바로 평가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가 4세기에 가서야 생겨났다면 삼위일체 교리에 서명한 교부들조차 이 교리를 올바른 정통 용어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현대 삼위일체주의자들이 주장처럼 니케아 교리는 참된 기독교에 필수 교리라고 주장할 수 없다. 물론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신약 시대의 교회를 포함하여 4세기 전에는 참된 기독교인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오늘날의 삼위일체

  오늘날에도 니케아 종교회의가 만들어낸 삼위일체 교리를 모든 정통 기독교가 똑같은 방법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8세기 초부터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11세기 이후부터 천주교와 개신교도들은 성신이 성부로부터 나아간다는 문구에서 라틴어 경구인 filioque(그리고 아들로 부터)를 "니케아" 신경 원본에 첨가하였다. 따라서 서방 교회의 정통 교리는 하나의 횃불이 두 개의 다른 횃불에 의해 동시에 점화되듯이 성신이 성부와 성자로 부터(filioque) 나아간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하나의 횃불이 먼저 두 번째 횃불에 불을 붙인 후 세 번째 횃불에 불을 붙이듯이 성신이 성자처럼 성부로부터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동방 교회는 니케아 교리에 첨가된 filioque가 삼위일체 교리를 허락없이 왜곡시킨 것으로 보고 이를 강력하게 거부한다. 프랭크 가빈은 "동방과 서방의 차이점 중에서 filioque교리만큼 정통성 문제를 놓고 그렇게 실랄함을 일으킨 차이점이 없었다. 동방 교회 신학자들은 filioque 교리가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그릇된 개념-심지어는 거짓 신-을 끌어들인다고 주장한다. "Filioque 교리(서방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에 의해서 철학자와 학자들이 만든 신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고 들어온다. ... 성부로부터 성신이 나아간다는 교리(동방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에 의해서 철학자들이 만든 신이 지성소로부터 영원히 추방된다.

  Filioque 교리 문제 때문에 동방 기독교인들과 서방 기독교인들은 성삼위의 본질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비신학자들에게는 작은 문제처럼 보일지 모르나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며 9백년동안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신학을 분리해왔을 만큼 심각한 논쟁이다.  

  후기성도들은 성서에 나오는 성부, 성자, 성신을 믿으나 후기성도가 신회의 본질을 다른 기독교인과는 달리 이해한다는 이유 때문에 비기독교인으로 비난받는다.  Filioque 교리 논란은 또한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논란이기도 하다. 만약 후기성도를 배제하기 위하여 사용된 논쟁이 효과가 있다면 그리고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이 신회에 대한 똑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면 동방 교회나 서방 교회 둘중의 하나가- 서방교회일 가능성이 더 많지만- 참된 기독교가 아닐 것 같다. 반면 filioque논쟁을 하는 양측이 신회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기독교로 인정한다면 이 논쟁은 의심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삼위의 본질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해서 비기독교인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기독인이 되는 것은 다른 기독교인들처럼 똑같은 니케아 용어나 찰세도니언 용어로 하나님을 보는 문제가 아니라 초기 1세기 기독교인들이 보았던 성서상의 용어로 하나님을 보는 문제인 것이다. 1세기의 고린도인과 갈라디아인이 니케아 용어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리스도의 속죄로 그들이 구원 받았을까? 물론 그렇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속죄가 신약의 증언을 받아들이나 니케아 용어로 하나님을 보지 않는 충실한 후기성도들을 구원할 수 있으며 또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라"(God is a Spirit)

  하나님에 대한 후기성도의 생각은 후일에 생긴 삼위일체 교리 이외에 다른 면에서도 니케아 정통 교리의 견해와 다르다. 후기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는 인간과 같은 육체, 즉 먼저볼 수 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아버지는 인간이 가진 것과 같이 만져볼 수 있는 살과 뼈의 몸을 가졌나니, 아들도 그러하니라, 그러나 성신은 살과 뼈의 몸이 없으시고 다만 영적존재시니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성신이 우리 가운데 거하실 수 없으리라."(교리와 성약 130:22)

  후기성도 비평가들은 요한복음 4:24이 매우 분명하게"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진 신은 니케아 교리와도 다르면 성서의 가르침과도 다르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후기성도들은 이 성구가 하나님을 단지 하나의 영(a spirit)을 제한 하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않는다면 이 성구에 대해서는 전혀 논쟁하지 않는다. 심지어 삼위일체론자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육체를 설명하는 한가지 방편으로 요한복음 4:24를 해석해야 한다. 신약성서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 두가지는 첫째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그리스도는 이와 동시에 진실로 육체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육체를 입고 계신 지상생활 뿐만 아니라  육체로 부활하실 때에도 삼위일체설이 주장하는 하나님 가운데는 육체를 가지고 부활한 성자가 포함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이다(God is a Spirit)"라는 언급은 심지어 니케아 개념으로도 이해될 수 없다. 왜나하면 하나님을 어느 상황에서도 육체를 가지지 않은 존재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한복음 4:24는 "하나님은 하나의 영이시다(God is a Spirit)" 보다는 "하나님은 영이시다(God is Spirit)"로 번역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희랍어에는 부정관사(a, an)가 없기 때문에 번역가가 부정관사를 첨가할 것인가 아닌가는 주관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서 학자들은 요한복음 4:24에는 부정관사가 없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시 에이치 다드는 [요한복음 4:24]을 번역할 때 '하나님은 하나의 영이시라'는 번역을 뜻을 크게 왜곡한 번역이라고 주장한다. 레이몬드 이 브라운의 말에 따르면 요한복음 4:24의 구절은

마치 하나님이 빛으로만 제한되지 않듯이, 요한일서 1:5의 내용 때문에 어떤 것으로도 제한되지 않듯이, 요한일서 4:8의 내용에 사랑이나 다른 어느 것으로도 제한되지 않듯이, 희랍 사람처럼 영과 물질을 상호 배타적이며 대립적인 것으로 추측하지 않는한 하나님은 요한복음 4:24에 의해서 영이나 다른 어떤 존재로도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하는 (요한복음4:24)것이 예배자로 하여금 자신들의 육체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이 영이라고 해서 하나님을 하나의 영(a spirit)으로 제한 하지는 않는다.

  1세기의 유대 기독교인들처럼 말일성도도 "영"과 "원소"가 상호배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조셉 스미스에 따르면 "실체가 없는 물질은 존재하지 아니 하느니라. 모든 영은 물질이니, 다만 극히 청결하고 순수하여 보다 청결한 눈으로써만 분별될 수 있느니라"(교리와 성약 131:7). 그래서 후기성도들은 영을 "영이 부여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나 희랍 기독교는 영을 "육체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말일성도들에게는 영적 혹은 영이라는 말이 육체가 없다는 말을 뜻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교리와 성약  93:33은 비록 인간이 분명 육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영이다"라고 가르친다. 영과 원소는 영원한 전체의 상호존립하는 부분이다 . 엄격한 영/육체나 영/원소 이원론은 희랍 사상에 의해 소개되기 전까지는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말일성도들은 하나님은 영이시나 단순히 하나의 영만은 아니라고 이해한다.

  후기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가 "인간과 같은 만져볼 수 있는"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후기성도들은 제한된 인간의 오감으로 하나님이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는 그릇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원소이시다. 두 가지 존재 측면이 하나님의 영예로운 존재 안에 포함되고 둘러싸여있다. 하나님이 둘 중에 하나라고 해서 하나님이 또 다른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제한하지 못한다. 실제 하나님은 무한 대 그 이상이다.

 

하나의 영으로서의 하나님

  게다가 후기성도에게는 하나님은 가장 분명하게 성신 안에 나타날 때 영이시다. -"성신은 살과 뼈의 몸이 없으시고 다만 영적 존재시니라"(교리와성약130:22). 인간이 하나님을 접하거나 경험하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은 성신의 존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이다. 이것은 개종이나 안수 때 기독교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다 (행(2:38: 8:17: 눅11:13). 성신은 보혜사이자 영감의 영이시다. 인간이 하나님을 접하게되는 거의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하나님을 영(성신)으로서 체험한다는 사실을 후기성도와 비후기성도 기독교인들도 논쟁없이 받아들인다.

 

육체적 존재로서의 하나님

  그러나 요한복음 4:24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가운데에서 하나님도 만져볼 수 있는 육체를 가지고 계시다고 가르치는 많은 다른 경전 구절있다. 이 성육의 교리는 몰몬이나 비 몰몬들에게도 흔한 것이다. 예수가 부활하신 후 사도들에게 자신은 영일뿐만 아니라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는 말씀으로 사도들에게 확인시키셨다. 이 논리는 그리 어렵지 않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살과 뼈를 지닌 육체를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부활하시신 아들의 존재 가운데서 하나님은 살과 뼈를 지닌 육체를 가지고 계신다. 말일성도와 정통 기독교인 양쪽 다 성자의 존재 가운데서 하나님 성자의 성육과 육체적 부활의 교리를 굳게 믿기 때문에 하나님은 만져볼 수 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후기성도와 삼위일체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나 신회는 세 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성신처럼 영의 존재로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아들이 육체를 가지고 있듯이 아버지도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논리적이며 기독교적인 생각으로 여겨진다. 몰몬과 비몰몬들은 "하나님이 영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나 신약은 이 뜻이 아버지가 "영으로 채원진 만져볼 수 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지 아니면"육체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지(둘 다 어법적으로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기 때문에 어느 쪽 하나의 해석도 다른 해석보다 더 성서적이라거나 더 "기독교적인" 해석으로 볼 수 없다.

  또 희랍 신학의 주장처럼 어는 누구도 만져볼 수 있는 육체와 신성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미 만져 볼 수 있는 육체(눅24:39)와 부활하신 아들의 온전한 신성(요1:1)을 확립해 놓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 아들이 온전히 신성(요1:1)을 확립해 놓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 아들이 온전히 선성하면서도 살과 뼈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가 육체를 가질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신을 엄격한 플라톤의 말로 정의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철학자의 하나님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진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말일성도의 믿음에 대한 진짜 반대는 초기 기독교의 히브리 세계로부터 온 것도 이니며 예수와 그의 유대인 제자나 그들이 남긴 유대오 기독교 경전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진짜 반대는 하나님을 절대적인 존재, 즉 추상적이며 궁극적이며 초절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보는 희랍적인 개념 가운데서 철학자들이 만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한다. 말일성도가 믿는 신은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이지 철학자가 믿는 하나님은 아니다. 이 두가지 다른 신에 대한 견헤에 대하여 쉐이 제이 디 쿠렌은 다음과 같이 관측한다.

니케아 종교회의의 하나님은 어떤의미에선 변질된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비성서적이며 철학적인 용어로 변질된 히브리 성서의 하나님이다. 니케아 종교회의의 하나님은 4세기와 5세기의 희랍 기독교인들이 신약이 "원시적인" 언어로 묘사한 하나님을 보다 지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만든 하나님이었으나 이 하나님은 더 이상 1세기의 유대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은 아니었다. 또한 코렌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과 같은 형체를 지닌 신의 개념은 후기성도를 비기독교인으로 볼만큼 기독교 세계에 이상하지도 않고 생소하지도 않다. 하나의 예만 인용하자면 4세기나 5세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개념을 성서구절에 의존한 이집트의 대부분의 기독교 수도승들은 하나님이 인간과 같은 형체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수도승들은 "신인동형론자"로 불렀다. 그러나 381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 이어 이러한 견해는 더 자주 억압 받았으며 새로운 정통교리가 상당한 저항을 받으면서 사막의 수도원의 수도승들에게 엄증하게 강요되었다. 얼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티오필러스는 자신의 서신에서 성서가 묘사하는 하나님은 비유에 불과하므로 수도승들은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형체를 지닌 신으로 보아서도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커다란 명성을 떨쳤던 노승이었던 사라피온은 결국 철학자의 하나님인 새로운 신에게 기도할 수 없음을 알 게 되었다. 땅에 쓰려져 그는 "아아 슬프도다! 저들이 나에게서 나의 하나님을 빼앗아 가 버렸으니 납득해줄 하나님도 없고 숭배하거나 대화할 하나님도 없도다"고 신음헀다. 결국 신인동형론자였던 수도승들은 반동하여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으며 그들의 감독이었던 티오필러스로 하여금 180도 방향전환을 하게 만들었다.

 

감정이 없는 하나님

  실제로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수도승 사라피온 처럼 하나님을 꽤 구체적이며 인간적인 용어로 이해한다. 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모델에 따라 인간처럼 간주되는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진하게" 기도하기를 고집한다. 그러나 엄격한 정통 종교회의와 신조에 따르면 하나님은 비유나 양부적인 의미 외에는 진정한 아버지가 아니며 위치상으로 천국에 존재하지도 않으며 어떠한 감정으로도 동요되지 않는 실제적인 감정으로 보게되면 우리를 사랑하지도 않는다. 기독교 신학을 좌지우지하게된 철학자들을 만약 하나님이 어느 한 장소에 위치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위치에 제약을 받게 되므로 절대적이 되지 못하며 따라서 희랍 정의에 의하면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느꼈다. 희랍 신은 시간이나 공간에 예속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희랍 사상은 하나님은 열정이나 감정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의지는 자신의 감정에 예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희랍 사상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는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육체뿐만 아니라 감정이 없어야 하는 이유다.
반 에이 하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거스틴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성서에 언급된 육체가 비육체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감정을 나타내는 모든 성구는 감정이 없다는 의미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 예를 들어 어거스틴은"[성서에서] 하나님이 분노하신다고 말할 때에는 화난 사람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그런 감정이 상한 느낌을 하나님이 가졌음을 뜻하는게 아니라 인간의 감정으로 유추되는 단어인 '분노'라는 용어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을 가리킬 뿐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래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은 분노라는 감정을 실제적으로는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도 역시 감정이며 열정일 뿐만 아니라 경전은 하나님의 사랑을 고집한다("하나님은 사랑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사," 등등) 철학자들은 사랑이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마다 사랑을 다른 말로 정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는 말로 이 문제를 회피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이성과 의지의 한 기능으로 정의했으며 따라서 그의 정의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전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신학자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감정으로 알고 있는 그런 사랑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다. 또 하나님이 가진 참된 연민과 감정이입이 재정의되어 감정이라는 요소를 제거하게 되면 인간의 고통에 대해 참된 연민이나 감정이입이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경전의 언어는 있는 그대로 보존될지 모르나 뜻은 철학자들의 입맛대로 바꾸어지고 만다.

  물론 가장 위대한 감정은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에서 예수가 겪은 고통이다. 따라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고통을 겪을 수 없는 하나님, 즉 하나님이 감정이 없다는 비성서적인 희랍 사상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이 장애물은 신학자들이 하나의 실체나 본질을 가지는 다른 모든 존재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실체와 신의 실체인 두 개의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 서기 451년 찰세돈 종교회의에서 제거되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고 죽었을 수 있으나 신인 하나님 아들은 결코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이요 하나님이요 선재하신 말씀이었던 아들이 실제로 자신의 본체 가운데서 인간이 되어 인간을 위해 고통을 겪으시고 돌아가셨는가? 이에 대한 후기성도의 대답은 확실하게 긍정이나 찰세돈 종교회의의 대답은 부정이다. 종교회의는 이 부분에 있어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 들이려 하지 않는다. 종교회의에서 승인된 교왕 레오 대제의 저서 Tome에 따르면

그러므로 찰세돈 종교회의는 신학자들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가지 본체 가운데서 육체를 가진 존재 때문에 고통을 겪으셨으며 두가지 본체의 뚜렷한 차이 때문에 하나님은 고통을 겪지 않았다는 상반된 명제를 유지할 수 있는 공식을 제공해 주었다. 이 공식으로 말미암아 정통주의는 신약과 더불어 그리스도가 고통을 겪은 한편 하나님은 감정이 없으시다는 플라톤의 말에 동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 교리를 전혀 모르고 있으며 따라서 고통을 겪으신 하나님에 대하여 "순진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통교리의 세세한 부분에 정통한 사람들은 4세기와 5세기 교부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의 본체는 우리 인간을 위해 고통을 겪을 수도 없었으며 겪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헨리 차드윅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헌신의 열정 때문에 '하나님이 고통을 겪으시고 돌아가셨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 모르나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감정이 없으시며 불멸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인간의 나약함이 하나님에게로 전이된다는 것은 실제 뜻하는 바가 아니다.

  그리스도에 내재한 두 가지 본체에 대한 사도시대 교회 이후에 생겨난 신학은 이해하기 힘들고 논란을 야기시키는 것이어서 마침내 잠잠해지는데에만 2백년이 걸렸으며 2백년이 지난 후에도 이집트, 아비시니아, 시리아 그리고 아르메니아 교회는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 교회들은 이 교리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고통을 겪으시고 돌아가셨다는 신약의 핵심적인 주장을 교묘하게 위장하여 반대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통주의자들은 희랍 철학은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을 겪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두 본체 교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리고 그 당시 교회는 성서가 담고 있는 그대로의 언어보다는 철학자의 논리를 더 신뢰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은 형체나 감정면에 있어서 인간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사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실체 개념은 종교회의가 가르치는 철학적인 교리보다는 하나님을 실제로 하늘에  살아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실제 아버지로 이해하는 후기성도의 교리에 더 가깝다. 만약 성서가 가르치는 인간과 같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감정이 단순히 비유적인 것이어서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이를 버려야 한다면 성서 자체가 이 사실을 나타냈어야 되지 않을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신인동형체의 용어로 "순진하게" 이해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인간처럼 바라보는 견해가 옳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처럼 바라보는 것이 기독교인이 될 수 없는 이유라면 이집트 사막의 수도승처럼 자신들을 기독교인으로 간주하는데 다수의 사람들을 말일성도와 더불어 기독교로부터 배척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분명 기독교 세계의 대부분의 어린이들, 심지어 정통교파에 속한 어린이들 조차 다른 식으로 배울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 때까지는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분으로 생각한다. 이런 아이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이 아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 전까지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감히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 질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약의 모든 내용을 믿고도 여전히 비기독교인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의 성서의 선언은 얼마나 적절하고 얼마나 능력이 있는 것일까? 신약의 모든 말을 다 믿으나 하나님 아버지를 그의 아들처럼 만져볼 수 있는 육체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도 그리스도의 속죄는 효력이 있을까? 비록 신약이 이 문제에 있어서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이러한 견해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이 그 사람의 생애에는 효력이 없을까? homoousios(희랍어로 똑 같은 물질로 된)와 homoiousios (희랍어로 비슷한 물질로 된)가 예수나 그의 제자의 가르침이나 경전 어는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물질로 된(homoousios) 성부, 성자, 성신을 예배하는 자들은 영원한 축복을 받고 비슷한 물질로 된(homoiousios) 성부, 성자, 성신을 예배하는 자들은 이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믿어야 할까?

  물론 신약성서난 신약의 일부를 거부해했던 영지주의자나 마르시오나이트들과 같은 고대 이단들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본인은 그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게 아니다. 본인은 기독교인들에 관하여, 즉 신약의 글자 하나 하나를 전부 믿었으나 나중에 희랍 철학에 몰두한 신학자들의 해석을 믿지  않았던 1세게 교회와 사도시대의 교부와 희랍 변증자들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있는 그대로의 신약성서를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말일성도가 종교회의에서 나온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보는 비평가들은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이 "새롭게 개선된" 4세기와 5세기의 기독교의 교부들이 보완하고 새로운 정의를 내리기 이전의 구원이란 불완전하고 부적당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말일성도는 훗일에  확정된 철학적인 기독교를 지지하여 초기 성서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을 "너희의 전한 [철학적인]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신약]을 폐하는 것"(막7:13을 보라)

 

요 약

  후기성도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모든 성서의 가르침을 확고하게 받아들이나 종교회의와 신경이 첨가한 비성서적인 가르침은 거부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사도시대의 교부나 희랍 변증자들의 가르침에서도 발견되진 않는다. 심지어 오늘날 까지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는 하나님의 정확한 본질과 기독교의 주된 교리의 정확한 어법(Filioque 논쟁)을 놓고 강력하게 다투고 있다. 만약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니케아 교리로 하나님을 정확히 이해햐야 한다면 5세기 이전에 살았던 모든 기독교인들과 8세기 이후로  filioque 논쟁에 가담한 동방교회나 서방교회 중 최소한  한측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말일성도와 더불어 기독교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개신교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는 성경 하나만으로 구원에 충분하다는 sola scriptura를 주장하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돌아서서 종교회의나 신경같은 구원에 요구되는 비성서적인 내용을 첨가하는 것은 모순이다.

  후기성도는 가장 고상한 의미로 하나님 아버지가 영이라는데 동의 한다. 그러나 후기성도는 하나님을 영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하나님이 육체를 가질 수 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신의 신위 가운데서는 영이나 성자의 신위 가운데서는 영이 아니다. 현대 계시에 근거를 두어 말일성도는 하나님 아버지는 만져볼 수 있는 육체를 가지고 계시며 그리고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는 입증할 수 없으며 반박할 수도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철학적인 가정을 고려해 볼 때  성서의 승인없이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성서의 신인동형동성설을 단순히 비유적인 것으로 여겨 버린 자들은 정통 기독교인들이며 신인동형동성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자들은 말일성도다. 하나님을 인간처럼 보는 견해는 성서의 내용과 일치하나 희랍 철학이 정의하는 하나님과는 상반된다. 만약 후기성도처럼 신인동형동성의 용어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이유 때문에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면 고대와 현대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역시 기독교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정도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철학적인 신학의 추상적인 용어보다는 신인동형동성의 성서적인 용어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과오"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서 자체는 하나님을 신인동형동성의 언어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묘사가 단순히 도움을 주는 상징이나 비유로 이해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이동형동성의 용어로 이해하는 것을 비기독교적인 관례라고 주장할 수 없다.


               - 목 차 -

 [3. 인신공격에 의한 배제]

 [7. 교리에 의한 배제 : 성삼위]

  [서문] 

 [4. 역사나 전통에 의한 배제]

 [8. 교리에 의한 배제 : 기타 ] 

 [1. 단어정의에 의한 배제] 

 [5. 경전(성서)에 의한 배제]

 [9. 결론 - 노트 -  번역후기]

 [2. 허위제시에 의한 배제]

 [6. 교리에 의한 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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