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차봉 형제를 추모하며

강 종 태 형제



2002. 8. 15

김휘나 자매님께서
김차봉 감독님의 자서전을 만드는데 글을 써서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고는 망설임이 컸다. 글을 쓰는 문학적 소질이나 문장력이 없는 내가 자서전에 우를 끼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나 나름대로 옛 추억을 더듬어 보는 시간 속에서 감사함과 고마운 생각이 먼저 든다.

나는 아내와 함께 2000년 5월에 김차봉 장로님과 김휘나 자매님을 공항에서 만났다. 고향인 여수를 다녀오시는 길이였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자녀 교육 문제를 상담을 해 주셨다. 다음해 5월에 다시 오시면은 꼭 만나기로 하셨는데… 오신다는 감독님은 오시지를 않고… 지상에서는 다시는 뵙지 못하는 곳으로 가셨다. 복음을 통해서 알고 있듯이 그분은 영의 세계에서도 훌륭한 교사(감독, 선교부장, 신학원 교수, 대학교 교수)로써 얻은 경험을 토대로 복음을 알지 못하고 돌아가신 영들을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시려는 모습이 눈에 선 하다.

김휘나 자매님께서 2001년 9월에 강원도 화천군에 있는 광덕 그린 농원에 갔을 때 감독님께서 영의 몸으로 나타나셔서 우리들처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확신했습니다. (김휘나 자매님과 영의 몸으로 나타나서 대화를 나눈 이야기는 자매님이 자세히 하리라 믿고 나는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복음 교리반 공과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알았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윌리암 허스트는 호주에서 광부로 일 하고 있을 때 처음으로 말일성도 선교사들이 회복된 복음을 가르치는 것을 들었다. 그와 그의 형 찰스는 1854년 1월에 침례를 받았다. 그는 그의 가족 중 아직 침례 받지 않은 사람들이 개종하도록 도우려고 애를 썼지만 그들은 그와 그가 가르치는 진리를 거부하였다.
프레드릭은 교회에 들러 온 지 4년 후에 솔트레이크에 정착하였으며 여러 나라에서 선교사로서 충실히 봉사했다. 그는 또한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페인트 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일기 중 한 곳에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1893년 3월1일경 모두 잠든 사이에 나는 혼자 신당에 앉아 있었다. 식탁에 앉아 있을 때 놀랍게도 내 형 알프레드가 걸어 들어와 나의 맞은편 식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그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유타 에는 언제 왔어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막 영의 세계에서 왔어, 네가 보고 있는 것은 내 육신이 아니야, 내 육신은 무덤 속에 누워 있어. 네가 선교 사업을 하고 있을 때 너는 나에게 복음과 내세와 영의 세계가 지상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며 실체가 있다는 것에 대하여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지,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 그러나 내가 죽어 그곳에 가서 직접 보니까 네가 진실을 이야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나는 몰몬 모임에도 참석했었지.’ 그는 손을 들어올리면서 훨씬 더 다정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나는 신앙, 회개, 죄 사유함을 받기 위한 침수로써의 침례를 믿어.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고 그 이상은 할 수 없어. 나는 네가 나를 위해 성전에서 대리 의식을 받아 주기를 원하고 있어.… 너를 바라보고들 있어.… 이 위대한 사업이 있어서 우리의 식구의 책임자로서 너를 바라보고 있단다. 나는 너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구나. 여기 교회 안에 친척이 있지만, 그들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해주지 않기 때문에 울고 슬퍼하는 영들이 많이 있단다.’”

나는 1972년 5월6일 침례를 받았다. 교회를 처음 참석한 것은 침례 받기 2주전 주일학교 모임 이였다. 침례 받은 후에는 저녁 성찬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형님의 말에 성찬식에 참석을 하였고, 그리고 얼마 후에 매주 목요일 저녁에 갖는 상호 향상회(MIA)에도 참석하라고 하여 그 때부터 상호향상회에 참석하면서부터 모든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하게 되었다. 당시 지부장님은 전종철 형제님이셨다.
얼마후 서부지부에서 새로 이사를 오신 김차봉 형제님을 처음 뵙게 되었지만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전종철 지부장님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여 김차봉 형제님께서 지부장님으로 부름을 받으셨다. 그후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 교회에서 처음으로 부름 받은 직책이 우정회 회장단 제2보좌였다. 회장에는 조성호 형제였고, 제1보좌에는 지금 미국 라스베가스에 살고 있는 이영직 형제였다. 처음에는 ‘우정회’라는 조직이 교회에 공식적인 조직 인줄만 알았지만 우정회 조직은 공식적인 모임이 아니 였다.
신권회와 상호부조회 모임을 아침 9시에 그리고 주일학교 모임을 10시부터 12시까지 하였고, 성찬식 모임은 저녁 6시 30분에 시작하였다. 금식주(매월첫주)성찬식은 주일학교를 마친 후 바로 ‘금식 간증회’로 가졌다. 이 때문에 저녁 시간에는 노변의 밤으로 모임을 가졌는데 이 시간을 우정회 회장단이 준비를 하여 진행을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당시에 회원들이 많았으므로 부름을 모든 회원에게 주기 위한 김차봉 지부장님 만의 타고난 지도력과 지혜였다는 것을 이제 알 것 같다.

내가 두 번째 부름 받은 것은 그해 10월에 상호 향상회 청남회장으로 부름 받았다. 청남회장으로 있던 박희원 형제가 선교사로 떠나기 때문에 그의 후임으로 부름 받게 되었다. 교회에 들어온지 6개월도 안돼서 받은 부름임으로 접견 할 때에 사실상 마음에 기쁨보다는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상호 향상회란 말은 교회에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고, 회장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더욱이 그러했으리라 생각이 든다.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김차봉 지부장님은 어깨를 두드리면서 “강형제님은 신앙이 있기 때문에 잘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용기를 갖게 된 것은 니파이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명하시는 대로 이룰 수 있는 방편을 미리 마련치 아니하시고는 명하지 않으심을 제가 아오니, 주께서 명하신 대로 가서 행하겠나이다.”(니일3:7)
보좌로는 강영민 형제가 1보좌로 정대윤 형제가 2보좌로 청녀 회장단에는 회장에 최은화 자매님이 부름을 받고 그의 보좌로는 1보좌에 연명애 자매님, 2보좌에는 유혜숙 자매님이 각각 부름을 받았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인 것은 교회에 오래동안 이 모임에 참석한 형제 자매님들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걱정은 부름 받고 바로 시작되었다. 동 지방부에서 공문이 왔는데 지방부 산하 지부 대항 ‘로드쇼 경연 대회’를 개체 하겠으니 준비하여 참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준비 기간은 한 달 정도, 주일로 보면은 4주인데… 저는 시간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로드쇼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준비하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는 것과 같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원들과 상의를 하였지만 누가 나서서 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신앙으로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 하기로 하였고 나는 회장이란 책임감 때문에 매일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하였다. 교회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열심히 기도를 하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2주가 지난 목요일 상호 향상회 모임을 마치고 평가회 모임을 위해 모였는데 처음 보는 형제가 들어왔다. 그 형제는 역원도 아닌데 참석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모임을 하면서 로드쇼에 대해서 걱정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때에 처음 보는 그 형제가 손을 들면서 자기가 로드쇼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라고 하였다.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지, 그에게 나와서 우리에게 설명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고 그는 자신이 신재구 형제라고 소개를 하고 로드쇼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었다. 그는 자기에게 맡겨 준 다면은 준비를 하겠다고 하였다. 그 때 당시에는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구세주가 나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신재구 형제는 다음 안식일에 교회에 올 때에 로드쇼를 할 작품을 준비하고 출연진를 뽑아서 2주만에 준비를 하여 성공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때 우리는 준우승을 하였는데 이 보다 더 기쁜 것은 우리의 기도의 응답 이였고 두 번째는 주님께서는 한 형제의 저 활동 회원을 다시 한번 교회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회장단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십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태복음18:19)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신앙의 경험을 갖게 해주고 간증을 갖게 해주신 김차봉 지부장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 때부터 신재구 형제님은 비활동 생활 2,3년의 기간을 접어 두고 다시 활동하였다. 그는 서기로 봉사한 적이 있어 많은 회원을 알고 있었으며, 재능이 많아 그후에도 상호 향상회에 참여하여 활동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부 소풍과 활동 모임에서 사진을 찍어서 회원들에게 제공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하였는데 이웃 지부인 성동지부(신당와드), 성북지부(미아와드)에서도 많은 회원들이 참석하여 예배실과 활동실을 사용하여도 포크댄스을 할 때에는 회원들이 다 참여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 1호실에 미국 선교사들이 괴기 전을 하였는데 얼마나 잘 준비가 되었는지 어느 자매가 기절을 하여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73년 2월 선거일에 과천에 있는 청계산(청계사)으로 등산을 계획을 하였다. 등산을 하기 몇 일전에 강영민 형제와 둘이서 현지 답사를 하기 위해 그곳에 갔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남태령을 넘어 과천(서울 대공원)입구 사거리에서 하차를 하여 이곳에서부터 도보로 걸어가야 했다. 대공원에 있는 과천 저수지를 지나 청계산에 있는 청계사까지 약 6킬로미터 걸었다. 돌아 올 때에는 거리가 얼마 안된다는 말에 안양으로 가기로 했던 것이다. 답사이기 때문에 등산하기 편리한 쪽으로 알아보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이었다. 거리는 과천에서 오는 거리보다는 두 배가 넘었고, 몇 번을 물어 물어 돌아 올 수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은 삼십 리도 넘는 것이었다. 지금 지도를 보아도 직선거리가 12키로나 되는 것이다.
등산하는 날은 겨울 날씨답지 않게 너무 포근하고 청명한 날씨 였다. 참석한 회원이 70명이 넘었다. 사진에 찍힌 사람만도 70명이다. 김차봉 지부장님께서는 “청남 회장이 신앙이 있어서 날씨까지 축복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사랑과 따듯한 마음으로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모범은 훈 날에 내가 지부장으로 일하면서 큰 영향력으로 이어졌다.

나는 교회에서 기거를 하게 되었는데 기거를 하게 된 동기는 74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예비군 동원 훈련으로 경기도 연천에 있는 모 부대에 입소를 하는 날 예비군 수송 차량이 대한통운 화물차였다. 아침부터 날씨가 좋지가 않았다. 출발하고 나서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차에는 호로(천막)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우리(예비군)는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취침을 하고 있는 한 밤중에 갑자기 기침을 하면서 각혈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가래가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은 핏덩어리였다. 나는 무척 걱정이 되어 주번 사관에게 이야기를 했지만은 별로 신경을 쓰지를 않았다. 주번 사관이 하는 말이 옆으로 누어 자면 각혈이 멈춘 다면서 그냥 자라는 것이었다.
다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심한 것 같지가 않아서 참아 보기로 했다. 6일간의 훈련을 다 받고 귀가해서 병원에 갔다. 진찰 결과는 결핵 중등증(일반적으로 결핵 2기라고 함)이라는 것이었다. 안식일에 김차봉 감독님에게 말씀을 드리고 병자 축복을 부탁을 드렸다. 감독님은 준비를 하자고 말씀하시고는 나에게도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이 였다. 요즈음 의학으로 결핵은 쉽게 치료 될 수 있고, 신앙으로 기름 축복을 받으면 났는다면서 위로를 하셨다. 스테이크 부장이시며 신학원 원장이신 이호남 장로님에게 부탁하였으니 수요일 신학원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약속된 날에 신학원으로 갔다.

김차봉 감독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강형제님! 축복을 주기 위해서 이호남 장로님께서 금식하시고 목욕까지 하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감독님과 이호남 장로님께서 나를 위해 영적으로 준비를 하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고마움과 사랑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감독님께서 기름 축복을 하셨고 이어서 이호남 장로님께서 병자 축복을 하기 위해 권능을 가진 두 분의 손이 나의 머리에 올려지는 순간 나는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축복의 말씀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은 분명한 것은 축복을 받는 동안 그리스도의 사랑과 병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과 감사의 눈물이 나도 모르게 두 뺨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축복을 받고 나서 나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동안 평안함과 기쁨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있었다. 감독님께서는 저의 가정 사정을 잘 알고 계시므로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 가족에게도 안 좋으니 교회에서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금일봉을 주시면서 결핵과 건강에 좋은 음식이 있으니 그것을 매일 사서 먹으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침 즉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실천하시는 감독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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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회에서 생활을 하면서 치료하는 과정에서 얻은 특별한 간증을 전하고 싶다. 나는 병자 축복을 받았지만 나의 병고침을 받기 위해 나의 신앙의 행사를 하기 위해 열심히 예배실에서 매일 매일을 아침저녁으로 소리내어 때로는 큰소리로 울면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저의 병을 낮게 해 주신다면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뱀이 나타나 나를 물려고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교회(1와드) 뒤로 도망을 하는데 무대 뒤 외벽과 담 사이에는 뒤 정원에 외부 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철망으로 만든 담이 있고 철망에는 문이 항상 잠겨 있었다. 나는 그 곳에까지 도망하였으나 막다른 곳이라 더 이상은 갈 수 가 없었다.
뱀은 빠른 속도로 점점 다가와 나를 물려고 하였고 마치 성난 개가 상대를 물려고 이빨을 드러내면서 ‘으르렁’ 거리면서 물려는 순간 주님께서 나를 안아서 번쩍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뱀은 주님의 품에 안긴 나를 아쉬운 듯 ‘으르렁’ 대면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마음속으로 병마로부터 이 병이 낮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김창선 장로님이 계시는 한일 병원에 찾아가 내과에서 두 번째 X-선 촬영을 하고 나서 검사 결과는 내과 의사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굉장히 빨리 낮고 있다는 것이었다. 병자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김창선 장로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려는 듯이 나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축복(기름)을 받았지?’ 하는 것이었다. 신앙을 갖고 구하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서 병고침의 은사를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나는 안다.

김차봉 감독님은 항상 칭찬만 하는 것은 아니 였다 잘 못 할 때는 꾸짖기도 하신다. 주일학교 회장인 한지상 형제가 직장 관계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주일학교 회장으로 봉사를 할 당시의 일이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결핵으로 인해 교회에서 기거를 하면서 주일학교 회장으로 부름 받았다. 어느 주일날 김차봉 감독님으로부터 주일학교 모임 후 역원 모임에서 주일학교 회장으로서 잘하지 못하는 것을 몹시 꾸짖으시면서 “그렇게 하려면 그만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당시에 너무나 당황하기도 하고 역원들 앞에서 부끄럽기도 하고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였다.
혼자서 생각을 해 보니 내가 꾸지람을 들은 것은 결핵으로 인해 병고침을 받기 위해 “저의 병을 낮게 해 주신다면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했으면서도 병고침의 은사를 받아 건강을 되찾게 되면서… 아플 때 약속한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나의 신앙 생활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역원으로서 충실함보다는 타성에 젖어 일을 하게 되었더라고 생각이 든다. 주님의 사업에 참여하는 우리는 타성적인 행동은 결코 주님께서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이런 것으로 인해 감독님은 성령에 감동되어 나를 꾸짖은 것이라 생각한다. 회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미안하기도 하고 자리만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접견을 하여 해임 받았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교회에서 페인트칠을 하면서 청소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감독님과 함께 옆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저는 감독님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감독님 제가 교회에서 작은 일이라도 부름을 받고 일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감독님은 사랑과 격려의 말씀을 주시고는 그후 저를 장로 정원회 보좌로 부름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감독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실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에 감동되었을 때에는 즉시 날카롭게 꾸짖을 것이나 후에는 꾸짖은 자에게 더 큰사랑을 나타내 보여 저가 너를 자기 원수로 여기지 않게 하라. 그리하여 저로 네 성실함이 죽음의 사슬보다 더 강한 줄을 알게 하라.(교성 121:43∼44) 이러한 경험은 내가 훈 날 지부장으로서 일할 때 훌륭한 교훈이 되었다.

나는 주일학교 회장 한지상 형제의 보좌로 김선봉 형제와 함께 일하면서 우리 모두는 서대문구 신사동과 응암동에서 살면서 가까운 교회도 있는데, 멀리 용두동에 있는 서울(용두)와드로 다녔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 많고 다정다감한 김차봉 감독님을 너무 좋아했던 것 같다. 주일학교를 마치면, 뒤 정원에서 비슷한 시기에 교회에 들어온 조성호 형제, 이영직 형제와 함께(이 분들은 비슷한 나이와 시기에 교회에 들어와 동지애 같은 느낌으로 쉽게 친할 수 있었음) 교리 적으로도 잘 몰라서 교회의 뒤 정원 등나무 밑에서 모여 앉아 손승주 형제 하봉식 형제 김혜성 형제 박희원 형제 그리고 감독님과 함께 구원의 계획과 여러 교리의 복음 토론을 자주 했던 일들이 생각이 난다.
우리에게는 신앙과 간증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이 든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우정과 사랑이 자랐으며 신앙의 뿌리가 자라도록 버팀목이 되어 준 감독님 과 여러 형제님 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시청옆 남강 빌딩에 있는 신학 연구원에 다니면서 끝나면 무교동, 청계천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우동, 꼼장어, 어묵 등을 먹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신학원의 강의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혹시나 이해를 하지 못할까 봐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가르치시는 모습이 선합니다. 학생들 중에는 나이든 형제 자매님들이 많이 있었다. 다른 요일 강의 시간보다도 수요일 저녁 강의 시간에는 조금만 늦어도 자리가 없었다.
73년 2월에 지방부 대회가 있어 대회 준비를 위해 강영민 형제와 나는 교회를 대청소하기로 하고 몇 일 동안 청소를 하였다. 날씨가 추워서 물 청소한 바닥은 잘 마르지 않아 히터를 틀면서 바닥을 말리고 왁스를 바르고 나름대로 청소를 깨끗이 하려고 열심히 하여 지방 대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달도 안돼서 스테이크 조직을 위해서 스펜서 더블류 킴볼 대관장(당시 십이 사도 정원회 회장)님이 오신다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분이 예수 그스리스도의 초기 사도이신 베드로와 같은 분이라 생각이 들어 살아 계신 주님의 종을 본다는 벅찬 감에 강영민 형제와 둘이서 주님의 종을 맞이할 준비로서 또 교회 청소를 하기로 하고 보이지 않는 곳 즉 예배당 앞면 벽 양면 벽 위에 스피커가 있었는데 그 스피커 위의 먼지를 닦는 것부터 시작하여 천장에 간접 조명으로 보이지 않은 형광등이 있는 곳에 먼지를 닦아 내는 일부터 시작하여 각방 교실을 구석구석을 털고 쓸고 닦고 하여 마지막으로 바닥 물 청소를 하고 왁스로 광을 내기로 하였다. 스테이크 조직되는 날이 3월8일 이었으므로 3일 동안 청소를 끝내야 한다. 둘 이는 도저히 3일 동안에는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다행히도 교회에 놀러 오는 형제 자매님들의 도움으로 강영민 형제와 나는 이틀 밤을 새워 가면서 8일 아침까지 끝을 낼 수 있었다. 청소하는 동안 원연화 자매님의 음식 솜씨는 여러 형제 자매님들에게 힘을 돋구어 주었다. 강영민 형제와 교회의 일(교회 청소, 가정 복음, 역원으로서)을 하면서 강형제가 집적 만들었다고 하면서 먹었던 만두 맛은 지금도 군침을 삼키게 한다.
청소를 깨끗이 하고 주님의 종을 맞이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준비하는 시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준비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알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96년 8월에 선교사의 부름을 받고 부산 선교부에서 2년간의 선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 때 나이는 32세였다. 내가 교회에 들어온 동기는 나의 형님의 인도로 교회에 들어 올 수 있었다. 침례 선물로 형님께서 성경을 주었는데, 성경 뒤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성경을 가진 자가 선교사가 되게 하소서” 나의 어머니는 나보다도 조금 늦게 침례를 받으셨지만 소시적부터 장로 교회를 다니시다가 개종을 하셨다. 늘 기도하시는 가운데 나를 선교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선교사를 마치고 난 후에 들었다.
당시에 내 나이로 선교사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선교사의 부름을 축하하는 사람도 이었지만 나를 아는 사람들 중에는 부정적인 시각과 다른 의견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이었다. 선교사보다는 결혼을 해야 하지 않느냐? 선교사를 마치면은 나이가 있는데… 직업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는 등의 여러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감독님은 달랐다. 신학 연구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제가 선교사로 나아가고 싶은데요? 라고 했을 때 “강형제님! 훌륭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라고 하셨다. 다음 안식일에 추천서가 작성되었고 건강 진단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감독님의 추천의 말씀에도 나에 대한 좋은 점만을 이야기했다.
첫 번째 선교 지역인 마산에서 3개월 다음에는 포항에서 5개월 있었는데 선교 사업을 시작한지 1개월 후부터 가족의 소식이 끊어졌다. 연로하신 어머님이 걱정은 되지만은 선교사로서 어떤 방법으로도 안부를 물을 수가 없었고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포항에서 있은 지 한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생각지도 않은 어느 형제에게 전화를 받았는데 형님의 사업의 실패로 형님과 어머님의 소식을 알 수 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님이 걱정이 되어 연로하신 분이 혼자서 어느 곳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를 알기 위해 더욱더 열심히 기도를 드렸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는 교회의 가정 복음 교사나 지도자들이 사업의 실패로 어디로 자취를 감춘 가족의 행방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행사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이 들어 선교 사업을 열심히 하는 것만큼 기도도 열심히 드렸다.
어느 날 밤 꿈에 어머님을 보았는데 어머님께서 아주 초라한 작은방에서 가내 부업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꿈에서 본 것은 가늘고 작은 철사를 구부리는 일을 하시는 것이었다. 한 달 수입은 6천 원을 받는 것이었다. 선교사를 마치고 귀환해서 어머니를 찾아 만났을 때, 꿈에 나타난 일들이 사실이었다.
나는 이리(익산)시에서 15개월을 봉사를 했다. 처음에는 지부가 아닌 지역이었고 교회에서는 지역장으로(후에 지부로 승격이 되어 지부장으로 부름 받음) 선교사로서는 관리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있었다. 이리 지부에서의 회원들과 활동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들도 많이 있었다. 오복자 자매님은 선교사로 봉사하기를 원하지만 그의 부모님이 반대를 하고 있었다. 때 마침 모내기철이라 선교사들과 회원들이 오자매님의 집으로 가서 모내기 일을 도와주었다. 부모님의 허락으로 오자매님이 선교사로 나갈 수 있었고, 서울 선교부에 있으면서 나의 아내와 동반자로 봉사를 하기도 했다. 이리 시민에게는 큰 비극적인 사고의 경험을 소개 하고자 한다.

77년 11월 11일 밤 이리역 폭발 사고는 선교사로서의 간증을 얻는데 큰 경험을 하는 기회였다. 그 날밤 이리(익산)시가의 하늘에는 실성한 사신이 도사리고 있었음인가. 밤 9시 15분 그 순간 두 차례의 굉음과 함께 천지가 암흑으로 변했다. 확약 열차가 폭파되면서 삽시간에 59명의 사망자와 1천3백여 명의 부상자를 냈고 시가지는 온통 유리 조각으로 눈발처럼 날려 차가운 초겨울 밤을 흔들어 놓았다. 인천에서 목포까지 화약 운송 책임자(화약 제조 회사 직원)가 추위에 몸을 녹이려 술을 마시고 화약이 실린 열차 안에서 촛불을 키고 잠든 사이에 화약 상자에 불이 붙음으로 인해 대 참사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월드컵 축구 지역 예선전인 한국과 이란 전을 TV에서 우주 중계가 있는 날이기도 하였다. 우리 선교사는 매일 영어 회화반을 교회에서 하였고 교회는 이리역에서 3,4백 미터도 안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축구 중계 때문인지는 몰라도 8시에 영어 회화반을 마치면은 항상 구도자와 복음 토론을 하였는데 이날은 약속한 구도자가 한사람도 오지를 않았다. 우리 선교사들은 가가호호를 하기로 하고 교회를 나왔다. 거리는 한산하였고 축구를 보는 시민들은 우리를 반기지 않았다. 교회에서 약1키로 떨어진 숙소로 발걸음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옴겨지고 있었다. 다른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대문 앞에서 서로 만났다. 이 때의 시간이 9시경이었다.
일찍 들어온 우리는 날을 마치기 위해 안방에 모였다. 날씨가 초겨울 이였으므로 연탄을 떼고 이었다. 아랫목에 앉아 이불 속에 다리를 뻗고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굉음이 두 번 울리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부서지면서 파편이 방안으로 날아왔다. 이때 한 선교사가 어떤 힘에 의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재빠르게 이불을 들어올리므로 인해 유리 파편을 막을 수 있었고 우리는 무사했다.

이 날밤 폭음은 17㎞나 떨어진 김제까지 들렸고, 24㎞거리의 전주시 덕진동 에서도 문짝이 흔들리는 진동을 느낄 정도이다. 사고 지점으로부터 반경 8㎞내의 건물의 유리창이 부서졌다. 15㎞떨어진 익산군(당시) 삼기 초교와 18㎞떨어진 대야 초교의 유리창도 일부가 깨졌다. 일본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660분의1의 위력을 지녔다는 화약 열차의 폭발 사고로 순식간에 육중한 열차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폭발물 적재 차량 지점은 깊이 8미터 직경30미터의 웅덩이가 생겨났다. 건물은 전파가 675동 반파가 1,289동 경파가 7,566동등 총 9,530동이 파괴됐다.
교회의 피해는 96개의 유리창이 91개가 완전히 깨져 있었고, 깨진 유리 조각은 교회의 바닥에 산산이 부셔져 싸여 있었다. 6미리 합판으로 만들어진 성찬대는 유리 파편이 꽂혀 있었다. 전기 불은 꺼졌고, 칠흑과 같은 암흑 속에서 다방과 음식점 그리고 빵집에서 TV를 보던 시민들은 유리 파편에 얼굴에는 상처를 입었다.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 라이트에 비친 얼굴에는 물을 뿌린 것처럼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이었다.
다음날 동반자와 나는 회원들의 피해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회원 집을 방문하였다. 가족 중에 혼자 회원인 독신 형제의 집이 반파 되었으나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리고 구도자 집이 한쪽의 벽이 무너져 있었고, 다른 회원들은 무사했다. 엄청난 재난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감사를 드린다. 선교부에서 온 구호 물자(담요)를 피해를 입은 형제 집에 전달했다.


우리 선교사들이 참으로 감사해야 할 것은 교회에 평일처럼 구도자를 가르치고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의 사업을 하는 선교사들을 어떤 방법으로라도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후에 이리시(익산시) 복구 사업에 선교사들이 선교부장님의 지시 아래 참여를 하였고 나중에 선교사들이 선교 사업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간증 드립니다.
선교 사업 중에 나는 이리(익산)에서 봉사를 할 때 모든 집을 빠트리지 않고 방문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구도자와 약속 시간이 없으면 계획대로 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이리역에서 몰몬경 역사에 관한 그림 즉 인디안 추장, 미대륙에 나타나신 예수그리스도, 약 속의 땅에 도착한 리하이와 그의 일행 등으로 판넬을 만들었다. 2절지 크기의 인디안 추장 그림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나는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BC 600년경부터 시작하여 AD 421년경까지의 내용 즉 리하이의 가족들이 예루살렘에서 살았으나 그들이 왜 미대륙을 건너 살았으며 그 백성의 흥망성쇠와 마지막 예언자 모로나이로부터 예언자 요셉 스미스가 몰몬경 금판을 받아 번역하여 우리에게 오게 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면은 옆에 있던 미국인 동반자는 머리를 숙이면서 공손한 태도로 두 손을 모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책을 선생님에게 500원에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은 대부분 사람들은 거절하지 않고 몰몬경을 받아 갑니다. 이렇게 하여 하루에 1 BOX(40권)를 팔기도 하였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그리고 대인 공포증이 심한 나에게는 선교 사업의 기회를 통해서 많이 발전했다. 또한 내가 귀환해서 직업을 갖고 사업을 하는 일에 얼마나 큰 도움과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귀환하고 나서 나는 아름다운 자매와 결혼도 하여 2남 1녀의 남편과 아버지로서 가정을 가지게 되었고 직장도 가지게 되었다. 전에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던 사업을 할 수 있었고 현재도 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자립을 할 수 있는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고마운 것은 김차봉 감독님께서 내가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했을 때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형제님! 선교사로 나아가기엔 너무 나이가 많습니다. 결혼도 해야지요. 경제적으로 자립도 해야 하고요.’ 만일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여 내가 선교 사업을 하지 못했다면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축복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감독님께서 유양물산(주) 상무로 계시면서 세상 적인 부와 명예를 버리고 신학 연구원 교수로 옴기실 때에는 돈과 명예보다는 썩지 않는 곳에 재물을 쌓아 두고자 하는 신앙의 소망이 있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왜냐 하면은 그 분은 그 당시에 세상을 보는 시각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내세를 준비를 잘 해야겠다고 하셨고, 그래서 교회 직장을 동경했다고 하셨다. 그런 직장이라면 천국 가는 일에 아무런 지장이 없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가르치는 것이 천직인 듯싶다. 신학원에서 가르칠 때에는 학생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시려고 노력을 하셨고 이해가 안간 듯 싶으면은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수요일 강의 시간에는 그분의 강의가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차고 넘쳤다는 것은 당시의 학생들은 누구나 이 사실을 알 것이다.

감독님이 남기신 발자국은 빛으로 남고 뭇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추억과 사랑으로 남습니다. 감독님이 남기신 빛을 받아 우리도 그 빛 가운데로 걸어 앞서가신 길에 우리도 따르렵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긴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은 짧은 시간 동안 사랑을 주시고 따뜻한 마음으로 허물을 감싸주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감독님의 남은 가족들의 건강과 주님의 축복을 기원하면서 제가 알고 있는 시 하나를 적어 봅니다.

그리움

그리움이 죄라면
그 죄 사무쳐
용서받지 못하리라

발자국마다
그리움 고이고
피눈물 고일 줄이야

의로움보다는
그리움이
훨씬 좋은 거라고
누군가가 위로하더이다

그래도
그리움은
살맛나는 일이라며
기어이
쓴웃음 짓게 하더이다

은하수 계곡 어딘가에 있을
그리운 별
그리움이 죄라면
그 죄 꼭꼭 싸안고
아픈 행복 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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