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의 후기성도
김호직 박사 약력

 dia_pink.gif김호직 박사에 대한 나의 회고
dia_pink.gif고 김호직 박사의 제45주기 추모 음악회
dia_pink.gif88서울 올림픽 개막 오페라 - 아들 김신환
dia_pink.gif한국 교회의 개척자 김호직 박사 침례 50주년

 

 

 

 

1905.4.16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부친 김경하씨와 모친 김씨 사이에서 2남 2녀중 막내로 출생

 김호직 박사의 생애와 업적
내 양을 먹이라
 
한국번역출판사 발행
2001.7.1
서울 은평구 갈현1동 300-1
전화: 02-354-0070
  팩스: 02-357-8535
 

1923

수원 고등농림학교(서울농대 전신) 수석 졸업

1930 

 

전주 신흥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재직중 일본 유학. 일본 동북대학 이학부 생물학과 졸업 귀국 후 이화여전과 숙명여전 등에서 생물학과 영양학을 가르치는 한편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식생활을 연구하여 <조선식물개론>을 1944년에 펴내 우리나라의 음식물의 우수성과 그 연구법을 나타냄

1931.3.26

박필근 여사(서울 여상 진학)와 결혼.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으나 그 중 두 아들은 일찍 사망. 신흥고보의 박정근 교감이 김호직 박사의 처남. 동북제국대학 재학시 결혼

1944

국립농사 기술원 부총재

1948

숙명여전(숙명여자대학교 전신) 교장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 이사회 총회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그 기구로부터 원조 획득에 성공

1949.11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 코넬대학교 유학. 정부 수립 후 제1차 도미 유학생.
2년 반동안 영양학을 전공하여 이학박사 학위 취득, 학위 논문 "콩의 생장 촉진소" . 당시 세계 생물학계에 커다란 각광을 받음

1951.7.29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에 개종하여 침례와 확인을 받음

1951.8.26

아론신권을 부여 벋고 집사에 성임

1951.8.26

아론 신권 제사에 성임

1951.9

미국에서 귀국하여 12월 부산 수산대학 제4대학장에 취임 (1954년 1월까지)

1952-1956

대한 생물학회장을 제7대에서 11대까지 역임

1953

국민영양개선과 농사교육 보급에 이바지한 공로로 대통령상 수상

1953.5.17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멜기세덱 시권을 부여받고 장로에 성임

1954

서울로 돌아온 후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 등에서 강의

1955.3.10

문교부 차관에 임명되어 1956.6.18일 까지 역임

1955.8.2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한국 지방부장으로 임명

1956

재단법인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사장 취임

1956

한국 학술원자연과학 분과 위원장

1957

홍익대학 학장. 한국 학술원원장. 한글학회 이사장

1958

유네스코 제7차세계대회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

1958

서울시 교육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

1959

건국대학교 축산대학(한국 최초 축산대학) 초대학장에 임명

1959.8.29

서울시 교육위원회에서 회의도중 뇌일혈로 쓰러져 8월 31일 서거

1959.9.4

사회장으로 장례식. 망우리 묘소에 영면

 

저서로는 <소맥분 보강에 대한 연구>, <콩 단백에 관한 연구> 등이 있음

김호직[金浩稙, 1905~1959]

  
영양학자, 교육자. 활동분야는 영양학, 교육학. 출생지는 평북 벽동. 주요수상은 대통령상(1953년). 주요저서로는 《조선식물개론》(1944), 〈콩단백에 관한 연구〉가 있다. 평북 벽동군에서 태어나 1924년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농대 전신)를 수석졸업(1923)하고, 1930년 전주 신흥고보에서 재직중 일본 유학 일본동북대학 이학부 생물학과 졸업(일본 동경제국대학-두산백과사전))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숙명여자전문학교에서 생물학과 영양학을 가르치는 한편, 우리의 전통적인 식생활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우리 전통 음식을 연구하여 《조선식물개론》(1944)을 펴내고 우리나라 음식물의 우수성과 그 연구법을 나타냈다. 1949년 미국 코넬대학
(Cornell)에서 영양학 석사학위와 〈콩단백의 영양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1년에 귀국하여 부산수산대학장(4대,1951.9-1954.1), 연희대학교 교수, 문교부(교육부) 차관(1955.310-1956.6.18),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장(초대,1959) 등을 지냈다. 국민영양 개선과 농사교육 보급에 이바지한 공로로 1953년에 대통령상을 받았다. 학술원회원, 한국영양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논저로는〈소맥분 보강에 대한 연구〉〈콩단백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한국인 최초의 말일성도, 1951.7.29  예언자 요셉 스미스가 침례를 받았던 사스퀘하나 강변에서 침례를 받음. 1952년 박사 학위. 1947년 42세로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전신인 숙명여전의 교장 시절에 미국유학했다. 다른 기독교 교화 지도자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교회가 재단법인으로 설립되어 정부의 인가를 얻는데 공헌을 함. 2001년 7월 '김호직 박사의 생애와 업적' 출간(한국번역출판사 발행(전화:02-354-0070). 김호직 박사의 기사는 '두산백과사전'참조.

성도의 길

성도로서 갖추어야 할 일 가운데 각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진실성입니다.
성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진실하여야 합니다.
진실성을 잊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나와 남을 속이지 않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진실한 사람은 귀여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귀여움을 받는 것입니다.
비교적 진실해서는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진실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효박한 세상에서 허위 가식이 없이
참으로 진실되어 지내기는 퍽이나 힘든 일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진실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 저희들로 하여금 진실되게 하옵소서.
조석으로 올리는 기도 가운데 꼭 넣어야 할 것입니다.

        
     - 김호직 박사 말씀, 성도의 벗 창간호에서 -


김 호직 박사에 대한 나의 회고


- 글 : 홍 병식 형제

내가 김 박사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53년이었다. 당시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나는 어느날 같은 과 친구인 김효근(현재 광주 과학 기술 연구원장)의 권유로 용산의 미 8군 기지 안에서 있던 한 교회에 참석하였다.
그 모임에는 미군들이 대부분이었고 한국인들은 불과 몇 명되지 않았다. 거의 모두 대학생이거나 고등학생들이었는데 어른이라고는 단 한 분이 계셨다. 그 분이 바로 김호직 박사였다.

그 모임이 내가 처음으로 접한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였다. 그 때 김 박사와 함께 미군들과 자리를 함께 했던 한인으로서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김 박사의 두 딸, 정숙, 영숙 자매와 김 박사의 두 아들
신환, 태환 형제, 이석구 박사(당시 서울대학교 공대 재학중), 양종환 형제(현재 미국 콜로라도 주 거주), 신호범 형제(현재 워상턴주 상원의원), 임성섭 형제, 이호남 형제(현재 BYU교수), 최상흡 형제(현재 미국 San Diego거주), 신채원 형제(현재 미국 Georgia주 거주), 정흠주 (현재 미국 거주), 영주 형제(육군 장성으로 퇴역), 지경덕 형제 등이었다.

매주 주일학교는 김 박사와 이석구 형제가 한국어로 가르쳤지만 성찬식은 영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영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었다. 그 곳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다 영어를 잘 하였다. 특히 영어를 잘 하신 김 박사님의 인자한 인품과 경전지식에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나는 그 때부터 복음 공부를 주일 학교에서 매주 하게 되었고 약 1년 반 후인 1955년 여름에 침례를 받았다. 지금은 헐려 버린 전 중앙청 앞에 침례교회가 있었는데, 그 침례교회의 침례탕을 빌려서 미군 형제들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내 침례 동기는 신채원 형제와 유경옥 자매였다.

그 후 1년후인 1956년에 처음으로 선교사 두명(Don G. Powell 장로, Richard Detton 장로)이 김박사의 신원보증하에 한국에 왔고 한국 지부도 처음으로 당시 서울 고등학교의 한 교실에서 조직이 되었다. 물론 지부장은 선교사였고 그 후 계속 지부장은 선교사가 맡게 되었다. 어느 주일에 김 박사는 나에게 지방부를 조직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 다음 주일날에 꼭 교회에 참석하라고 하셨다.

지방부가 조직되던 날 조촐한 모임이었지만 매우 영적인 모임이었다. 당시 북극동 선교부장이었던 폴 씨 앤드루스(Paul C. Andrus) 부장의 감리로 김 박사가 지방부장으로 부름을 받았고 내가 제1보좌 그리고 이호남 형제가 제2보좌로 부름을 받았다.

모임이 끝난 후, 김 박사가 나에게 말씀을 하셨다.
"실은 제1보좌로 내정된 형제가 있었는데 그 형제가 그 모임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네를 제1보좌로 부르게 되었네." 라고 하셨다.
지방부가 조직이 되었다지만 지부장이었던 선교사들은 선교부장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선교부장이 지시를 했기 때문에 그 때의 한국 지방부는 관활할 지부가 없는 지방부였다. 그래도 선교부장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지지를 보여주신 김 박사의 겸손과 깊의신 신앙태도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김 박사의 서거 이후에는 지부를 통괄하는 지방부가 되었는데, 지방부장으로는 현 북 아시아 지역 회장인 엘 에드워드 브라운)L. Edward Brown)장로와 그를 이은 린 와델(Lynn Waddell)장로 등이 지방부장으로 부름을 받았다. 물론 김 박사의 장례는 당시 지방부장이었던 브라운 장로의 감리하에 성대하게 치렀으며 문교부장관이었던 이선근 박사의 눈물어린 장례사는 내 뇌리에 지금도 선하다.

나는 근 70 평생을 거쳐 많은 인물을 만났다. 그 중에서 누가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냐고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일초의 주저 없이 김호직 박사라고 대답하겠다. (자료원: 김호직 박사의 생애와 업적)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 한국지부 탄생 [195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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