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와 한국을 좋아하는 미국 남자, 김미남

레이디경향   2003-10-14

“아버지는 6·25 참전 용사, 난 선교사로 한국 방문, 한국과의 질긴 인연이 참 행복합니다”
매주 한 번씩, 고정적으로 한국 문화를 한 판 엎어 치는 미국 남자가 있다. MBC-TV ‘생방송 화제집중’

김미남의 대한민국 뒤집기 코너의 김미남. ‘ 김치를 좋아하는 미국에서 온 남자’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는 한국 문화를 하나씩 뒤집어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고, 한국은 그를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김치를 잘 먹어서 김치 金씨, 김미남이 됐죠!”

“찜질방 정말 좋아요. 외국 사람들은 절대 이런 걸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직접 와본다면 누구든 정말 좋아하게 될 거에요!”

흰 셔츠에 반바지, 흰 수건을 머리에 둘러쓴 채, 같은 복장의 아줌마 부대 가운데에서 덩치 큰 외국인이 입담 좋게 떠들고 있다. 본명은 P. J. Rogers, 한국 이름은 김미남. TV 브라운관에서 그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입심과 에너지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한국 아줌마들과 넉살 좋게 어울리고 있었다. 파란 눈과 노란 금발, 코가 오뚝한 하얗고 작은 얼굴에, 커다란 덩치를 하고서 말이다. 나올 때마다 ‘김치를 좋아하는 외국인, 김미남!’이라고 강조하는 그는 그 멘트에 연이어 찜질방에도 가고 점도 보러 간다. 피서랍시고 사람 치이는 부산 해운대도 누비는데, 가는 곳마다 아줌마들과 입담 한 판을 벌여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인터뷰는 그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중에도 그는 동네 아주머니에게 농담을 건넨다. “여기에 사세요? 아니시라고요? 우리집으로 초대하려고 했는데.” 유쾌하면서도 여유 있는 모습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짐짓 섭섭하다는 듯 눈을 내리뜨며 한쪽으로 약간 들어올리는 고개, 스스럼없는 말투, 장난기와 여유가 가득한 미소. 유난히 키도 컸다. TV 속에서 보던 것보다는 조금 낯설다 싶었다.

집 앞에서 그는 현관문을 활짝 열어주며 한 쪽 팔을 집 안을 향해 크게 벌렸다. 집 안에 들어서자 처음으로 눈에 뜨인 것은 현관 신발장 위의 조그만 청동상. 나무 지게를 진 농부의 모습이었다. “이거 우리 형이 만든 거예요. 우리 형이 직접!” 예술가인 형이 그의 주문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농부상은 꽤나 사실적이었고 정교했다. 거실에도 장식장을 대신해서 우리 고유의 장을 두 가지나 들여놓았다. 단 칸 장롱의 문을 활짝 열어 TV 장으로 활용했고, 그 옆에는 고가구점에 직접 디자인 개조를 주문했다는 장식장이 놓여 있었다.

“한국의 가구를 아주 좋아해요. 소파는 미국에서 직접 사왔지만요, 한국 소파는 제 체형에도 안 맞고 조금 비싸거든요. 장식장만은 제가 따로 주문을 했죠. 의자들도 몇 가지 더 있어요.”

정말 한국적인 것을 좋아하나보다 생각이 들자, 대뜸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한국 문화에 정말 관심이 많으냐고, 김치를 정말로 좋아하느냐고. “아뇨! 사실은 별로예요.” 그가 상체를 가까이 숙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질문하던 얼굴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던지 그가 크게 웃으며 이내 다시 말한다. “물론 아주 좋아해요. 김치를 매일매일 먹는 걸요. 이것도 좀 보실래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책인데.” 변두리 동네의 골목골목 아이들과 사람들의 천진한 표정이 잔뜩 담긴 흑백 사진첩을 내민다. 한국 사람들, 이 표정과 모습을 그는 사랑한다고 했다.

“김장, 담아본 적 있어요?” 그가 오히려 묻는다. “전 있어요. 성남 친구 집에서 친구 아내와 함께 담아봤죠. 그런데 김치 담을 때 손가락이 무척 아팠어요. 그럴 때 어떻게 하면 손가락이 안 아픈지 알아요? 설탕물에 담그면 되요. 진짜 신기하게 손이 안 아파요.”

매운 고춧가루와 양념 때문에 손에 통증이 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김치 담그는 일도 재미있지만, 먹을 때를 더 좋아한다고. 그는 김치의 푸른 이파리 부분이 가장 맛있다고 말한다. 맵고 곰삭은 양념 맛을 제대로 아는 연세 지긋한 어른들처럼 말이다.

“한국에 오자마자 첫 식사에서 바로 김치를 먹었어요. 오이김치였죠. 맵고 먹기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저는 처음부터 너무 맛있었어요. 그땐 선교사였는데, 같이 온 대부분의 일행은 김치를 잘 못 먹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너무 맛있어서 혼자 서너 접시를 먹어치웠죠. 그 이후에 제 이름이 김미남이 됐어요. ‘김치를 좋아하는 미국 남자’란 뜻이죠. 제 성은 김치 김씨에요!”

한국 땅을 밟으면서도 그에게 한국은 낯선 나라는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6·25 한국전쟁 당시 참전 용사. 그는 어릴 적부터 종종 아버지에게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들어왔었다.

“아버지는 한국이 산이 많은 나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가난한 나라라고도 하셨죠. 아버지는 전쟁 속의 한국만을 알고 계시니 그러실 수밖에 없었죠. 지금도 한국말을 ‘꼬마야’, ‘먹어라’, ‘건빵’ 정도는 기억하고 계세요.”

한국전 참전 군인의 아들, 그의 입에서 전해오는 한국의 오랜 기억은 가슴 아픈 것이었다. 1988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그는 무척 놀랐다고. 아버지에게서 전해들은 한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기 때문에.

“아버지도 1997년에 한국에 오셨죠. 상당히 기뻐하셨었어요. 하지만 공항에 내리셨을 땐 여기가 한국이 아닌 줄 아셨다고 했어요. 다른 나라에 오신 줄 알았다고. 한국이라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없어 하셨죠.”

처음 그가 선교활동을 위해 한국에 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간 것은 2년 후인 1990년. 그리고 다시 돌아온 것은 1996년이었다. 그 사이 그는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마케팅 매니저로 일도 했다. 그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한국 문화에 대한 남다른 이해 때문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국제 비즈니스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문화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한국 남자가 여자에게 데이트를 신청했을 때, 여자는 거절을 완곡하게 표현하기 위해 ‘다음에 해요!’라고 대답하죠.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죠. 이런 방식이 국제 사회에서는 오해받기 쉽거든요. 미국인에게 ‘데이트 다음에 해요’라고 말하면 ‘그럼, 다음 언제 할까요?’라는 반응이 나오는 식이니까요. 전 한국 사람들의 문화를 잘 이해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제가 이런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생각으로 그는 196년 한국에 돌아와 경영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EWC(East West Consulting)’, 그가 CEO로 있는 이 경영 컨설팅 회사는 지금은 미국, 일본, 중국에 지사를 갖고 있는 탄탄한 회사로 성장했다. 1996년 말에는 절친한 한국인 형의 권유로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입학을 했고, 석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박사 학위 코스에 있다. 그가 졸업한 ‘Brigham Young University’는 연세대학교와 자매결연한 곳으로 그때 한국어 통역을 해준 인연으로 당시 연세대 농구부 최희암 감독과도 절친한 사이라고. 덕분에 1996년 한국에 돌아왔을 당시 연대 농구부 숙소에 잠입해서 생활한 경력도 있다.

“문경은, 이상민 같은 유명한 선수들이 그때 연세대 선수들이었어요. 함께 숙소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무척이나 재미있었죠. 그 숙소 식당 아줌마의 김치찌개가 아주 맛있었는데… 지금도 가끔 먹고 싶어요.”

옛날에 먹던 김치찌개 맛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는 그는 영락없이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하는 한국 남자 같았다.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담아 방송을 합니다

최희암 감독과의 인연으로 1996년 ‘행복찾기’라는 프로에 ‘한국 여성을 좋아하는 외국 남자’로 소개된 적이 있었다. 그것이 방송 입문이라면 입문. 이후에 SBS 라디오 ‘이숙영의 파워 FM’에 ‘김미남의 영어 한 마디’란 코너를 매주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고 TV 고정 리포터까지 하게 되었다.

“제가 방송을 하는 이유는 물론 재미도 있지만 한국을 위해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해요. 저는 한국인에게 한국말을 배웠죠. 그래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영어를 제대로, 쉽게 가르쳐 주고 싶어요. TV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한국 문화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외국인의 입장에서 한국 문화를 새롭게 볼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저는 한국 문화를 사랑하지만, 외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인이 보지 못하는 다른 면을 보여줄 수가 있으니까요.”

그는 한국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을 ‘정(情)’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의 정은 좀처럼 생기기 힘든 것이지만 한번 생겨나면 그 사람을 위해 어떤 도움과 애정도 아끼지 않는 것이라고.

“정은 ‘관심’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관심이 잘못 표현되면 좀 곤란한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한번은 제가 지하철에서 한글로 편지를 쓰고 있었죠. 덩치 큰 외국인이 한글로 편지를 쓰는 것이 이상했는지 한두 명씩 저를 쳐다보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10명쯤 되는 사람이 제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제가 쳐다봐도 갈 생각도 안하고 말이죠. 제가 편지에다 ‘이분들 왜 내 편지를 읽고 있을까?’라고 썼더니 그제서야 비켜서더군요.”
하지만 이런 못말리는 ‘정’ 때문에 타국인 이곳 생활이 미국에서만큼 행복하다고 말했다.

“한국 사람들이 하는 말 있잖아요. 죽을 때 곁에서 울어줄 친구 세 명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거라고요. 전 다섯 명이 있어요. 그 중에 세 명은 한국 사람이죠. 두 명만 미국 사람이에요. 전 정말 성공한 사람 맞죠?”

그는 한국의 선후배, 형과 동생 관계가 너무나 인상적이고 마음에 든다고 했다. 선배가 후배를 보호해주고 후배는 형을 따르는 관계. ‘멋있다’는 한 마디로 그 관계를 일축한 그는 정말 한국에서 좋은 선후배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다.
“한국의 가정이 더욱 탄탄해지길 바랍니다. 좀더 많은 아빠들이 일찍 가정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래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나눠야 하죠. 가정이 행복해야 나라가 강해지는 거죠.”

한국이라는 나라가 좀더 잘 되길 간절히 바란다는 미국 남자 김미남씨. 그는 방송에서 한국 문화를 뒤집으러 갈 생각에 매주의 생활이 즐겁다며 다문 입의 꼬리를 치켜 올리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만나게 될 미래의 아내도 한국을 사랑하면 좋겠다는 김미남씨. 그와 함께 잘 익은 김치를 맛있게 먹어줄 수 있는 ‘그런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글 / 김영인(프리랜서)  사진 / 송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