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산 (金 山)

   5대 국회의원(참의원)을 지냈다.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다. 감리교회 목사로 13년간 봉직했으며, 1898년 3월 3일에 함북 종성에서 출생하여 13세 때 만주 간도성에 들어가 소학교 졸업했다. 항일독립투쟁으로 유명한 관서지방 평안북도 신성중학교 졸업(12회)했다. 18세 때 경북 안동에서 중학 2년 과정 이수했고, 서울에 올라와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중국 남경에 있는 금능대학에서 신학과를 졸업했다.  1919년 3월 1일 삼일운동으로 1차 투옥되었고, 1921년 상해 임시 정부의 지시에 의하여 독립 운동을 하다가 재차 투옥되었다. 그후 감리교회 목사로 13년간 봉직했고, 5대 국회의원을 비릇해서 20여년간 정치인으로 크게 활약했다.

   1969년 7월 5일에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6와드에서 선교사로부터 몰몬경을 받아 읽고 간증을 얻어 개종한 이래,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경기도 고양지부장을 역임하는 등 서울 서 스테이크(교구) 고등평의원, 서울 북 스테이크 축복사로 봉사했다. 1978년에는 서울 2와드 교회(현 서대문와드)에서 80회 생신축하 모임이 있었고, 여기에서 김산 형제는 과거의 많은 사회적 유대와 경험과 생활을 지불하고 개종한 간증의 말씀이 있었다. <아래 사진>

   김산 형제 특유의 제스처와 음성으로 연설을 독특하게 하며, 한국 정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 특히 자유당 시절 서울의 서대문에서 참의원 선거에서 권력가인 이기붕씨와 맞대결하여 당당히 당선된 것은 유명하다. 결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에 개종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고 돌아가신 선조들(타 기독교는 이에 대한 구원의 계획이 없어서)에 대한 계보사업을 하는 등 열정적으로 교회와 사회문제 등에서 일했다. 많은 교회 회원들에게 간증을 심어주었으며, 여러 회원들의 결혼식 주례를 통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전했다. 손자가 선교사로 봉사했다.

  김산 형제가 졸업한
신성(信聖)중학교는 1906년 민족의 선각자 김석창 등에 의해 관서지방 평북 宣川에서 설립되었다. 교육구국과 신앙교육으로 출발한 신성학교는 나라의 비탈길에서 저항의 동산이었으며, 105인의옥사건, 3.1독림운동, 1929년의 학생만세시위 등 대일항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관서지방의 민중봉기를 항일투쟁을 선도하기도 했다. 일본이 붕괴 직전에 학교의 교패(校牌)마저 빼았겼다. 그 후 경기도 안양시 안양6동에 학교를 설립 후학을 이어가고 있으며(신성중고등학교), 차병원 이사장인 車경섭씨는 이 학교 29회 동문이며, 연세대총장을 지낸 白락준 박사(5회), 전남지사를 지낸 李하영(15회),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며 항일 반독재투쟁으로 생을 마친 장준하(張俊河)(29회,1918-1975 ), 음악평론가 李성삼(23회), 신사참배 거부로 일제에 대들고 '밀턴'의 저항시를 읊으며 항일의식을 고취한 뒤 8.15후 연세대 교수를 지낸 沈인곤(11회) 등의 유명인사가 있다.


신성학교 동문들(좌측에서 7번째가 김산 형제(중앙, 당시 85세)) (동아일보,1982.7.21)


<생신 케익을 자르는김 산 형제님 부처>

 

김 산 형제 80회 생신 축하

1978년 3월 5일, 금식 주일을 맞아 서울 스테이크와 서울 서 스테이크 제2와드(현재 서대문 와드)애서 합동 노변의 밤을 가졌다. 이날 모임은 김 산 형제의 제80회 생신을 축하하고 젊은 청소년들에게 충효사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특별하게 마련되었다.
 노변의 밤을 갖기 1시간 전에 양 스테이크 지도자들은 따로 모임을 가져 생일 축하 노래와 생일 케익과, 선물로 생신을 맞는 김 산 형제를 기쁘게 해드렸다.



말씀하시는 김 산 형제님과 회중 <80회 생신 축하 모임에서/서대문교회(와드)>
 


말씀하시는 김 산 형제
(1979,서대문와드(교회), 홈페이지 운영자 결혼식 주례에서
신랑,신부와 회중에게 말씀)
 


1970년 서울 서지방부장단 시절의 김 산 형제(우측에서 두번째)
-지방부장 김종균(좌측 두 번째), 제1보좌 한인상(좌측), 제2보좌 김 산, 서기 서 원(우측), 황종섭 형제-
(당시 교회 조직은 전국에 4개의 지방부인 서울 동중앙지방부(박재암 부장),
서중앙 지방부(김종균 부장), 남부지방부(배영천 부장), 호남지방부(이재수 부장)가 있었다.)


前국회의원 김산축복사에 대한 추억

 -김광윤 형제-

국회의원을 지낸바 있는 김산축복사는 한국지도자들과 미국 연차대회에 초청되었다. 대회전에 킴볼회장님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다. 지도자들이 후두염수술로 쉰목소리를 내는 선지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선지자는 사랑한다고 말하였다. 잠시 후 김산축복사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손에 든 계보기록을 선지자에게 보여주면서 세계에서 가장 계보기록이 잘 되어있는 한국에 성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선지자는 그런 그를 말없이 바라보더니 지도자들을 다시 한번 포옹해주었다. 그리고 다음 연차대회에서 한국성전건축이 발표되었다. 김산축복사의 간절한 바램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감리교 목사출신였다. 신학대학에서 목사들을 가르치는 교수인 적도 있었다. 그는 한국 감리교의 역사이기도 했던 저명한 사람이었다. 어느날 길을 걷다가 미국인선교사 두명을 만났다. 선교사들에게 수고들한다고 인사를 건넸고, 선교사들은 그에게 시간이 있느냐고 물었다. 연락처를 알려주고 나중에 보자고 했는데 선교사들이 그를 찾아갔고 복음토론이 시작되었다. 김산축복사는 토론중에 ‘죽은자를 위한 침례’ 부분을 들었고 성경의 어디에 그 구절이 있는가 물었다. 선교사들이 고린도전서 15:29절을 보이자 그는 깜짝놀랐다. 그 구절은 그가 늘 읽고 가르친 부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선교사들이 가르친 방식으로 그 구절을 생각해보지않았는가 하고 스스로 의아해하였다. 그리고 배드로전서 3장과 4장의 죽은자에 대한 영옥에서의 복음전파에 대해서도 자신이 그것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독립군이었다. 할아버지는 대지주였는데 재산을 가난하고 선량한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독립군에게 독립자금을 보낸 그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었다. 그가 가진 교리로는 돌아가신 훌륭하신 할아버지를 구원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맑은 샘물을 마시듯이 깊이 받아들였고 그 교리를 마침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그는 개종을 결심하였다. 그가 회복된 교회로 개종한다는 것은 커다란 사건이었다. 자신의 사회에서 받아온 모든 존경과 명망을 뒤로 두고 나오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집안이 종교적으로 망하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는 국회의원이었었다. 그는 이승만의 오른팔이었던 이기붕과 영등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맞붙었다. 여론은 뚜렷하게 김산축복사측으로 기울었다. 이기붕은 낙선을 염려하여 강원도로 이동하였고, 그의 새로운 경쟁자와의 선거에서 이겨 김산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런 얼마후 그는 정치판이 아주 지저분하다는 것을 알고는 정치를 떠나 종교계로 복귀하였다.

김산축복사는 선교사와의 토론을 마치고 개종하였고 나중에 축복사로 부름받았다. 그의 개종은 가족에게 가난을 물려주는 것을 의미하였다. 회복된 교회가 그에게 재산을 준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기존 사회에서 비판과 냉대를 받으면서 후기성도교회로 개종하였다.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 사는 딸과 만나려고 연락했으나 집안을 망하게 한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고 딸은 거절하였다. 떠나오던 때에 딸과 만나긴했지만 후기성도로의 개종은 그의 가족들에게 커다란 고통이었다.

한국감리교 100주면 행사 때 김산축복사가 행사장에 초대되었다. 그만큼 그는 감리교 역사에 중요한 존재였다. 연단에 오르자 그는 자신이 왜 몰몬이 되었는지 개종의 동기를 설명하였다. 그의 설교를 듣는 목사들 2/3가 그가 배출한 제자들이었다. 그는 설교후 준비해간 300여권의 몰몬경을 그들 목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남은 여생을 가난하면서도 회복된 교회의 복음에 대한 간증을 간직한 채로 살다가 세상을 하직했다. 그가 30대의 민혜기장로를 만났을 때 민장로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자네처럼 젊다면 얼마나 좋을까? 10년만 더 일찍 침례를 받았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을텐데.’ 그렇게 아쉬워하면서 그는 세상을 떠났다(이상은 민혜기장로가 조용현회장에게 들려준 이야기).

김산축복사는 특별히 나와 같은 경주김씨이므로 그의 간증과 신앙이 더더욱 나의 마음에 강하게 자리잡는다. 젊은 시절에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결심하게 하였다.[자료:LDS한인네트워크/김광윤 칼럼]



중국의 음악 영웅 정율성과 김산 축복사


광주(光州)는 최근 정율성이라는 사람이 태어난 곳이 남구의 어디쯤이냐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럴법한게 그는 중국의 영웅 음악가이다. 만일 광주에 생가가 조성되면 중국인들 관광객들이 물밀 듯이 밀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정율성은 1914년 8월 13일 광주에서 태어났다.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과 상하이등지에서 항일 운동을 하였다. 1937년 옌안의 예술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였고 1939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후 그는 팔로군합창등 수많은 노래를 작곡하였다. 그증 팔로군합창곡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인민해방군가 라는 정식비준을 받았을 정도로 중국에서 인정을 받았다. 한마디로 중국의 음악영웅이 된 것이다.


그가 1935년 조선민족해방동맹이라는 항일단체를 결정했는데 거기에 우리 교회의 김산형제가 연계된다. 김산형제는 교회에서 축복사로 부름받았는데, 님 웨일즈의 책 ‘아리랑’의 주인공이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본 것은 1980년 초 스테이크센타에서였다. 당시에 그는 칠순이 넘은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로서 ‘민족당’이라는 정당을 만들고 그 당의 총재가 되어 있었다. 노변의 밤 형식으로 진행된 모임에서 그는 민족당의 발전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몇 년있다가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이야 상원, 하원, 주지사등 많은 사람들이 정치활동을 한 흔적이 있지만, 한국교회에서 정치계로 진출한 회원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김산형제가 한국 교회의 첫 번째 정치인이라는 기록을 보유한지도 모르겠다. 정율성이라는 중국의 영웅이 우리 교회의 회원인 김산축복사와 연계된 기록들이 신문지상에 조금씩 등장하고 있어 그에 대한 추억을 잠시 떠올려보았다. 무등산에서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는 이른 아침이다.

(2006.7.14.금)

 


1975년 서울 장충 체육관에서 한국 대회 말씀을 청취하고 있는 김 산 형제(중앙) [1975.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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