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굴(龍窟) 탐사

   나는 모험과 호기심이 많은 소년이었다. 마을의 근처의 산이나 들판을 다니면서 혹시나 특이한 곳이 있으면 탐사를 자세히 하고야 말았다. 고향마을을 중심으로 적어도 사방 30km 정도 이내의 산들은 거의 모두 탐사를 했다.

처음 탐사 대상은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높은 산인'병산(柄山)'과 '승달산(僧達山)'의 동굴탐사였다. 내가 동네의 내 또래 중에서 골목대장이었기 때문에 꼭 아이들을 이끌고 이러한 탐사에 나섰다. 병산 허리에 있는 조그만 동굴이 여러곳이 있는데 이곳은 모두 깊이가 짧은 곳으로 동네 사람들은 일제 때 일본인이 자기들이 전쟁 때 숨기 위해서 파놓은 곳이라 했다.  

법천사

중학교 입학을 대기하던 해 2월 어느날, 나는 평소에 탐사를 해보고 싶어서 오랫동안 계획해 두었던 곳을 가기로 했다. 동네사람들의 전설에 의한 목표로 한 산은 나의 마을이 있는 무안군과 인접해 있는 함평군 자풍리 돗재 너머에 소재 한 <깜박산(감방산/해발 258미터)>으로, 이 산에는 용굴(龍窟)이 있는데 중턱의 동굴과 서해 먼 바다인 칠산바다 가운데와 서로 굴이 뚫어져 있어서 바닷물이 밀려오면 이 동굴의 물은 차 오르고 썰물이 되면 동굴의 물이 빠진다는 것이었으며, 이 동굴 안에는 커다란 용이 살고 있어서 여름에 소나기가 오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것이었다.  

이 곳은 마을에서 꾀나 먼 곳이다. 약 오십리(20km) 정도가 된다. 나는 이 산에 있는 용굴의 탐사를 하기 위해서 준비를 많이 했다. 동네 아이들을 5명 정도 모으고 손전등을 준비했으며 점심때 먹을 식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 동굴 속에서 용이나 무슨 짐승이 있으면 싸우기 위해서 몽둥이도 몇 개 준비했다. 아이들은 한 두 명을 빼고는 무서워서 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나의 명령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가기로 했다. 나도 무서웠으나 호기심이 너무나 강해서 두려움을 몰아냈다. 특히 <보물섬>을 수 번이나 흥미롭게 읽어서 호기심이 너무나 컸다.  

우리 일행은 마을을 출발했다. 산이 어디에 있는지 대강만 알고서 가면서 계속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서 갔다. 특히 나는 할아버지들을 좋아해 꼭 나이 많은 할아버지를 택해서 길을 물었다. 왜냐하면 나이가 많을수록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들께서는 모두들 친절히 가르쳐 준다.  

그런데, 몇 분의 할아버지는 거기를 가면, 용이 살고 있어서 동굴이 천길 낭떠러지와 이어져 있어서 동굴에 가면 모두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용을 보았느냐고 물으니 실재로 비가 오는 날이면 용이 그 동굴에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나는 두려움과 호기심이 동시에 발동하여 더욱 가보고 싶었다.

우리는 마침내 산의 입구에 도착했다. 산밑의 마을에 사는 할아버지를 또 만나서 바로 산밑에 살고 있어서 더욱 자세히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어 상세한 전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분 할아버지는 자신이 젊었을 때 몇 번 가보았는데, 동굴을 발견하고 들어가 보니, 그 동굴 입구는 매우 비좁아서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과 동굴 입구에는 주변에 대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동굴 입구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실재로 그 동굴에서 용이 살고 있으며 동굴과 서해 바다를 동굴 속으로 연결된 동굴을 통해서 다닌다고 한다.

우리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정확한 위치를 모르지만 우선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대나무 밭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보통 대나무는 마을에서 자라고 특히 시골집의 뒤에서 울타리 대용으로 자라고 있는데, 왜 대나무가 산에서 자라는지 의문이 가기도 했지만 용이 자기가 살고 있는 동굴을 은폐하기 위해서 대나무를 심었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다.

반나절을 헤맨 끝에 드디어 대나무밭을 산의 8부 능선쯤 되는 곳에서 발견했다. 그런데 대나무가 한 곳에 많이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띄엄띄엄 자라고 있었고 꽤 넓은 곳에 분포하고 있어서 어디가 동굴 입구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산은 생각보다는 험한 편은 아니었다. 바위들과 나무들이 많이 있었지만 험준한 편은 아니었고, 바위 틈새도 비교적 잘 분별을 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동굴 입구를 발견하기 위해서 대나무가 있는 주변은 상세히 모조리 뒤지기 시작했다. 동굴 같은 것은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바위의 주변을 일일히 면밀히 살피면서 바위의 틈새와 조그마한 구멍이 있어도 파 해쳤다. 왜냐하면 할아버지 이야기가 동굴 입구가 매우 좁고 사람이 겨우 기어 들어갈 정도라 했으니 혹시나 입구가 막혔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끝내 동굴 입구를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쳤으며 다른 산의 주변을 찾았으나 이 지역 외에는 대나무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동굴 같은 것도 없었다. 우리는 산 속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찾기로 했다. 이제는 산허리를 돌고 오르고 내려오면서 다시 한번 산등성이를 모두 뒤졌으나 동굴은 없었다. 조그만 동굴이 더러 있었으나 깊이는 얕았으며 산짐승도 보이지 않고 신 짐승의 똥들만이 많이 발견되었다.

억새풀 밭에서 친구들과 뒹굴때가 가장 즐겁다
山이 거기에 있어서 가고 가고...

우리들은 완전히 기진 맥진했다. 20km를 걸어왔고 또 산을 헤매다 보니, 더구나 동굴은 발견하지 못했지, 지치고 지쳐버렸다. 불만을 터뜨리는 아이들이 있었으나 나의 말에는 잠자코 있었다. 이제는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자니 너무 서운했으며 몇 년을 기다려 온 동굴 탐사인데 실망이 가기도 했다. 나는 최종적으로 이번 탐사는 포기를 하고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어느덧 해도 서양으로 기울고 캄캄한 저녁이 오면 돌아가기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하산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하산 중에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산밑을 내려오는데 계곡 저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보니 1km정도 떨어진 공중에서 새들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가까이 달려갔다. 나는 잠깐 멈추라고 했으며 그 이유는 싸우는 것을 지켜 본 후에 가자고 했으며 지쳐서 땅에 떨어지면 그 때 가면 된다고 했다. 그 당시 내가 왜 이러한 지혜가 있었는지 지금도 의아스럽다. 공중에서 싸우는 새는'매(솔개)'와 '꿩'이었다. 한참을 기다리니 꿩이 땅 위로 떨어졌다. 그런데, 바로 솔개가 달려와서 꿩을 또 덮치는 것이었다. 우리는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우리가 다가오니 커다란 솔개는 우리를 노려보더니 달아났다. 우리는 솔개 덕택에 자연적으로 큼직한 살찐 꿩 한 마리를 얻었다. 꿩은 완전히 죽어 있었다.

나는 마침 이 꿩을 어떻게할까를 생각했다.  집으로 가지고 가려고 생각했으나 곰곰이 생각하니 마을로 가는 길목에 마침 동창('서영')이 생각이 났다. 이 친구 집으로 가져가서 요리를 해서 먹기로 작정을 했다. 해는 저서 어두워졌다.나는 마을 친구들을 대리고 이 친구 집으로 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이 친구도 기가 막힌 꿩고기를 먹게 되었다고 요리를 쾌히 승낙했다.

우리는 꿩고기 요리를 여러 명이 해먹고 그 날 저녁 신나게 친구 집에서 놀다가 나의 마을로 돌아왔는데, 다행히 달이 밝아서 오기에 좋았고, 새벽 2시가 되어서 돌아왔다. 물론 다음날 어머니께 야단을 맞은 것은 당연했고. 어머니께서는 나 보다도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하루가 지나서 오니 아이들 부모들께 걱정을 끼치게 된 것 때문에 야단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나의 아버지께서는 묵묵히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듣고만 계셨다. 왜냐하면 항상 아버지께서는 나의 열열한 지원자였다.  

지금도 마을 근처에는 수 많은 전설들이 수 백년 간을 이어오면서 신비스러운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나의 호기심으로 대부분 탐험과 실사를 끝냈는데도 전설은 전설대로 사실과 무관하게 면면히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사람들은 그 전설들을 사실대로 믿고 있고, 그리고 나 같은 아이들이 또 탐험을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등산 코스

승달산은 3백미터가 조금 넘는 이 산이 명혈로 꼽히는 이유는 고승이 제자를 모아 놓고 불공을 드리는 형상이기 때문으로 예전에는 영축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들머리는 국립목포대학교 농과대 실습장이 있는 도림리 천지골과 월산리 수월동, 몽탄면 목우암인데, 교통이 편한 천지골이 자주 이용되고 있다. 특히 천지골 오름은 노승봉과 318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위 하루재까지 임도가 뚫려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이 임도가 하루재 건너의 법천사나 목우암 아래까지 이어져 가족산행에 적당하다.
승달산 형세는 하루재를 기점으로 남쪽은 육산이고 북으로는 바위가 많은 산이다. 하루재에서 노인봉을 지나면 제일먼저 사자를 닮은 사자바위가 나타난다.
승달산을 올라보면 서로는 서해바다가, 남으로는 목포와 영산호가 서로는 영산강 줄기가 유유히 흐른다.
등산코스
 
  • 목포대학교 - 하루재 - 노승봉 - 승달산 - 법천사 석장승
  • 격양동 - 매봉 - 깃봉 - 사자바위 - 하루재 - 노승봉 - 승달산 - 법천사 석장승
  • 교통 :
    서해안고속도 일로IC -> 815번지방도(청계/나주방면) -> 1번국도(나주/광주방면) -> 청계면소재지 목포대학교
    대중교통 :
    목포 - 무안간 버스이용. 목포내앞에서 내린다.
    산행기점인 청계면 도림리까지는 목포대학교로 가는 시내버스가 수시로 운행한다.  


    무안 승달산에서 서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향에 가면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들과 승달산 능선을 오른다.
    등산 코스가 길고(종주코스 약 20km, 목포 근교에서-무안읍까지 이어져 있다)

    승달산의 전설

    무안을 동서로 청계와 몽탄을 가르고 있는 산이 승달산이다. 이 산은 목포 유달산과 쌍벽을 이루는 명산이며 불교의 사적이 많다. 이산을 승달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고려 인종때(1122년) 원나라 원명이 이 산에 올라와 교세를 크게 떨쳤고 그의 제자 500여명이 모두 달도한 후부터라 한다.

    승달산에는 총지사, 법천사, 목우암등 사찰이 있었으며, 법천사는 신라 선덕여왕 24년 금지국의 스님 정명이 창건했고 고려 현종 조인 1030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백년후인 인조때 몽탄쪽에 있던 것을 청계쪽으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절마저 임진왜란때 불이나 겨우 불상과 불구 일부를 목우암으로 옮겼다고 한다.  목우암은 정명스님이 지었다고도 하고 승달산 정기를 받은 목동이 득달해 지은 절이라고도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창건년대는 알 수 없다.  법천사에서 8㎞거리의 대치리 송정마을에 총지사란 절터가 있는데 이 사찰은 신라때 혜통이란 스님이 당나라에 건너가 3년간 공부한 뒤 665년에 경주에 돌아와 개산했다고 한다.

    총지사는 원래 총지종파였으나 1424년 천재 조계등과 합쳤으며 무안의 총지사는 전남지방 본거지로 그 가람이 90여동에 달하는 거찰이었으나 1810년을 전후에 폐찰되었으며 지금도 이 절터에는 추춧돌만 남아있고 절터에서 500m 지점에 석장승 2개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총지사가 폐찰된 것은 당시 충북석 성현감을 지낸 임면수라는 인물의 세도 때문이었는데 사찰경내에 묘를 쓸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그의 부친묘를 절뒤 묏등에 썼는데 이를 본 중들이 직접적인 항의는 못하고 몰래 참나무로 말뚝을 깎아 묘지 한 가운데 박아 버렸다고 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발견한 임면수는 힘없는 중들을 쫓아 버리고 절에 방화를 하였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또한 이조 중엽에 신적리 마을에 박씨와 이씨가 살았었는데 이들은 평소 사이가 나빴으나 이씨의 아들과 박씨의 딸은 부모들의 관계와는 달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박씨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딸을 죽이려 하므로  박씨의 딸은 이씨의 아들에게 알리고 승달산 속 암자에 피신하였다. 그런데 이곳 암자에 주지승이 처녀를 겁탈하였고 이를 전해들은 이씨 아들은 쫓아와 중을 죽이고 암자에 불을 지른 뒤 남녀가 함께 불속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한다.  그 후 원수같이 지내던 이씨와 박씨는 서로 화해하고 마음을 합해 법천사를 짓고 두 남녀의 원혼을 빌었다고 전하는데 그러나 승달산 주위에는 신적리라는 마을이 없었다고 하니 알 수 없는 전설로 이어지고 있다.

     

    극가형(極嘉形)의 명당 승달산(풍수칼럼. 전북일요시사)

    이번 호에는 호남팔대지 중 제일이라고 알려진 전남 무안의 승달산(僧達山) 노승예불(老僧禮佛)형에 대해 기술하도록 하겠다.

    나는 한 번도 승달산 명당에 대해 명확히 기록해 놓은 풍수서를 보지 못했다.

    미리 말하자면 이 자리는 보기가 어려운 자리가 아니지만 내노라하는 풍수가들이 헤매고 있어 다소 의아스러운 감도 없지 않다.

    우리나라 풍수의 시조인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유산록(遊山錄)에는 어떻게 평가됐는지, 무학대사나 남사고 같은 명사들은 어떻게 표현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현대 들어 노승예불형 명당이 어디에 있는지, 과연 만대영화지지인 승달산 명당이 쓰여졌는지, 남아있는지를 언급한 풍수사나 서적을 보지 못했다.

    독자들이 아쉽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그 자리는 이미 쓰였다.

    박(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썼다. 자리만 보고 언제 썼는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1척이 약간 넘는 크기의 비석에 자손들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고 현재 살아 있으니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겠다.

    승달산은 무안군을 동서로 가르고 청계면과 몽탄면을 경계로 하는 해발 318m 의 낮은 산이지만 평지에 솟은 용이라 그다지 낮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산은 무안군 전체의 기를 아울렀다. 사실 무안군은 유달산을 빼고 나면 승달산으로 가는 용맥 만이 남을 정도로 굽이굽이 몰아쳐 혈을 만들어 가히 장관이다. 형세를 잘 보는 사람은 감탄할 수밖에 없다.

    산들이 수 십리를 달려와 뱀이 또아리를 틀 듯 혈을 감싸는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 누구라도 취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하지만 주인이 이미 정해졌으니 헛된 욕심을 내서 무엇 하랴.

    승달산이라는 이름은 고려 인종 때 원나라 승려 원명이 제자 500명과 함께 득도한 후 이 산을 승달산이라고 일컬은 데서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스님이 나기 때문에 승달산이라 하지 않았나 한다.

    혈자리 주변에는 원명 스님이 꿈에 소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잠에서 깨어나 그 곳에 가보니 소 발자국 흔적이 있어 목우암(牧牛庵)이라고 이름 붙힌 암자와 법천사(法泉寺)가 있다.

    산맥이 워낙 길다보니 형세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어디서부터 혈 자리를 찾아야 하는지 헤메게 된다.

    산 끝에서 찾을지, 가장 큰 봉우리에서 찾을지, 낮을 곳에 있을지, 높은 곳에 있는지 몰라 그냥 헛걸음을 할지 모른다.

    또 산의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 앞은 어디고 뒤는 어딘지 분간 못하는 풍수사들이 태반이다.  

    산이 흘러가는 용맥을 따라 오다 보면 목포대가 나온다. 목포대 뒤로 올라가면 산의 정상이 나오는데 혈 자리는 높은 산들이 둘러싼 가운데로 가장 낮게 뻗어 나온 소조산(小祖山)의 정상에 있다.

     산의 형상은 마치 목탁 같다. 이 산의 좌우 아래에는 절이 있다. 대혈 치고는 매우 찾기가 쉬운 자리다.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많은 산들의 정상에는 묘가 많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작은 혈 자리고 승달산 전체를 아우르는 자리는 아니다.

    승달산을 직접 가보니(사실은 수년 전에 가서 메모를 해놓은 것이다) 전체 용맥은 건해(乾亥북북서)룡이다. 이 건해룡이 수십절이 와서 주산은 신유(辛酉.서)방에 떨어졌다.

     그리고 혈자리를 만든 소조산은 술건(戌乾.서북)으 봉기한 다음 유(酉.서)방으로  입수해 최종적으로 정기를 맺었다. 경좌 갑향(庚座甲向.동향)이며 왼쪽 물이 돌아 오른쪽으로 감아 돌아 을진(乙辰)방으로 흘러간다.

    이 자리는 수국(水局)의 자왕향(自旺向)이며, 풍수서에 이런 자리는 "태방(서쪽)으로 혈이 떨어저 물이 을방으로 돌아 갑향을 만나니 복록이 가득하다. 발부발귀하고 정왕수구(인물이 나고 명이 길다)하며 발복이 영창(오래간다)하다"고 했다.

    또 "3길6수(세가지 길하고 여섯가지 빼어남)하여 7세의 신동이 나와 능히 시를 짓는다"고 했으며 극가(極佳)형이라 했다. ‘극가‘라는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혈이라는 뜻이다.

    본인이 판단하건데 이 자리는 대부귀가 나고 장상이 누대에 걸쳐 나며, 자손이 많고 자손들 중 명사가 많이 난다. 지금이라면 대권도 쥐고 남을 자리다.

    하지만 이 자리는 한가지 흠이 있다. 소조산이 술건으로 기봉한 것이다. 술건맥은 풍수상 천한 룡으로 친다. 따라서 수대에 걸쳐 승녀가 난 이후에라야 제대로 발복한다. 술건맥이 끝나고 건해맥의 정기를 받게 될 때부터 제대로 발복한다.

    그러나 이는 조족지혈이다. 발복에 비하면 흠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자리는 예로부터 노승이 예불하는 자리라고 알려졌지만 나는 스님들이 죽 둘러않아 예불하는 형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승려들이 빙 둘러 않아 목탁을 두드리며 예불하고 있는 것이 전체적인 형세다.

    승달산은 아름답고 오르기 쉬우며 희귀식물이 많이 산다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대혈에는 모두 주인이 있으니 욕심은 버리고 맑은 가을 날 주말에 산행이나 권하고 싶다. [한국의 풍수지리 칼럼]

    승달산방: 민박



    [
    한국의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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